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하태평 Oct 25. 2021

딸에게쓰는편지62;무릎꿇고사느니보다 서서죽기를 원한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하다가 K씨 얘기가 나왔지. K씨는 엄마가 좋아하는, 요즘 인기 절정의 남자 탤런트. 전 여친 A씨가 K씨에 관한 험담을 인터넷에 올려서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중이야.    

 

요약하면 이래. A씨가 K씨와 사귀는 중에 임신을 했는데 K씨가 낙태를 종용했고, 결혼을 약속한 K씨의 말을 믿고 A씨는 낙태를 했지. 그러나 K씨는 A씨와 헤어져 다른 여자를 사귀게 되었어. 화를 참다못한 A씨는 이 사실을 인터넷에 공개해 버렸고...   

  

흔한 얘기지. K씨가 유명 연예인이 아니라면 화제가 되지도 않았을 거야. 엄마도 드라마에서 보여준 K씨의 이미지 때문에 좋아한 걸 테니까. 그래서 엄마는 A씨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얘기를 시작했고, 아빠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어.     


이 대목이 우리의 경우 조금 특이하다고 봐야지. 대부분의 경우 엄마와 아빠는 의견 차이가 없어. 사고방식이나 가치체계가 비슷하기도 하지만, 의견이 다른 경우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 때문이기도 해. 나이가 들면서 더 그렇지.     


단순한 개인사인데 지나친 폭로라고 A씨를 비난하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K씨가 나빴다고 말했어. 정확히 말하면, 둘 다 잘못인데 K씨가 동정 받는 여론의 흐름에 저항감을 느꼈다고 할까? 사람들은 K씨가 잘못한 정도보다 춸씬 강력한 비난과 대미지를 받고 있으며, 이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K씨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엄마도 그 생각에 동조가 된 거고.   

  

아빠는 일반적 심리와 반대 과정을 겪었어. 처음 기사를 접했을 때 든 생각은 ‘못된 여자군. 이런 개인적인 과거지사를 공개해서 상대를 망신주다니!’ 하는 거였어. K씨가 낙태를 종용했다고 해도 결정은 본인이 한건데 마치 전적으로 K씨 책임인 것처럼 말하는 거로 보였으니까.     

대세 배우이다 보니 후폭풍이 거셌어. 출연하는 예능프로, CF, 드라마 등이 타격을 입었지. 물론 가장 큰 타격은 K씨 본인이 입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여론이 급변하기 시작했어. K씨에게 동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거지.


아빠처럼 천성적으로 삐딱한 사람들은 이런 걸 못 참지. K씨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다만 K씨는 많은 걸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많이 잃는 거고, 얼핏 불공평해 보이지만 그건 착시현상일 뿐이야. K씨건 A씨건 잃는 건 마찬가지지. (어쩌면 A씨 자신은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후 자신에게 닥친 비난과 추궁의 쓰나미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손해 볼 게 없어’라고 생각할까?)     


말하자면 A씨는 자폭을 한 거야.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한 거지. 나는 불행한데 상대는 잘 살고 잘 나가고 있으니 ‘너 죽고 나 죽자’고 폭탄을 터뜨려 버렸어. 대부분의 자살폭탄 테러가 비난받는 것처럼, A씨도 비난을 받고 있어. 그 이유가 어떻든 상관없이, 테러의 결과가 너무 끔찍하다는 거지. 이런 상황 속에서 아빠처럼 삐딱한 성향은, ‘그래도 자살폭탄 테러를 하는 그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라고 반대 목소리를 내게 돼. 본능적으로.     

K씨는 결혼을 미끼로 속였고, A씨는 속아 넘어갔어. K씨가 이겼고, A씨가 진 거지. 그러나 속아 넘어간 A씨는 승부의 결과에 불복하고 폭탄을 터뜨려 버려. K씨는 비열했고, A씨는 비겁해.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     

사건의 시작은 임신이었어.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실수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임신은 실수야. 의도한 게 아니었으니까.(어쩌면 A씨가 의도한 걸 수도 있지만 그건 별도로 하자고.) 원치 않는 임신이 있었고, K씨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      


문제는 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거야.

정황으로 보면 A씨는 아기를 낳고 싶어 하고 K씨는 거부한 것 같아.      

여기서의 선택. A씨가 정말로 아기를 낳고 싶어 했으면 K씨가 반대하더라도 낳았어야지. K씨의 꾐에 넘어가서 낙태를 하고 배신을 당했으니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꼴이 되어 버렸잖아. 그리고 A씨의 자폭 테러...     



“난 아이를 낳을 거야. 낙태하라고 하지 마. 아이를 볼모로 결혼하자고 협박하지도 않을 거야.

내 애고, 내가 키울 거니까. 

네가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네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말하지 않을게.

당연히 양육비를 내라는 둥 아이와 너를 연결시키는 일도 없을 거고.

네가 아이를 원치 않고 나와 결혼할 생각도 없으니, 이후 나와 아이에 관한 모든 일은 너와 상관없어. 나를 잊듯이, 오늘 이후 너는 아이에 관해 다 잊어버리면 돼. “     



“나는 당분간 일에 집중할 거야. 결혼은 한참 후에나 생각할 문제고.

아이는 우리 둘이 함께 책임을 져야 마땅하지만, 나는 아이 낳는 걸 반대해.

네가 굳이 낳겠다고 하면 내가 막을 수는 없지. 최종 결정권은 너한테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이에 관한 일체의 권리와 책임을 포기하겠어.

앞으로 아이에 관한 모든 건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

나한테 양육비를 내라느니 그런 말 하지 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아이 때문에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안 해.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꿈 깨!

그리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키우다가 경제적으로 힘들면 연락 줘.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생물학적 아빠도 아빠는 아빠니까. “          



사랑하는 딸!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누구 입장을 두둔해?

가만해 생각하면 재밌는 게, 엄마는 여자인 A를 아빠는 남자인 K를 비난하고 있어. 일반적 양상과 반대로 된 거지.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인 것 같아. 엄마는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나라면 저러지 않아’라는 입장에서 A씨를 보고, 아빠는 ‘나는 저러지 않을 거야’라면서 같은 남자로서 K씨를 비판적으로 보는 거지. 감정이입이 되었다고 할까?   

  

논란의 핵심은 ‘사소한 개인사로 너무 피해가 심하다.’는 건데, 그건 세상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 같아. 점점 강자와 약자가 동등한 정보 기회를 갖게 되고, 둘의 격차가 클수록 폭발력도 커지는 거지. 

점점 힘 있는 이들이 몸조심을 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가. 세상 변한지 모르고 옛날처럼 갑질하다가 망신당하는 사람 가끔 나오잖아?     


엄마 아빠의 견해 차이도 정리를 해 보자.

엄마는 여자로서의 주체성, 행위자로서의 책임감을 중시해서 A씨를 비판하는 것 같아. 판단하고 선택했으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지.

아빠는 무책임보다는 비겁을 더 싫어하는 거고. 옛날 노래 중에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가사가 있는데, 딱 그 스타일!     


식탁에서 네 대답을 못 들었는데, 이제 말해봐.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항상 딸의 생각이 궁금한 아빠가. 

매거진의 이전글 가장 운전을 잘하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