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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pr 14. 2020

딸에게 쓰는 편지 52; 내가 이렇게 되라고 했다


이제까지 이런 때는 없었다. 이것은 위기인가 기회인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지구를 휩쓸면서 인류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간들을 겪고 있는 중이지. 매일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그동안 편안히 누리던 일상생활은 무너져 버렸어. 익숙하던 즐거움이, 당연한 듯 만나던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하게 하는 시간들이야. 아빠 역시 매일 출근하던 작업실-나는 그렇게 말하고 남들은 카페라고 부르는-을 나가지 못해서 매우 갑갑해 하고 있어.    

 

사랑하는 딸, 너는 어떠니? 온라인 개학을 했는데, 수업은 마음에 드니?

아빠가 본 바로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일단 학교를 가지 않아서 좋고, 수업은 적당히 내가 듣고 싶은 시간에 들으면 되고, 무엇보다 마음껏 늦잠을 잘 수 있으니 더욱 편하지.     


그러나, 본의 아니게 하루 종일 너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게 된 아빠는 어떨까? 오전에는 당연히 자고, 점심은 억지로 깨우니 먹는 둥 마는 둥, 저녁 무렵 엄마가 퇴근할 때쯤에야 너의 하루는 시작되지. 노트북과 태블릿과 핸드폰을 오가며 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아올 무렵 네 방의 불은 꺼져. 네가 아빠 입장이라면 어떨 것 같니?     


솔직히 말하면 아빠는 불안해. 할머니는 네가 공부 열심히 한다고, 너같은 아이는 스스로 알아서 하니 걱정할 게 없다고 하시지만 아빠는 걱정돼. 혹시 네가 공부 아닌 다른 걸 하느라 밤새는 게 아닌지, 그런 걱정이 한 20% 정도 돼. 나머지 80%는 밤새 네가 하는 ‘그 무엇’이 네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너를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끌고가는 ‘그 무엇’인지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야. 네가 소모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너의 진정성에 복무하는 그런 시간을 가지라는 거지. 코로나19라는 재난의 시간이, 쓰기에 따라서는 너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그런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중력은 가까울수록 크게 작용합니다. 중요하고 집착이 강한 순서대로 배치됩니다. 당연히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집착도 강합니다. 내 눈, 코 입, 손발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기족들 친구들 동료들이 중요합니다. 저는 송혜교를 좋아합니다만 그건 그저 생각이 그런 것뿐입니다. 멀리 있는 송혜교보다 지금 곁에 있는 나의 여편이 일억 배 천억 배 더 소중합니다. 현실이, 지금 내게 일어난 결과가 내가 원하는 정답입니다.     


지금 이 순간, 현재 벌어지는 나의 현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공이 됩니다. 내가 왜 이 상황을 만들었는지 질문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이므로, 현재의 나를 전적으로 긍정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짜증도 나고 화도 나고 싸움도 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주인공인 내가 그러라고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은 이 현실 자체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려고 이 현실을 만들었나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 이 현실이 좋다 혹은 싫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뭘 하고 싶지?’라고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게 주인공의 자세이고, 내 욕망의 중력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 아빠의 글 유갓메일! ‘세상살이의 제 2정석; 세상은 나의 중력대로 구성된다’ 중에서     


그리하여, 불안하지만 아빠는 ‘내가 이렇게 되라고 했다’는 것을 믿으며 발버둥 친다. 스믈스믈 솟아오르는 의심을 떨치려고 발버둥친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번식해니가는 의심, ‘혹시 딸이 쓸 데 없는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을 지워버리려고 발버둥친다. 할머니처럼 ‘공부 열심히 한다’고 믿지는 못해도, 적어도 ‘하고 싶어하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걸 한다’고 믿으려고 발버둥친다. 네가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으려고 발버둥친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나는 다시 중얼거린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사랑하는 딸더러 그렇게 살라고 했다고.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살아나는 의심 바이러스에게 절대로 지지않겠다고.      

위기의 시간을 기회로 만들어가는 우리 딸 파이팅!     

  --- 여전히 불안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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