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으로, 잘 먹겠습니다.

by 이나라





보통 먹는 것과 사는 것은 함께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이 하나의 관용어로 쓰이는 것처럼. 그래서? 대체 먹는 것이 뭐길래 감히 사는 것과 나란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대학교 1학년이 막 되어서쯤 유튜브에는 일명 '먹방' 콘텐츠가 말 그대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먹는 것에도 유행이 존재했다. 그에 따라 배달어플들이 액정 뒤에서 마치 거인처럼 거대한 욕망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한 유튜버의 영상으로 처음 먹방을 시청하게 되었는데 입이 짧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양의 음식들이 카메라 앞에 먹음직스럽게 세팅되어있고 유튜버는 잘 먹겠다는 말과 함께 묘기에 가까운 식사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지 않아도 음식의 질감이 느껴지는 과한 식사 소리와 먹지 않아도 배부른 양에 질려 그 이후로 먹방을 시청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단 내 취향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먹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상에서 음식은 보통 에너지를 얻기 위해 억지로라도 먹거나 가끔 먹고 싶은 메뉴가 생각나는 정도, 혹은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월경 전 일주일간 내가 호르몬에 충성도가 얼마나 높은지 상기시킬 수 있는 존재 정도였다. 야채나 과일은 편안하게 먹었다. 먹기만 하면 배가 살살 아파와 유제품은 거의 입에도 대지 못했다. 육고기도 잘 먹지 않았다. 엄격한 채식을 하는 건 아니었으나 내 입은 남의 젖과 살을 그렇게 맛있어하지 않았다. (후에는 채식을 지향하고 있다.)



'요리'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어렸을 적부터 먹고 싶다면 치킨도 튀기고 매번 가을 갖가지 종류의 김장을 하던 엄마는 메추리알 장조림 하나를 할 때에도 껍질이 까져 나오는 것보다 날 것부터 익히는 방식을 선택했다. "엄마, 이거 진짜 비효율의 끝이야. 그렇게까지 할 게 있어? 그냥 까진 거 쓰셔 제발 고생하지 말고." 매번 엄마의 느린 방식은 나로 하여금 속상함의 배를 잔뜩 불리기만 했다. 얼마 전에는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고구마순 김치를 담그다가 시뻘건 피를 보기도 했다. 소화 안된 감정으로 또 한 번 잔소리 장전을 시작하는데 엄마는 어린 나의 무지한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우아한 말로 전쟁을 중단시켰다. "여보세요, 딸. 흙에서 동물에게서 나온 재료 하나라도 내 손을 타야 내가 먹는 내 음식인 거지, 공장에서 나온 재료나 하다못해 누가 만든 지 모를 배달음식을 어떻게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겠어? 복인가보다 하고 맛있게만 드셔."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염치없게도 그동안 엄마가 재료부터 직접 다듬어서 만든 정성스러운 음식은 내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쓰던 장바구니 하나를 호방하게 집어 들고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기 시작했다. 어머님들 틈에 끼어 장을 보려니 왠지 '엄마 커뮤니티'에 염치없이 끼어들어온 풋내기 같았지만 엄마에게 좋은 야채 고르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워 요리조리 돌려보며 제법 성하고 튼실한 재료를 고를 수 있었다. 요리하는 과정은 사는 것과 비슷하다. 단호박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 나는 이걸 온전히 받아들여 해내야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첨가물을 넣으면 단호박 본연의 맛과 향이 흐려져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무언갈 따라 할 필요도 없다. 내 입맛대로 내 방식대로 그러나 달라지지는 않게 열심히 썰고 삶고 튀긴다. 어느새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완성된 단호박 튀김은 깊고 기쁜 맛을 냈다. 아, 먹고사는 건 이런 거구나. 고작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까다롭게 고르는 건 본능적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의지구나. 삶의 구석구석을 끊임없이 쓰다듬는 거구나. 유치원에 다니던 7살에 식판 앞에서 하던 인사가 떠오른다. 오늘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단호박 튀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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