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의 온도

by 이나라




연인과 함께 산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7시쯤 출발해 이른 등산을 하고 은평구의 좋아하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평소처럼 잠에 들지 못해 3시 언저리에 겨우 잠에 들었고 알람이 울리던 5시엔 나도 모르게 이미 조금 약속을 미루자는 연락을 보낸 후였다. 조금 더 자자는 솔깃한 제안에 연인도 잠에 들었고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간에도 그는 달콤한 아침잠의 유혹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깨울까 기다릴까 하다가 습관적으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사람의 인간 된 도리로 그냥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유독 맑은 아침 공기에서 파랗고 노란 가을 냄새가 났다. 연인의 동네는 기찻길이 한가운데로 길게 나 있고 건물이 전부 낮아서 꼭 가보지도 않은 일본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내는 곳이었다. 혼자 좋아하는 그의 동네를 걷다가 배가 고파 충무로 김밥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물론 여긴 충무로가 아니고 인천의 끝자락이었지만.


오전 9시의 김밥집은 손님 없이 재료 준비로 바쁜 주방이모님과 뉴스를 보고 있던 사장님 뿐이었다. 아침부터 부족한 잠에 취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파 김밥과 라면을 주문한 후 자리에 앉았다.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어 가만히 둘러본 김밥집은 천장이 유난히 낮아 꼭 두더지 집을 연상케 했다. 단정하고 촌스러운 오픈형 주방 앞 다용도 테이블에 궁서체로 쓰인 예약석 팻말을 보며 김밥집의 귀여운 예약 손님을 상상하던 찰나 이윽고 머리가 회색 폭탄처럼 부푼 여자 사장님이 지각이라며 들어오셨다.


-아니 머리숱이 하도 많아서 머리만 감으면 대가리가 한참 안 말러. 걸어왔더니 땀도 범벅이고 아주 죽겠네!


그녀는 괄괄한 몇 마디를 뱉고는 겹겹의 뱃살 위로 꽃무늬 앞치마를 비장하게 매며 오늘은 나오지 않은 다른 직원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훔쳐 듣자 하니 그 직원은 당근도 제때 썰어놓지 않고 쓰레기통도 비우지 않으며 손님한테도 투덜댄단다. 그녀가 짧은 호흡과 격양된 목소리로 직원의 성실성에 대해 하길래 흥미롭게 듣고 있는데 이번에는 물건을 배달해주는 기사가 들어오며 자연스레 삼박자 커피를 탄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질감으로 서로에게 녹아들며 날씨 이야기를 한다. 배달어플 소리가 울리면 직원은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퇴장하고 기계에 서툰 사장님은 안경을 추켜 올린 후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화면을 터치한다.


-카레라이스.... 두 개.. 치즈김밥 한 줄이랑... 젓가락은 빼고..


직원이 서둘러 문제의 손질 안된 당근을 탕탕 썰기 시작하니 김밥을 물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쩐지 한 편의 희곡을 관람하는 관중이 된 기분이었다. 어떤 곳의 중앙에서 벗어난 아늑한 모퉁이가 떠올랐다. 모퉁이가 있어 그 세상은 비로소 완성된다. 두 면 정도는 막혀있는 삶이란 기댈 곳이 있어 따뜻하다. 나도 그들의 구석진 따뜻함에 함께 녹아들면 좋겠다고 생각한, 어느 이른 가을의 쌀쌀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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