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오르막

by 리나권

나는 스스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 자부했다. 그래서 그들과 마주치면서도 특별한 깨달음을 얻은 적이 없었다. 그 믿음의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아빠의 긴 투병 생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병원이라는 공간에 익숙했고 휠체어, 식사 보조 도구 같은 것들도 내겐 특별한 풍경이 아니었다. 아빠 또한 긴 병상 생활 끝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 오랜 시간 아빠를 괴롭히던 욕창이 결국 아빠의 두 번째 발가락을 앗아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발가락 하나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는 여전히, 영원히, 사랑하는 나의 아빠였다.

어린 시절 내가 봐온 장애인들은 때론 친절했고, 때론 까칠했으며, 때론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냈다. 미디어 속 천사도, 세상을 마냥 삐뚤게 보는 냉소주의자도 아니었다. 비장애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냥, 함께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그저 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랐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마음을 흔든 장면들은, 나를 깨닫게 만든 순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첫 번째 깨달음은 한 어머니의 말씀에서 시작됐다. 내가 다니던 성당은 '청소년 중점 성당'으로 선정되어 발달장애 학생들이 비장애 학생들과 함께 미사를 보는 성당이 되었다. 이를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휴학생이던 나에게 신부님께서 성당에서 발달장애인 교리교사직을 제안하셨다. 사범대생이었던 나는 마침 교육봉사 시간이 필요했다. 신부님의 제안을 고민할 틈도 없이 덜컥 수락해 버렸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우매함의 봉우리 끝에 서 있던 무모한 20대였다. 편견도 없다고 믿었고 대학 수업도 들어놓은 게 있었다. 장애인을 발달장애인과 지체장애인으로 나뉜다는 것도 제대로 몰랐지만, 나는 그냥 나를 믿었다. 특수교육학개론을 고작 2시간 수강한 나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믿는 나를. 하지만 나는 곧 절망의 계곡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현장은 교과서와 달랐다. 교과서처럼 이상적이지 않았다. 이상적인 풍경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발달장애인 청소년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현장은 빠르게 수용 한계를 드러냈다. 어떤 학생은 세 명이 함께 돌보면 충분했지만, 어떤 학생은 한 명이 온전히 붙어 있어야만 했다. 여성 교리교사 한 명으로서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자주 목격했지만, 남성 교리교사는 턱없이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포함한 보조 교리교사 대부분은 비전문가였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사람은 없었고, 그나마 있던 몇 명의 전문가들도 사회복지 전공자였을 뿐 발달장애에 특화된 인력은 아니었다. 벅찼다. 지금 돌아봐도, 우리 모두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폐 성향이 있는 몇몇 학생이 문 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한 학생은 거의 탈출 성공 직전까지 갔다. 그 문 너머가 2층 난간이라는 걸 알았던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교리 시간은 고작 1시간이었지만, 매 순간이 칼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긴장을 한순간도 놓을 수 없었다. 이런 소동을 겪은 뒤, 다음 주부터는 남자 선생님을 급히 구해 모든 문 앞을 지키게 부탁드렸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나를 스쳐갔다.

‘우리의 준비가 부족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교리 시간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게 나만은 아니었는지, 함께하던 우리 모두가 서서히 지쳐갔다.

지친 우리를 보다 못하셨는지 우리를 온전히 믿고 맡기셨던 학부모님들께서 직접 나서셨다. 그때, 한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나를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

"모두 힘드시죠? 애들이 집중력이 부족하죠? 근데, 애들이 시간 개념은 정확히는 몰라도, '짧은 시곗바늘이 4로 가면 수업이 끝난다'라고 이야기하면 언제 수업이 끝난다는 것을 이해하거든요. 우리 애들도 비장애 아동들과 다르지 않아요. 언제 끝나는지만 알면 집중을 해요. 애들이 언제 끝나는지 몰라서, 애들이 지쳐서 그래요."

어머니의 말씀을 끝으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이 내 온 머리를 휘저었다. 그렇다. 우리는 발달장애 학생들을 교육한답시고, 아니, 학생들을 교육한답시고 몇 시에 마치는지도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학생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것이다. 사범대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자신만만했던 내가 너무 우스웠다. 비장애 학생이었다면 당연히 안내했을 설명을,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했을 그 한마디를, 아무도 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아니 나는, 그 학생들이 비장애 학생들과는 다르다고 단정 지어버렸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믿었던 '의식 있음'은 사실 우매함 위에 세워진 착각이었다. 편견이 없다고 자신했지만, 사실 편견투성이였다. 그런 내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냥 몰랐던 것이다. 무지 속에서 나온 오만이었다. 나는 그날, 나를 조용히 감싸고 있던 건방진 오만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두 번째 순간은 한 대화를 듣고 나서였다. 며칠 뒤, 교리교사들끼리 나눈 대화를 듣고 절망의 계곡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오르막으로 한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발달장애 학생들이 성당에 오기 전, 비장애 학생들을 맡던 교리교사 선생님들과 신부님 사이에서 의견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기존 교리교사 선생님들의 의견은 이랬다.

"비장애 학생들에게 발달장애에 대해 먼저 교육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천천히 받아들일 시간을 주세요. 학생들에게도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자 신부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준비요? 준비는 끝나지 않아요. 성장은 준비 끝에서 오는 게 아니라, 마주침에서 옵니다. 부딪히고, 당황하고, 적응하는 마주침이요. 이건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비장애 학생들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 학생들이 글로 발달장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배우는 것?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 이야기는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던 의문 하나를 풀어냈다. '비장애학생과 발달장애 학생을 이렇게 무작정 통합하는 것이 옳은 걸까? 정말로 의미가 있는 걸까?'라는 작은 의문. 신부님의 말은 그 의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었다.

통합은 기다리기만 해서는 오지 않는다. 준비의 끝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마주치며 시도해야 한다. 계속해서 부딪쳐야 한다.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서서히, 깨달음의 오르막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렸던 나는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믿음은 나를 기어코 우매함의 꼭대기까지 데리고 갔고, 모순적으로 절망의 골짜기로 밀어버렸다. 저 두 경험이 나에게 준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인을 더 많이 마주쳐야 한다. 그리고 '마주침'으로 알게 됐다. 나는 아직도 깨달음의 오르막을 오르는 중이지만, 그 오르막을 더 빨리 나아가기 위해선, 더 많은 '함께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장애인과 함께 있는 시간은 그들을 위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장애인들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내가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스스로 '의식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성장은 마주침에서 온다. 통합은 준비가 끝났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견디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때 비로소 다가온다. 나는 그 소동 끝에야 비로소 한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장애인을 마주할 때,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로 뒤로 물러서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힘겨운 깨달음의 오르막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숨이 차고 더디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오르막을 오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준비가 아니다. 서로를 향한 마주침이다. 그러니 서툴게 부딪치고 엉겁결에 당황하고 서로에게 적응하자. 마주치며, 우리 함께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올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