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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ug 28. 2020

애들은 가라. 어른도 40이상만 남고


(로그 인)

5일장 비슷하게 물건을 팔러 나오는데,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

이제 장사 시작한 지 딱 2년 되나? 처음에는 안 팔리니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해. 긍정 반 포기 반 그런 거지. 내 물건이 안 좋으니까 안 사는 거 아니겠어? 말하자면, 쓸모도 없고 재미도 없고 뭐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고 남의 물건 갖다가 팔 수는 없잖아? 내 물건 아닌걸 내 것처럼 파는 것도 민망하고. 그렇게 할 재주도 없고...     


어이 거기, 애들은 가라. 그쪽 젊은 청년들도 가서 볼일 봐. 내 물건은 적어도 40은 넘어야 겨우 소화가 돼. 아직 40 안된 사람은 그만 가 봐. 내 물건 안 산다고 서운해하지 않을 테니. 젊은 사람은 그저 자기 자신 믿고 열심히 살면 돼. 자기 욕망과 감정과 생각에 충실해서 신나게 놀고 일해. 나 같은 길거리 장사꾼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세상에 재밌는 거 많잖아?  

   

하지만 40쯤 되면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기 시작해야 돼. 옛날에 공자라는 친구가 40 나이를 

‘불혹’이라고 했다지? 혹하지 않는다... 잘난 놈들은 미혹되지 않는다 뭐 그러겠지만 됐다 그래. 재밌는 게 없어진다는 말이야. 세상을 다른 차원에서 볼 때가 됐다 이거지.     


게임도 똑같은 거 40년 해봐. 그런데도 여전히 정신없이 재밌고 열광하고 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냐? 게임 속 주인공이 돼서 열심히 살다가, 4 50 되면 슬슬 궁금해져야 돼.     


‘내가 왜 이걸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지?’

'이 게임의 로직은 뭐지?'

‘나는 게임의 주인일까 하수인일까?’    


다시 말할게. 애들은 가라. 가서 하던 게임 열심히 해. 이건 어른들한테 필요한 거야. 어른들한테 왜 필요하냐고? 인생을 끝낼 때가 됐잖아. 엔딩이 멀지 않았으니 내가 만족할만한 결말을 얻어야 할 거 아냐. 그저 게임 개발자가 꾸며놓은 대로 그 손바닥에서 놀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않냐고.     


우리는 게임에 몰입이 돼서 게임 캐릭터를 나라고 생각하지. 진짜 나처럼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으면 원통해하고 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일종의 윤회지.     

인생도 똑같아. 우리는 ‘나’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에! 노 웨이! 거짓말이야. 나는 이 ‘나’라는 개념을 만들어 유통한 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기극이자 부도수표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야. 우리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세뇌된 상태에서, 마치 게임 속에서 주인공이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너 자신을 알라’느니 ‘너를 비우라’느니 ‘너에게 충실하라’느니 ‘너를 포기하라’느니 ‘너는 없다’느니 오만가지 술수를 써가며 약을 팔아대고 있지.     


우리 냉정하게 한 번 얘기해 보자고. 정말 ‘나’라는 게 있나? 과학자들은 이미 결론을 냈잖아. ‘자아’라는 개념은 신경작용에 불과하다고. ‘아프다’는 감각도 순간적인 세포작용의 결과일 뿐이고, 흔히 말하는 양자역학을 빌면 ‘물질’이라는 것도 사실은 없는 것이지. ‘있다’라고 확정하는 순간 ‘없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 우리 세상은 물질계인데, 물질의 최소 단위가 궁극으로는 ‘(확정할 수) 없고’, 최대로 확장했을 때 우주는 여전히 팽창 중이어서 역시 ‘(확정할 수) 없어’.

     

내일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 정말 있다면 가져와 보라. 지금 내게 보여주면 믿겠다. 그러나 내일은 영원히 내일일 뿐이야. 오지 않아. 말장난이고 헛것이야. 어제는 분명히 있었다고? 역시 가져와 보라. 지금 여기 있지 않다면 없는 거야. 있었다는 생각에 속는 것뿐이지. 착각이야, 게임할 때 캐릭터를 나라고 믿는 것처럼.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지만, 사실은 지금 이 순간도 없는 거야. 역시 환상이지. 그러나 일단은 있다고 믿자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라지니까. 그때까지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돼.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야. 나와 세상 역시 하나지. 그것만이 진실이야.     


비유를 하자면 ‘나’라는 인식은 파도와 같아. 파도라는 게 뭐지? 바다의 일렁임이야. 파도라는 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다의 일렁임이라는 현상일 뿐인 거지.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존재도 그와 같아. 잠시 일렁이는 파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걸 나라고 믿고, 좀 더 멋진 모양이 되려고 애쓰고, 큰 파도가 되려고 발버둥 치면 뭐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마는데. 바닷속으로 잠기면 끝인데.  

   

그럼 파도는 왜 생길까? 내가 파도라면, 나는 왜 생겼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쓴 시가 있어.    


         내가 이렇게 열심히 부서져 가는 것은

         다정한 모래사장이 부러워서가 아니어요

         박력 있는 바위해변이 좋아서도 아니어요     


         내가 이렇게 한껏 몸을 일으켜

         당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은

         결코 당신이 싫어져서가 아니어요     


         당신은 바다 나는 파도

         내가 이렇게 한껏 모양을 뽐내며 나를 주장하는 것은

         빨리 당신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치명적으로 부서져 당신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서     


         나는 파도 당신은 바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천하태평의 시 <파도의 변명> 전문)     


이 시에서는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 나는 유신론자고 하나님을 믿으니까, 여기서 바다란 당연히 하나님을 의미해. 나는 신을 깨닫고 신께 귀의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거지. 열심히 나를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과정이란 얘기야.     


각설하고. 일반적인 말을 하자면 ‘즐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덧없이 바다로 스러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파도가 그렇게 힘껏 몸을 부풀어 올리는 것은, 최대한 멋지게 자신을 표현해보고 싶은 거지. 주어진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놀아보려는 거지. 바다는, 하나님은, 신은 그러한 파도의 춤사위를 기꺼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어. 바다 안에서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하나야. 여러분도 모두 한껏 즐겁게 자신을 뽐내길 바랄게

     

이제 날이 저물고 좌판을 접어야 할 시간이 됐군. 팔리지 않아도 이젠 상관없어. 날 먹여 살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는 그저 내 물건을 봐주는 몇 사람을 위해서 (자주는 아니어도) 팔러 나오는 거야. 사지는 않아도 내 장사를 구경은 하니까. 그것만 해도 어디야? 감사하지.(로그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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