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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Nov 17.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4-흉가 체험, 그 후 (3)>



 나와 우민이가 안간힘을 쓰며 부부를 남자에게서 떼어 놓으려는데 안방 문이 쾅 열리고 은미 씨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은미 씨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하고 성큼성큼 나왔다. 문이 꽝 닫히는 소리에 부부는 물론 우리까지 움찔거리며 놀랐다.


 “이 시건방진 새끼가... 감히 선녀님 앞에서 장난질이야? 잡귀 나부랭이 주제에 겁대가리가 겁나 없네? 응? 너 오늘 한 번 뒤져 봐라. 대사님한테까지 갈 거 없이, 내가 너 아주 살살 녹여서 죽여줄게. 뒤졌다, 너는. 정우 씨, 우민아. 저 새끼 꽉 잡아.”


 은미 씨는 시퍼런 불꽃이 펑펑 튀는 눈을 하고 와 남자의 옆에 털썩 앉았다. 들고 나온 바구니 안에서 달각달각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여전히 몸부림을 치며 엄마, 아빠 울부짖었다. 남자의 부모는 갑작스러운 은미 씨의 욕설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아들을 붙잡고 있었다.


 “아저씨, 끈 놔, 시발. 끈 풀면 다 뒤져. 뒤질 거면 늬들 식구끼리 곱게 뒤져. 우리까지 죽이지 말고.”


 남자의 아버지가 움찔했다. 언제 매듭을 잡은 거지? 매듭은 등 뒤에 있는데 은미 씨는 또 어떻게 본 거지? 아, 그게 중요한가! 다 죽는다는데! 얼른 떼 내야지! 나와 우민이는 부부가 멈칫하는 사이에 얼른 그들을 끌어당겨 문 쪽으로 옮겼다. 약 먹인다는 말에 부부도 조금은 진정한 것 같았다.


 “엄마! 아빠! 이 사람들 미쳤어! 이 사람들 사이비라고! 가짜야! 살려줘!”


 “안 닥쳐?! 어디 귀신 나부랭이가 산 사람 놀리고 있어! 아가리나 처 벌려! 약 들어간다, 새끼야!”


 허, 참... 곱게 머리 묶고 예쁜 한복 입고 단아하게 화장하고 이 새끼, 저 새끼 욕설이라니... 종종 보는 모습이지만 볼 때마다 적응 안 된다. 나는 남자의 머리를 꽉 잡았고, 나보다 힘이 센 우민이가 남자의 위에 올라타 팔을 꽉 잡았다. 확실히 남자의 발버둥이 통제가 됐다. 그 사이 연화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남자에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남자는 몸을 떨어댔다.


 “목구멍 오픈해라. 약 들어간다.”


 우민이와 내가 있는 힘껏 남자를 꽉 움켜잡은 그 순간, 잠시 남자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은미 씨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손에 든 길쭉한 약병을 확 뒤집어 남자의 입에 꽂았다. 병을 휘릭 돌렸더니 약물은 꼬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콸콸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거의 다 뱉어내, 양쪽 볼로 거무튀튀한 약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바닥에 깔아 둔 연노랑 이불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흥. 계속 뱉어 봐. 정량 다 처먹을 때까지 논스톱이다, 이 새끼야. 아가리 딱 대! 미친 듯이 쏟아부어 보는 거야. 으흐흐!”


 은미 씨는 사악학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바구니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똑같이 생긴 약병이 열 개도 넘게 빼곡히 들어 있었다. 헐... 대박. 은미 씨는 병 하나를 집어 들더니 입으로 마개를 뜯어 버렸다. 남자의 입에 물린 병을 뒤로 홱 던져버리고 새로 딴 병을 또 하나 휘릭 돌리며 꽂아 넣었다. 약물은 꼴꼴꼴 흘러나와 대부분은 바닥으로 흘렀고, 일부는 남자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목젖이 간간이 움찔거렸다.


 “강민환! 삼켜! 넌 이길 수 있어!”


 문 앞에서 동동거리고 있던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남자가 움찔했다. 잠시였지만 남자의 눈빛이 변했었다. 나는 봤다. 그 순간 남자의 핏발 선 흐린 눈에 초점이 돌아왔었다. 그리고 꿀꺽, 약을 삼키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우민이 역시 빙긋 웃으며 나를 보았다.


 “환아! 아들! 삼켜! 먹어! 어서!”


 “넌 할 수 있어! 삼켜! 이겨야 한다!”


 부부는 손을 꼭 잡고 한 목소리로 아들을 응원했고, 연화는 빙그레 웃었다. 은미 씨는 여전히 사악한 얼굴을 하고 거침없이 약병을 뜯고 입에 꽂기를 반복했다.

 저기, 은미 씨...? 즐기는 것 같은데요...? 길게 찢어진 은미 씨의 입 꼬리를 타고 으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와, 씨! 겁나 무서워! 귀신보다 은미 씨가 더 무서워!




 열여섯 개의 빈 병이 바닥에 나뒹굴고 연노랑 이불의 절반 가까이가 시커먼 약물로 질척거렸다. 남자의 얼굴과 상의는 죄다 약물이었고, 중간중간 약을 뱉고 토해내서 나와 우민이, 은미 씨까지 약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웃었다. 웃을 수 있었다. 남자는 누가 봐도 정상인이었다. 그는 쿨럭쿨럭 사레들린 기침을 해 가면서도 입에 남은 약물을 삼켰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바람 같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이고호! 나 죽네!”


 “아오! 진짜! 이 형 힘 겁나 세네. 수고하셨습니다아!”


 우민이는 헐떡거리며 데구루루 굴러 내려와 바닥에 누웠다. 연화는 계속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고, 은미 씨는 뿌듯한 얼굴로 얼굴에 튄 약물을 닦았다. 남자는 멍한 얼굴로 누워 가만히 있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만 끔뻑끔뻑 할 뿐이었다. 문 앞에서 벌벌 떨고 있던 부부가 천천히 다가왔다.


 “서, 선생님...? 저희 아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보시다시피 일단 약은 통합니다만, 약 만으로는 완벽하게 치유하기 힘드니 다른 것도 병행하셔야 하는데... 혹시 종교가 따로 있으십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욕하면서 악마처럼 깔깔 웃던 은미 씨는 어디 가고, 다시 다정하고 친절하고 온화한 약사님이 왔다. 와. 진짜 다중인격 최고다. 무섭다, 무서워.


 “아, 아니요. 딱히... 없는데... 혹시 뭔가 다른...?”


 주춤거리는 부부의 반응을 보니, 또 굿이나 퇴마나 뭔가를 하라고 할 까 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래. 어제 굿 한다고 돈 엄청 들었을 테니까.


 “아니요. 종교가 따로 있으시다면, 그쪽에서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을 연결해 드리려고 여쭈었습니다. 따로 없으시다면,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시는 스님 한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비용 문제라면 걱정 마십시오. 그분은 돈을 받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것을 요구하시긴 하는데... 그 정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걱정 마시고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은미 씨는 주머니에서 약물에 젖은 명함 하나를 꺼냈다. 반쯤 시커멓게 변해 누글누글 거리는 종이를 받은 남자의 부모는 눈을 잔뜩 찡그려가며 글자와 숫자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했다. 거 참. 좀 멀쩡한 걸로 주지...


 “대사님께 연락을 드려 놨습니다. 전화하시면 아실 겁니다. 아드님은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녀석이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으니, 가급적이면 귀신 많은 곳, 그러니까... 외딴곳이나 물가, 빛이 들지 않는 곳은 피하도록 하십시오. 약을 조금 더 드리겠습니다. 매일 한 알씩 드시면 됩니다. 복용법을 적어 드려야 하는데... 지금 좀 피곤해서요. 새겨들으세요. 매일 자기 전, 한 알씩 물과 함께 씹어서 드시고 육식이나 날 음식은 피하십시오. 계란이나 우유도 안 됩니다. 동물성 식품은 일절 드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날 음식은 안 됩니다. 아, 밀가루 음식도요. 꼭 지키셔야 합니다.”


 은미 씨도 힘이 들었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힘겹게 일어나 남자를 묶은 붉은 끈을 잡았다.


 “이제, 풀어줘도 되지?”


 연화는 대답 없이 남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뭐가 잘 못된 걸까? 표정이 굳었다. 은미 씨도 대꾸가 없자 고개를 돌려 연화를 보았다. 바닥에 누운 채 빈 병들을 팔로 쓸어 모으던 우민이도 고개를 들었고 부부도 얼음처럼 굳었다.


 “잠깐만. 이상한데... 언니 약이 듣긴 한 것 같은데...”


 연화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채를 접었다 펴길 반복했다. 눈은 여전히 붉은 밧줄에 묶인 채 얌전히 누워있는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찜찜한데...”


 “저... 이제 저 괜찮은 것 같아요. 이상한 소리도 안 들리고 머리도 맑은 것 같아요.”


 누워있던 남자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연화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연화는 또렷하게 맑아진 남자의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영감님한테 빨리 가 봐. 하루라도 빨리 가는 편이 좋아. 영감님은 휴대폰 없어. 저녁에 일곱 시 넘어서 전화해. 그럼 받을 거야.”


 연화는 여전히 그의 눈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빠르게 대꾸했고, 남자의 부모는 눅눅한 명함을 품에 고이 넣었다. 나는 붉은 밧줄을 쥔 채 어물거릴 뿐이었다. 풀어, 말어? 괜히 찝찝하게 왜 저래? 내가 주춤거리는 사이, 남자의 아버지가 냉큼 달려와 매듭을 호로록 풀어 버렸다. 묶을 때는 그렇게 어려웠는데 푸는 건 금방이다.

 남자의 부모는 비틀거리는 아들을 부축해 일으켰다. 남자는 약물에 푹 젖어 축축한 옷과 머리를 한 채,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머리가 맑아졌어요. 괴상한 소리도, 이상한 우물도 이제 더는 안 보이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를 부축한 부모 역시 눈물에 젖은 얼굴로 인사했다. 여전히 굳은 얼굴의 연화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은미 씨가 인사를 받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약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욕실을 알려주며 씻고 가는 게 어떻겠는가 물었지만, 그들은 이 약물 냄새마저도 이제는 향긋하다며 그냥 가겠다고 했다.

 바람 시원한 마당에 잠시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우민이가 은미 씨 대신 약봉투를 들고 나왔다. 예의 그 누런 봉지에 담긴 약과 함께 계좌번호가 적힌 호은당 명함을 건넸다. 약값은 솔직히 좀 큰 금액이긴 했다. 하지만 쏟아부은 약만 16병이다. 게다가 그 약이 어디 보통 약인가. 귀신을 쫓는 약이다. 부부는 금액에 잠시 놀라는 듯했지만, 이름 높은 무당도 포기 한 아들을 살린 약이라면 이 정도는 이해한다며 웃었다. 아들은 들어 둔 적금이 있으니 그걸 보태라며 자신의 부모를 위로했다.

 정말 정상인이 맞다. 올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와 우민이는 환한 얼굴로 돌아가는 그들을 배웅했다. 기운은 없어 보였지만 밝은 얼굴로 웃는 아들과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부부가 탄 자동차는 금세 멀어졌다.


 “아이고, 삭신이 다 부러진 것 같다. 들어가자.”


 “형, 저녁에 뭐 먹어?”


 “... 배달.”


 “난 짬뽕. 곱빼기로. 칠리 새우도.”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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