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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ul 15. 2020

누가 그 남자를 무너지게 했는가?

 

박원순 서울시장이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갑자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모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이내 추정 이유가 드러났다. 4년쯤 전부터 여비서를 지속적으로 성희롱과 성추행했고, 자살 전 날 고소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제 장례도 끝났고 애도의 시간도 지나갔다. 진실 규명을 위해 조사단을 꾸린다고 한다. 그 뉴스를 보는 나는 우울하다. 그날, 처음 박원순 실종 뉴스가 속보로 나오던 때도 우울했다. 내겐 우울증이 있고, 요사이 다시 작동 중이다. 뭐, 굳이 원인을 찾자면 이것저것 생각난다. 코로나도 있고, 그로 인한 여편의 상태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세 기간이 끝나가는 것도 이유가 된다. 혹시 세를 올려달라거나 나가라는 연락이 올까 두려워하며 하루 두 번 메일을 검색한다. 어느 순간 그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확 기분이 나빠졌다.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나의 우울증은 죽음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다. 마치 식사를 마친 후 받는 계산서처럼 항상 내 앞에 내밀어져 있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살기 싫다’ 혹은 ‘살고 싶지 않다’는 쪽에 가깝다. 삶의 계산서가 나와 있는 것이다. 죽음을 껴안고 살아가는 생활은 상처 받기 쉽다. 영어단어에 ‘vulnerable'이라는 말이 있는데, 딱 그 상태다.   

  

그런데 자꾸 박원순의 죽음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화가 살금살금 솟아오른다. 사실 이 글은 쓰지 않으려고 했다. 자칫 박원순을 두둔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고, 성희롱의 잘못을 무효화하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또 피해자를 응원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상황도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했는데도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화도 계속되었다. 우울증은 계산이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보통은 화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화가 난다는 것은 뭔가 계산이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잘못 계산된 대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박원순이 잘못한 것 말고, 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따져보기로 했다.     


사람은 어차피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결함이 있고 잘못을 하고 실패를 하고 실수도 한다. 그러면서 살아간다. 그게 인생이고 세상살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결함과 잘못과 실패와 실수를 용인하지 않으려 한다. 비난받아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사소한 싸움도 법적 해결로 가려고 한다. 상호 간에 소통하고 조정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실종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 근력이 아주 약해져 버렸다. 사소한 비난에도 견디지 못하고, 작은 실수에도 좌절한다.     


사과도 사라져 버렸다. 전 같으면 ‘미안해’ 한 마디면 해결될 일들이 정말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승패를 가리려고 한다.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던 동네 언니 오빠 형 누나도 없다. 고민이 있어도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잘못을 해도 내가 혼자 책임져야 한다. 공동체가 무너진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각각의 정신건강을 돌봐줄 사회적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는다. 몸은 조금만 아파도 건강보험이 되는데, 정신은 상처 받고 무너져 붕괴 직전이 되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 혼자다.  자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화나는 이유가 모습을 드러낸다. 내 분노의 근원은 사회 시스템의 부재에 있다. 가정에서부터 직장, 지역, 나라 전체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작동해야 할 사회적 장치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 서울시장이라는 최상위직에 있는 사람에게도 전혀 작동하지 않는 안전망 체계가 나 같은 지역 말단 무명인사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그러고 보면 너무 당연해서 화낼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알아서 책임진다고 해도, 서울시장 같은 중요한 인사를 그렇게 두면 안되지 않나? 최소한의 사회적 장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 같은 우울증 환자는 항상 폭탄의 스위치를 곁에 두고 사는 것과 같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스위치 하나를 누르느냐 마느냐의 아주 간단한 일로 갈라진다. 그러나 서울시장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죽음은 그리 간단치 않다. 아마 백개 정도의 단추가 단계적으로 눌러져야 발사되는 폭탄과 같다. 다시 말하면 백개의 발사과정 중에 하나만이라도 정상 작동을 했더라면 박원순의 자살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나는 그게 화가 난다.  

  

박원순 시장은 일을 열심히 잘 해왔다고 알려진 만큼 정신적 스트레스도 당연히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정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부적절하고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위로와 위안과 사랑을 구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과 소통을 이루었으면 어땠을까? 한 사람이라도 서로 마음을 열어서 왜곡된 마음을 쉴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잘못된 선택으로 성추행을 시작했을 때 단호한 거부와 냉정한 비판으로 정신을 차리게 했다면 어땠을까? 계속되는 성추행을 시 당국에 고발했을 때 시에서 정확한 시스템을 작동시켜 문제를 해결했다면 어땠을까? 심지어 고소가 이루어진 날 당일에도 전혀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지 않고 취약한 상태의 박 시장을 방치했는데, 그중 어느 하나라도 바르게 처리되었다면 어땠을까? 백개의 과정 중에 하나라도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박원순 시장은 죽지 않아도 되었다.      


박원순 시장은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서서히 무너져 간 것이다. 나는 그게 화가 난다. 죽고 싶다고 그냥 죽을 수 있었다면 나는 벌써 수백 번은 죽었을 것이다. 개인적 시스템이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사회적 시스템이라도 작동해야 정상적인 사회다. 민주당이 아무리 거대 정당이면 뭐하나? 자기 당의 주요 자원 하나도 제대로 관리 못하는데. 무능한 부실 정당. 죽어있는 조직 서울시...     


나는 내가 알아서 지킬 테니, 80까지 열심히 살아서 천수를 누릴 테니 부디 여러분도 천수를 누리시기를. 물론 사람은 누구나 죽고, 나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잘못된 선택입니다. 맹렬히 달리다가 탈선하는 기차처럼, 그리하여 수많은 승객들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힙니다. 우리 모두, 같이 삽시다! 더불어 함께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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