010.
환승 없이 갈 수 있는 거리에 새 직장이 있다. 지하철을 한 번 타고 이십 분 정도 가면 도착이다. 나는 정말 기뻤다. 하지만 멍청하게 역에서 호은당까지의 거리는 생각도 못 했다. 구불구불 굽이치고 오르막 내리막 굽었다가 휘었다가 오르다가 꺾다가 내려가다 도는 삼청동 골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젠장. 역에서 올라와 호은당까지 걸어가는 데 이십 분이 더 걸렸다. 족히 한 시간 걸리는 출근길이다. 출근 시간대를 생각하면... 다행히 지옥철에 합류하는 것은 아니지만, 늦잠이라도 잤다가는 택시비로 얼마나 날아갈지 뻔했다. 식당 예약 시간은 일곱 시라고 했는데, 내가 호은당이 오래된 기와집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시간은 여섯 시 십 분이었다. 정확히 사십삼 분이 걸렸다. 아, 다리야.
나는 삐뚤고 어색한 글씨로 메뉴를 적어 놓은 어설픈 나무 입간판을 바라보았다. 저걸 새로 만드는 것도 내 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간 나는 도대체 어떤 일을 내가 해야 할까 먼저 살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정신은 싹 사라졌다.
대문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흔히 보는 기와집이지만, 이 기와집은 진짜다. 잘은 모르지만, 몇 백 년은 됐을 것 같았다. 잘 손질된 잔디밭과 반들반들하게 닳은 디딤돌들, 정원 중간중간 아무렇게나 자라는 꽃들, 그 사이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테이블 세 개와 의자들은 기와집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나름의 맛이 있었다. 한 테이블에는 젊은 아가씨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찻잔을 노려보다 대청마루를 돌아보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 대청마루로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나이 지긋한 중년 부부가 허리가 접힐 정도로 인사를 몇 번이나 하며 은미 씨의 손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은미 씨는 어색하게 웃다가 나를 발견하고 얼른 소리쳤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고 복용법 꼭 지키세요. 정우 씨! 어서 오세요!”
그제야 중년 부부는 돌아서서 대문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스쳐 지나갔다. 뭘 훑어? 기분 더럽게. 나도 두 사람을 훑어본 뒤 은미 씨가 서 있는 대청마루로 다가갔다. 오늘 그녀는 연한 노란색의 저고리와 노란빛이 많이 섞인 녹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저런 색을 올리브 그린이라고 하던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인 것 같다. 마트에서 본 올리브 오일 병 색깔 같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아주 반가워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 손님들만 나가면 닫으려고요.”
아니, 저기요, 사장님. 아무리 수제비가 먹고 싶어도 그렇지, 다 들리잖아요. 두 명의 여자 손님은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에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탕 내려놓고 휙 가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로 다가가 돈을 챙겨 그녀에게 내밀었다. 은미 씨는 돈을 받아 대청마루 귀퉁이에 놓인 나무 상자에 쑥 집어넣었다. 그 뒤 그녀는 냉큼 대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그녀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올 동안 테이블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테이블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찻잔 두 개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주문서로 보이는 얇고 노란 종이는 마치 부적을 쓰는 종이 같았다. 왠지 손을 대기가 싫었지만, 봐야 했다. 단정한 글씨로 쓰여 있는 글자는 고삼차 2. 고삼차가 미친 듯이 쓰다는 것은 전 국민이 알지 않나? 그걸 시켜놓고 짜증 내면서 가버리는 저 손님들은 뭘까. 그래서 은미 씨도 시큰둥했던 걸까. 나는 뜨끈한 찻잔 두 개를 챙겨 들고 두리번거렸다. 주방이 어디일까.
기역자 모양의 안채의 가운데, 디딤돌이 놓인 곳은 대청마루 앞과 그 옆의 다른 문이 전부였다. 나는 그곳의 문을 열었다. 창호지를 대 놓은 살문을 열자 최신식으로 꾸며진 주방이 나타났다.
주방용 가전은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캡슐 커피 머신이 종류별로 있는데, 그 아래 바닥에는 사극에서나 볼 법한 옹기로 만든 시커먼 약탕기도 대여섯 개가 옆에 쌓여 있었다. 안 어울린다. 하지만 아궁이는 없었다. 가스레인지도 없다. 빨간 동그라미 세 개가 그려진 커다랗고 까만 유리판이 두 개나 있었다. 와. 이거 한 대에 백만 원 넘는다던데.
넋 놓고 구경하다 뜨끈한 찻물이 손등에 툭 튀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싱크대로 다가갔다. 깨끗한 싱크대에는 손으로 짠 것 같은 동그란 수세미가 걸려 있었다. 나는 찻물을 따라 버리고 재빨리 컵을 씻으려고 했지만, 주방세제가 어느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똑같이 생긴 새하얀 세제통 세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결국 나는 그냥 물을 부어놓고 돌아 나왔다.
내가 막 주방에서 나와 문을 닫는데, 대청마루로 나오는 은미 씨가 보였다. 화려한 개량한복 위에 입고 있던 수수한 크림색 앞치마를 손에 든 그녀는, 까만색 긴 코트를 걸치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녀의 발이 들어가는 신발 역시 까만 구두였다. 굽이 거의 없는 단정한 구두는 마치 고무신 같았다.
“어? 치우셨어요? 그냥 두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세제가 어느 건지 몰라서 씻어두지도 못 했어요.”
“감사해요. 우리, 서둘러야 해요. 예약했어도 10분 전에 도착 안 하면 안 받아 주거든요, 그 집.”
그녀는 손에 든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내려 보았다. 여섯 시 삼십 분이 조금 못 된 시간. 도대체 거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헛걸음하지 않길 바랐다. 호은당까지 걸어오느라 꽤 허기가 졌다. 나는 키도 작은 주제에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은미 씨를 뒤쫓아 얼른 호은당을 나섰다. 쿵 하고 나무문 닫히는 소리는 묵직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녀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번뜩이는 자동차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았다. 내가 벨트도 다 채우기 전에 은미 씨는 출발했다. 나 참. 이 여자, 진짜 카 레이서가 꿈인가. 골목에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다. 나중에 대리 운전시켜놓고 답답하다고 뒤통수 때리는 거 아닌 가 몰라.
속으로 구시렁대는 사이 자동차는 꽉꽉 밀린 도로를 무시하고 골목과 골목을 바람처럼 훑어 어디론가 자꾸만 들어갔다. 끽. 차가 급히 멈추고 은미 씨는 후다닥 차에서 내려 달려갔다. 나는 벨트를 풀다 말고 얼빠진 얼굴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이 보였다. 으리으리하고 삐까번쩍하는 식당을 기대했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수제비 집이었다. 할매손 수제비. 저거 체인점 아닌가...?
뭐, 나는 차 문을 닫고 그녀가 사라진 가게로 따라 들어갔다. 이미 은미 씨는 자리를 잡고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헐레벌떡 그녀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내리다가 전화기를 떨어뜨려서.”
나는 허튼 핑계를 대며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은미 씨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내 눈앞의 식탁에 반찬이 놓였다. 배추김치와 부추 겉절이, 깍두기. 다른 반찬은 하나도 없었다. 오래 써서 붉은 김칫국 자국이 그대로 남은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김치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젓갈의 비릿한 냄새와 마늘의 알싸한 냄새,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으니 배가 더욱 고파졌다. 나는 얼른 수저를 꺼내 나누어 놓았다.
“근데 여기, 체인점 아니에요?”
“맞아요. 근데 이 집은 맛이 달라요.”
은미 씨는 아주 중요한 비밀을 이야기하는 듯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나도 덩달아 몸이 기울었다.
“다 본사에서 만들어주고, 주는 대로 만들어 파는데 달라요?”
“여기 주인아주머니 손맛이 달라요.”
손, 손맛...? 나는 잠시 눈을 끔뻑이며 은미 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물론 손맛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쯤은 안다. 같은 음식이라도 손맛이 있는 사람이 한 것과 없는 사람이 한 것의 맛의 차이는 천지차이라는 것쯤은 안다. 왜냐면 우리 어머니가 손맛이 없으니까.
같은 음식이라도 어머니가 만들면 맛이 없었다. 양념이며 들어가는 재료까지 모조리 받아서, 단지 무치는 것만 어머니가 했을 뿐인데 맛이 달라지는 것을 내가 직접 경험해서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식당에서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걸까. 대량으로 만들어서 제공되는 음식인데. 내가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은미 씨는 싱긋 웃었다.
“무슨 소린가, 싶으시죠? 드셔 보시면 알아요. 절 믿어요.”
자신만만한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단지가 식탁 가운데에 놓였다. 각자의 앞에 작은 크기의 대접이 놓이고 작은 국자는 내 그릇에 놓였다. 나는 국자를 들어 단지 안의 수제비를 뜨려고 했다. 그랬다. 국자가 없어져서 뜨지 못했다. 언제 은미 씨의 손에 국자가 넘어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은미 씨는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단지 안의 수제비를 휘휘 저어 그릇 가득 담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내 그릇을 내밀고 그녀가 주는 수제비를 받아 들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들깨 수제비인데. 은미 씨는 어느새 자신의 몫까지 담았다. 그녀가 숟가락을 들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어서 맛보세요. 진짜 다를 거예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천천히 뜨거운 수제비 하나를 떠 입에 넣었다. 뜨거워 죽겠는데 맛을 어떻게 알겠냐만, 일단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어쨌거나 내게 월급을 주실 사장님이니 말이다.
나는 뜨거운 밀가루를 입 안에서 굴리며 맛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국물 맛은 그냥 들깨 수제비 국물이다. 달큼하고 구수한, 평범한 들깨 국물이다. 수제비를 한 입 꾹 씹은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은미 씨가 빙긋 웃고 있었다.
아. 이래서 큰소리를 쳤구나. 수제비 반죽이 미쳤다. 두께도 제각각이고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탄력이 미쳤다. 질긴 것은 절대 아니다. 쉽게 끊어지지만 그 탄력은 예술적이었다. 내가 수제비를 참 좋아하긴 해도, 반죽이 어떻고 국물이 어떻고 따지는 타입은 아니다. 그냥 수제비라면 다 좋아한다. 수제비는 어떻게 끓여도 맛있는 음식이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껏 먹어왔던 수제비는 수제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반죽을 그따위로 해 놓고 수제비라고 했다니! 이것이 진정한 수제비다! 입 안에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밀밭이... 펼쳐질 리가 없잖아.
반죽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사실 미식가 따위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그냥 지금까지 먹었던 것과는 다른 쫀득함과 탱탱함이 살아있는 특별한 반죽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밀가루 냄새 풀풀 나는 수제비들과 달리, 고소하고 짭짤한 수제비는 확실히 독특했다.
“다르죠?”
“어... 제가 은미 씨처럼 미식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반죽이 예술이네요. 지금까지 먹어 본 수제비 중에서 최곱니다.”
은미 씨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수제비를 입 안 가득 떠 넣었다. 안 뜨겁나.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맛있게 먹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더 먹기가 미안했다. 하지만 내 그릇이 비워지기 무섭게 은미 씨는 채우고 또 채워 주었다. 그녀는 이 김치는 시원하고, 이 겉절이는 개운하고, 이 깍두기는 달큼해요. 하며 하나하나 챙겨주었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이 그리 없는 일은 아니다. 일을 할 때도 늘 같이 모여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은미 씨와 밥을 먹으면 뭔가 좀 달랐다. 그게 밥이든 빵이든. 은미 씨와 같이 무언가를 먹고 있으면,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가 아니었다. 음식 하나하나에 담긴 맛과 향과 색과 멋까지 모두 눈여겨보게 되고 신경 써서 맛보게 된다. 흔한 김치 한쪽도 그녀가 내밀면 어째선지 다르게 보였다. 평범한 수제비도 그녀가 권하면 엄청난 음식이 된 것 같았다. 그것이 부담스럽다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음식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음식이 가진 진정한 매력을 모두 보는 것 같았다.
뭐, 고작 세 번 먹었는데. 오버하는 것 같긴 했지만, 정말 그랬다. 은미 씨와 함께 무언가를 먹으면 단순히 먹는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드라마에 나오던 혼자 미식을 즐기는 그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일 수 있을 만큼 내가 표현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서 아쉬웠다. 내가 그 아저씨였다면 은미 씨가 만족할 만큼 리액션을 풍부하게 해 줬을 텐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액션은 그저 맛있게 먹는 것뿐이었다.
아. 진짜 맛있다.
단지 가득했던 수제비는 깨끗하게 비워졌고 우리는 빵빵하게 부푼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섰다. 조금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으면 하는 욕심이 슬쩍 생겼다.
은미 씨는 자연스럽게 나를 집 앞 골목에 내려주었고 주말 편히 쉬라는 인사까지도 덧붙였다. 그녀가 손을 흔드는데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요즘 제일 핫 한 트로트가 차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잘 먹었다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창문이 스르륵 올라가고 차가 출발했다. 얼핏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은호가 어쩌고 하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이미 차는 멀어진 뒤였다. 나는 저 멀리 골목 끝 하늘에 우뚝 선 옥탑방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부디 의약품 오남용으로 인한 사고만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빌었다. 출근도 하기 전에 직장이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어둑해지는 계단을 올라 옥상을 휘휘 둘러보았다. 역시나. 이 할망구, 결국 상추를 뜯어 갔다. 그래. 많이 뜯어 드세요. 남의 것 야금야금 훔쳐 먹고 얼마나 부자 되는지 봅시다. 아주 크은 부자 되시겠어. 나는 평상에 털썩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굉장히 오래전 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해고당하고 웬 소매치기를 잡았다. 여신 같은 예쁜 여자랑 밥도 세 번이나 먹었고, 이틀만 지나면 그녀와 함께 일한다. 거기다 월급도 빵빵하고 조건도 좋다. 이만하면 박정우 인생 폈다. 어두운 하늘에 부옇게 퍼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나는 픽 웃었다. 고작 이 정도에 만족할 줄이야. 내가 꾸던 그 꿈은 어딜 간 걸까. 뭐, 아무렴 어때. 현실에 충실하면 되는 거지. 더는 오를 수 없는 나무에 오르는 꿈은 꾸지 말자.
나는 드디어 신기루 같은 어린 날의 내 꿈을 버릴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꼭 비싼 옷을 입고 높은 빌딩에서 멋을 부리며 일 하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껏 그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것을 놓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번지르르한 포장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나는 구겨지고 낡고 빛바랜 포장지를 곱게 접어 버릴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도 고생하고 욕을 먹고 힘든 날들을 견디면서도 붙들고 있었던 그 꿈을, 단 일주일 만에 나는 쉽게 놓았다. 그것은 은미 씨의 힘일까, 나의 변덕일까. 뭐가 됐든 지금은 후련했다. 지금의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배가 든든했다. 아. 내가 배가 불러서 이러는구나. 픽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