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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May 13. 2020

딸에게 쓰는 편지 53;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의 5단계1

   

밥 먹으면서 전날 밤 TV에서 본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 얘기를 했었지?

<판도라>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주요 내용은 코로나 19 사태와 백신 개발 등에 대한 것이었어. 너에게 전한 것은 서정진 회장의 개인사에 관계된, “미안하다”와 “고맙다”는 말의 중요성에 대한 거였지. 사업이 안돼서 자살까지 하려고 했었는데, 운 좋게 얻은 15일의 유예기간 동안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더니 사업이 잘되더라는 이야기...    

 

아빠는 간단하게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하다”는 말로 마무리를 했었는데, 아무래도 깔끔하지가 않더라고? 정작 중요한 무언가를 빠트렸다는 생각에 되새겨보니 아빠에게 제일 인상적인 얘기는 다른 거였어. ‘미안하다’ ‘고맙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제 하려는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서정진 회장은 사업가니까 자신의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했지만, 우리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가야 하는 인간의 길을 말한 거야.     


서정진 회장은 기업가가 사업을 하는 목적을 다섯 단계로 나누었어.     

1단계; 실패하지 않으려 애쓰는 시기(망하지 말자)

2단계; 돈 벌어서 쓰는 시기(나를 위해)

3단계; 애국자 되는 시기(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4단계; 상생하는 시기(어려운 사람들을 돕자)

5단계; 다음 세대에 떳떳하고자 하는 시기(다음 세대에 번듯한 조국을 물려주자)  

   

그러면서 자기는 5단계에 속해 있다고 하더라고. 최고 단계이라는 말이지. Flex!!! 하지만 건방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스스로 겪어온 과정을 얘기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지. 자수성가해서 대한민국 2위의 부자가 되었으니, 그 사실만으로 설득력은 충분하다고 봐야지.     


그런데 5단계가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니? ‘욕구 피라미드’로 유명한 매슬로(Maslow)의 욕구 5단계와 비슷해.     


1단계; 생리적 욕구

2단계; 안전의 욕구

3단계; 애정과 소속의 욕구

4단계; 존경의 욕구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얼핏 생각하면 같은 얘기라고 할 수도 있어. 5단계로 나눈 것도, 단계별로 발전해가는 과정도 비슷해. 어쩌면 매슬로의 5단계를 참고해서 서정진 회장이 자신의 단계를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잘 살펴보면 두 사람의 관점은 전혀 달라. 매슬로는 전적으로 개인적 자아 발전에 국한되어 있지. 철저히 서구적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어.     

반면 서정진 회장의 단계는 개인적 상승이 아니라 영역의 확산이야. 관심이 점차 확대되고 심화되지. 개인에서 주변인으로, 사회로, 국가로, 마지막 5단계에는 시간적 한계도 뛰어넘어. 아빠가 오늘 말하고 싶은 핵심도 바로 이 부분, 5단계에 대한 거야.     


5단계다음 세대에 떳떳하고자 하는 시기(다음 세대에 번듯한 조국을 물려주자)     


손자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고 치자. 요즘은 손주들을 돌보지 않으려는 노년층이 많다고 하지만(매우 힘든 노동이라고 하더라고),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손자 손녀가 아니야. 손자 손녀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어도 잘 자랄 거야. 누군가가 돌보게 될 거고, 돌볼 사람이 없으면 혼자라도 잘 놀 거야. 잘 자라건 못 자라건 그건 그 아이의 몫이고, 여기서 포인트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무얼 할 거냐는 점이야.     


손자 손녀 돌보기를 거부하면서까지, 그렇게 중요하고 심오하고 중차대하고 시급한 일이 과연 무얼까? 그런 일이 있기는 한가? 아빠는 없다고 생각해. 지난 편지를 떠올려 보자.     

     

나이가 든다는 것은 ’ ‘반드시’ ‘기필코’ ‘죽어도’ ‘절대로’ 같은 단어와 멀어지는 거야.     

꼭 사고야 말겠어!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필코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죽어도 못 보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이런 마음이런 대사들은 젊음에 어울리는 말들이야나이가 들면 점점 굳은 마음이 맹물처럼 풀어져서 손에 잡히지 않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응’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는 마음이 되지강렬함보다는 부드러움이치열함 대신에 잔잔함이불같은 열정보다 물 같은 온정이굳은 신념보다 넉넉한 포용이 더 자연스러워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라는 것이 점점 무너지는 과정인지도 몰라. ‘’ ‘에고’ ‘자아’ 이런 것들이 엷어지고 넓어져서 결국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되는 것그게 나이가 든다는 거야

(<딸에게 쓰는 편지 51; 나이가 든다는 것은...> 중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라는 자아가 없어진다는 말이야. ‘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지. 시간으로는 ‘지금’, 공간으로는 ‘내 몸’이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거야. 서정진 회장은 4단계까지 공간을 확대해 가지. 1 2단계에서는 ‘나’에 급급하다가, 차츰 밖으로 공간을 확대시켜. ‘나’가 ‘우리’가 되고, 궁극에는 ‘하나’가 될 거야.     


그런데 5단계가 되면, 뜬금없이 ‘다음 세대’가 등장해. 현재의 것들은 그게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확인 가능한 거야. 실제로 존재하니까. 내 몸과 마찬가지로 ‘정말 있는’ 거라는 말이지. 그러나 ‘다음’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거야. 지금은 없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허황된 것이지. 매슬로의 5단계와 비교해 보자.   

  

매슬로의 5단계자아실현의 욕구     


‘자아실현이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분명한 것은 이 말이 ‘지금, 현재 실재하는 나’에 관한 언급이라는 거야. ‘현재의 나’를 완성하고자 하는 매슬로의 5단계와 ‘현재의 나’를 벗어나 ‘다음 세대’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서정진의 길은 전혀 다르지.      


‘다르다’고 순화시켜 말했지만, 아빠 스타일로 함부로 말하면 매슬로보다 서정진의 세계가 훨씬 차원이 높다고 아빠는 생각해. 서정진의 5단계는 우리 인간의 경계를 완성시키는 단계야. 4단계까지 공간을 확장시키고, 5단계에서는 시간을 확장시키지.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확장시켜서 벗어나는 거야. 여기에는 ‘나- 너- 사회- 세계- 우주’의 공간과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함께 나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어. 다음 세대를 위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시공을 넘어 완전에 이르기 때문에 멋진 경계가 되는 거야.     


사랑하는 딸!

아빠는 말을 잘 못해서 글로나마 너에게 아빠의 뜻을 전하려 하는데, 그것도 잘되는 것 같지는 않아. 어쩌다 전에 쓴 편지를 읽어보면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좀 더 자세히 세밀하게 얘기를 해야 뜻이 통할 것 같은데 대충 정확하지 않은 단어와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느낌? 선명하게 아빠의 뜻이 전해진다기보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느낌?     


오늘도 그럴 거라고 봐. 그러지 않으려면 꼼꼼히 검토하면서 쓰거나, 일단 쓴 것을 고치고 고치면서 완성시켜야 되는데... 그렇게 못 해! 이게 아빠의 수준이니까 그렇게 이해하길 바랄게.  

   

물론 서정진 회장이 명확히 아빠의 말처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몰라. 다만 아빠는 서정진 회장의 말이 내포하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뿐이야.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고, 너도 서정진 회장처럼 네 삶의 단계를 높여가기를 바라는 거야. 무슨 일을 하건, 어느 자리에 있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충실하게 자신의 단계를 살아가는 거야. 1단계가 없으면 2단계도 없지. 최선을 다해서 1단계를 살아내야만 2단계에 올라갈 수 있어. 부디 열심히 살아서 5단계의 삶을 맛보기를! 굿 럭!!    

 

  ---딸에게 어떻게든 뜻을 전하고 싶어 안달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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