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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Mar 30. 2020

딸에게 쓰는 편지 51;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게 필요해?”     


갑자기 아빠의 핸드폰이 먹통이 됐고, 혹시 밤이 지나면 저절로 원상회복이 될까 했지만 실망스럽게도 묵묵부답. 그리고 일요일 점심시간, 잠시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빠가 너에게 조용히 속삭였지. 만약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 핸드폰이 영영 망가진 거라면, 그래서 새로 핸드폰을 사야 한다면 아빠는 최신형 핸드폰을 살 거라고. 혹시 엄마가 들을까 봐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말하는 아빠에게 너는 시큰둥하게 물었어. “그게 필요해?”     


그 최신형 핸드폰이 필요하냐고? 필요한 이유를 아빠는 100가지도 넘게 말해줄 수 있어. 특히 아빠가 사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카메라 성능 때문인데, 핸드폰 카메라가 1억 화소에 100배 줌이 가능하다니 정말 언빌리버블 아니니?     


카메라 성능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무 살이 막 넘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네 살아온 순간 골목골목을 꼼꼼히 사진으로 남긴 게 바로 그 카메라 덕분이니까. 

사진을 찍을 때, 좀 더 카메라 성능이 좋았으면 하고 안타까워한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너는 모르지. 조금만 더 빨리 찍을 수 있었으면, 조금만 더 줌인이 되었으면, 역광에 조금만 빛 조절이 되었으면, 어두운 조명이라도 깨끗한 화면으로 찍을 수 있었으면 등등...


다시 말하면 아빠에게 핸드폰의 카메라란 좀 더 너의 순간순간을 생생하게 잡아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의 집합체인 셈이야. 그러나 너는 마치 아빠가 ‘나, 페라리 스포츠카 사기로 했어.’라고 말이라도 한 것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지.     


“그게 필요해?”     


당연히! 예전처럼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핸드폰의 카메라는 중요해. 가끔 엄마하고 셀카를 찍을 경우가 있는데, 화질이나 조명이 생각처럼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 특히 셀카가 아쉽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처럼 정색하고 다시 물어보면 아빠는 항상 대답을 머뭇거리게 돼. ‘그게 필요해?’라는 말은 ‘그게 꼭 필요하냐?’는 뜻이고, 그렇게 ‘꼭!’이라는 단서가 붙으면 아빠는 저절로 ‘아니’라고 말을 하게 돼. 지금의 아빠에게 ‘꼭’ 해야 할 일이란 거의 없거든.     


나이가 든다는 것은 ‘꼭’ ‘반드시’ ‘기필코’ ‘죽어도’ ‘절대로’ 같은 단어와 멀어지는 거야.

꼭 사고야 말겠어!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필코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죽어도 못 보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이런 마음, 이런 대사들은 젊음에 어울리는 말들이야. 나이가 들면 점점 굳은 마음이 맹물처럼 풀어져서 손에 잡히지 않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응’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는 마음이 되지. 강렬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치열함 대신에 잔잔함이, 불같은 열정보다 물 같은 온정이, 굳은 신념보다 넉넉한 포용이 더 자연스러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나’라는 것이 점점 무너지는 과정인지도 몰라. ‘나’ ‘에고’ ‘자아’ 이런 것들이 엷어지고 넓어져서 결국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게 나이가 든다는 거야. 

    

“너 자신을 알라(Know Youself)!”     


인류가 남긴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겠지? 이 말을 내 입장에서 다시 받으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될 테고, 그렇게 보면 인생이란 결국 ‘나를 알아가는, 나를 찾아가는, 그리하여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다시 말해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꼭 해야 할 것이 없어진다는 것은,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인 셈이지.     


사랑하는 딸!

하지만 너는 이제 겨우 스물 하나, 막 인생의 질주를 시작하는 나이니까 단단하게 살 필요가 있어. 좀 더 강해져야 하고, 좀 더 힘차게 달려야 하고, 좀 더 욕망의 크기를 키워야 하고, 좀 더 네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해봐야 하고, 네 원하는 바를 거칠게 밀어붙여야 해. 너 자신을 알기 위해서 네가 원하는 바 모든 욕망의 최대치를 발산하고 확인하고 검증해야 해.      


젊다는 것은 꼭, 반드시, 죽어도, 절대로 해야만 하는 너의 것이 있다는 거야. 그 너만의 것을 위해서 싸우기도 하고 무례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칙도 할 수 있어야 해. 넘치게 담아보지 않으면 네 욕망의 그릇에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 젊음의 질주 속에서 때로는 아프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또 때로는 부서져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런들 어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바람의 시달림을 견디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 나무들이 당당한 자존심을 꼿꼿이 세울 수 있었으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꼭 해야 할 나만의 것을 해내는 과정’이야. 그 과정의 희로애락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 확인하고, 말 그대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거지. 아빠가 지금 ‘꼭’ 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은, 젊은 시절 ‘꼭, 반드시, 기필코, 때려 죽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는 뜻이야. 욕망은 치열하게 추구하면 맑아지고 가벼워지고 순수해지지만, 피상적인 자극만 좇다 보면 지저분해지고 무거워지고 부패하게 돼. 부디 네가 너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방탄소년단 말하는 '탕진잼'도 그런 의도라고 생각해. 그들의 <Love Sourself>  시리즈도 그런 맥락이라고 봐야지.

꽃이 만발하는 봄날이야. 봄은 왔으나, 세상은 코로나 때문에 어수선하네? 아름다운 봄날, 세상은 흉흉하지만, 우린 우리의 시간을 살아가야지. 각자 자기가 할 일을 해내 가면서. 너는 꼭! 아빠는 그냥... 방탄소년단의 <봄날>이나 들으면서...


    --- 딸의 시큰둥한 대답에 ‘욱’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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