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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ul 09. 2020

딸에게 쓰는 편지 56; 코로나 블루? 코로나 해피!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대. 아빠의 우울증이 다시 올라온 것도 코로나와 약간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 미국은 연일 사상 최고치의 확진자를 쏟아내고 있고, 우리나라는 환자수가 여전히 잡히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는 중이지.     


그러나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법.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드니 동물들이 살아났어. 설악산 한계령에서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알비노 담비가 발견됐다고 하고, 계룡산에선 '불새'라 불리는 희귀 여름철새 호반새도 발견됐다고 해. 인간의 우울이 다른 동물들에겐 해피가 된 거지.


이렇게 우울한 시기, 우리 집에 어제저녁 기분 좋은 일이 생겨났어. 그건 바로, 우리 집의 유일무이한 딸이 처음 식사를 마련했다는 것! 대학생이 되어서도 집안일에 전혀 무관심이라 우려하던 상황이었는데(특히 할머니께서 걱정했음. ‘가르칠 건 가르쳐야 한다’는 게 할머니 지론이니까.) 드디어 정상적인 가족의 일원이 된 거야. 코로나에게 감사를!     


코로나 때문에 일이 힘들어진 엄마가 어느 날 아빠에게 ‘저녁에 닭볶음탕을 해놓으라’고 지시를 했지. 물론 재료는 미리 사다 놓은 상황이었고, 아빠는 그걸로 레시피 보면서 하면 되는 거였어. 그 정도야 껌 씹기 만큼 쉬운 일 아냐?     


옛날에 아빠가 요리 배운다고 하다가 포기한 적 있지? 그때 힘들었던 것은 요리 자체가 아니었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너무 힘들었지. 어린아이가 삼시세끼 섬에 혼자 남겨졌다고 해봐. 무슨 고기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전혀 감이 없잖아? 구체적으로 무얼 잡으라 하면 그때부터는 쉬워. 아무리 어려워도 쉬워. 하면 되니까. 안되면 안 되는 대로, 잘 안되면 잘 안 되는 대로 하면 돼. 그때도 만약 한 달 내내 식단을 주고 하라고 했어도 해냈을 거야. 그대로 따르면 되니까.  

    

어쨌든! 너한테도 엄마가 임무를 맡겼지. 계란말이를 하라... 너는 두 번인가를 계란말이 계통으로 뭔가 했고, 이번에 드디어 너만의 참신한 메뉴를 만들어낸 거야. 날이 더워서 준비했다는, 바로 ‘냉라면’!!!   

  

전국, 세계 각지, 여기저기 다니며 각종 요리를 먹어봤지만 냉라면은 처음 먹어봐. 기대에 차서 한 숟가락 국물을 입에 넣었는데, 세상에... 너무 짜!(생각하면 당연하지. 그냥 라면수프만 해도 자극적인데, 거기에다가 이것저것 더 넣었으니 얼마나 요란한 맛이겠어. 그 왜, 네가 어쩌다 먹는 불량식품 과자 있지? 딱 그 맛이더라고.) 

    

그런데 반전. ‘맛은 포기하고 네가 처음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먹어야지’ 생각하면서 면을 먹었어. 맛있는 거야! 면이 꼬들꼬들 잘 삶아진 건 물론이고, 면하고 같이 먹으니까, 그렇게 자극적이던 국물 맛이 중화돼서 묘하게 맛있어. 뜨거운 라면은 사실 국물 맛을 미세하게 느끼기 어려운데, 냉라면이라 국물 맛이 끝까지 살아있더라고. 아주 좋았어.     


사랑하는 딸!

너의 새 출발을 축하한다. 그까짓 저녁 한 끼 차린 걸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야. 이건 충분히 축하하고 축하받을 만큼 대단한 일이야. 이제 비로소 네가 주인공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신호인 거니까. 옛날에 너 대학 입학 때 아빠가 한 편지를 보자.   

  

이제 겨우 스무 살, 막 대학 합격 통지를 받은 새내기 대학생에게 '이 세상은 네 세상이다'라고 말하는 게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아빠도 용기를 낼게. 용기를 내어 더 강조해서 말할게, 이 세상은 네 세상이고, 이 세상의 주인은 너라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에 너만이 유일한 존재이고(부처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의 모든 것은 너의 뜻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물론 믿어지지 않을 거야. 아빠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될 거야. '나는 지구 상 80억 가까운 호모 사피엔스 중 하나에 불과하고,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아빠는 그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너는 80억 인류의 중심에 있고, 네가 없으면 인류는 물론 이 우주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너라는 개체가 눈을 뜨면서 이 세상도 생겨났고, 네가 죽으면 이 세상도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러므로 너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주관자이자 책임자이며, 네 생각 네 행동이 세상의 운동에 결정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 세상의 모든 것은 각자의 계획에 따라 배치되어 있어. 엄마 아빠가 너와 가까이 있는 것은 네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야. 아빠가 뉴욕을 좋아하고 이과수 폭포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멀리 두는 것은 (구체적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야. 세상 모든 일은 각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 일어나는 거야.

       --<딸에게 쓰는 편지 33-축 합격. 이젠 네 세상이다!> 중에서     


네 집이지만 너는 주인으로 살아오지 않았어. 집은 엄마 아빠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너는 잠시, 완전한 성인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임시로 머무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들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는 거야. 엄마 오리를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처럼 그냥 곁에 붙어만 있었던 거지.     


그런데, 드디어, ‘얻어먹는’ 신세에서 벗어나 ‘차려주는’ 주인공으로 탈바꿈을 한 거야. 그전에 네가 계란말이를 한 것과는 완전 다른 상황이지. 그때는 시킨 것을 하는 종의 입장이었다면, 이번 냉라면은 네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주인의 행동이니까. 아빠가 옛날에 한 얘기 기억나니?      


잘 살기 위해서는 규칙을 알면 편하다. 공식을 알면 문제풀이가 쉬워지듯이, 공동체 생활의 공식을 알고 있으면 훨씬 갈등의 요소가 줄어든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복습 차원에서 집안일을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리해 보자.     


제1 공식. 혼자 산다고 가정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면 그건 내 일이다. 다시 말해서 먹고 자고 치우고 돈 벌고 하는 모든 일들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혼자 그걸 어떻게 다 하느냐고?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해야 한다. 미성년이라면 유예가 되지만 너는 이제 성인이다. 그러기 싫으면 누군가와 같이 살며 서로 도와야 한다. 나누고 함께 하며 살아야 한다. 그게 가족이다. 

        ---<딸에게 쓰는 편지 41; 집안일의 정석> 중에서     


이제 아빠의 축하가 이해되니? 어제저녁 너의 냉라면을 먹고 아빠가 기분이 좋았던 것은, 그게 맛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네가 우리 집의 주인임을 선언했기 때문이야. 생활의 가장 중요한, ‘먹는 일’을 네가 스스로 책임졌다는 것! 네 삶의 자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그들을 위해 뭔가 구체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 너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가까운 행성들을 의식하고 책임지려 했다는 것! 진정한 가족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     

요즘 아빠 컨디션이 안 좋아서 미안해. 엄마가 좋지 않은데 아빠까지 별로니 너도 힘들겠지? 우리 함께 잘 견뎌보자. 코로나건 우울증이건 그 밖의 어떤 나쁜 것도 생겨나는 걸 막을 수는 없어. 잘 관리하고 이겨내는 거지. 어제저녁 봐. 네가 차려준 냉라면을 먹으니 엄마가 살아나잖아. 신이 나서 재잘재잘 얘기도 잘하잖아. 아빠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네가 엄마 잘 챙겨줘. 아빠도 얼른 정상으로 돌아오도록 노력할게. 코로나도 사라지고 우울증도 사라지고 세상 근심 걱정 다 사라질 때까지 우리 모두 파이팅!!

   --- 딸의 첫 요리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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