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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Feb 07. 2022

딸에게 쓰는 편지 66; 나쁜 짓을 할 권리를 허하라!

“너의 정체는 뭐야?”     


설을 맞이해서 모처럼 가족들이 모여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나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 나왔지. 때가 때니만큼(역대 가장 비호감이라는 대통령 선거!) 대선 얘기를 하는 중이었지. 가족 간에 정치 얘기는 절대 금지라고 하고, 그동안 한 번도 길게 정치를 주제 삼아 대화가 진행된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     


어쨌든!

아빠의 삐딱한 정치적 견해가 다소 못마땅했던 게 분명해. 고모인지 작은 엄마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갑자기 아빠에게 커밍아웃을 강요하는 공격적 질문을 했어.     


“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지.”     


갑작스런 질문이고 한 번도 구체적인 생각을 안 해본 문제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생각나는 대로 한 대답이 이거였어.     


진보적 자유주의자라...

아는 게 많지 않으니 실제 이런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평소 아빠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끌어다가 즉흥적으로 붙여놓은 게 아닌가 싶어. 진보와 자유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두 바퀴라고 믿고 있으니까.

물론 무게 중심은 ‘자유주의자’에 더 있는 거고.     


그 상황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고모와 작은 엄마는 아빠의 양비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아. 이재명 쪽 캠프와 윤석열 쪽 캠프를 싸잡아 비난했으니 ‘그럼 넌 어느 쪽이야?’라고 물을 만도 했던 거지. 사춘기 소년처럼 ‘다 싫어!’라고 말하는 게 어이없었나봐.     


‘나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싫었을까?’     

그래서 아빠도 생각해봤어. 그냥 ‘다 싫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들이 그렇게 싫었던 걸까? 우리 사회의 거대한 두 세력, 우리나라의 두 주류가 왜 못마땅했을까?   

  

“내로남불!”     


이쪽저쪽 할 것 없이 똑같아. 줏대나 소신 없이 당장의 이익을 따라 움직이면서 호시탐탐 여론을 훔쳐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뭐 하루 이틀 있었던 일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화난다고 하면 내가 한심하니 넘어가도록 하자.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

로맨스와 불륜은 같은 거란 말이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뿐인 거고. 국어사전의 뜻을 보자.     


로맨스(romance);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 또는 연애 사건.

불륜(不倫);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음.     


똑같이 사랑을 했으나, 나는 맞고 너희는 도리에서 벗어났다 그런 말이군!    

 

그러고 보니 내 화의 실마리가 보인다. 최근에 내가 화났던 것 중 하나는 야당 유력후보의 배우자 스캔들 문제였어. 그녀의 결혼 전 사생활이 낱낱이 폭로되면서(사실의 진위 여부는 별개로 하고!) ‘이런 여자가 대통령 부인이 되면 안된다!’는 여론 선동이 시작됐어.     


내로남불! 내 사랑은 정당하고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사랑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났다는 거지. 그 말에 아빠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어.     


“그게 사랑이라면, 그 따위 사랑 쓰레기통에나 던져버려라!”     


백보 천보 만보 양보해서, 그 말이 맞는다고 치자. 내 사랑이, 내 행동이 도리에서 벗어나면 안 되나? 공적인 자리에 나서는 사람이니 공인으로 적절한가를 판가름할 필요는 있겠으나, 그게 완전한 사적 영역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령 관계가 된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사생활은 보호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지금 동물농장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하는 딸!

아빠는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운전할 일이 별로 없지. 그러다가 제주도에 여행가서 운전하면서 겪은 일이야.     

“어린이 보호구역 시속 30km 이하 준수!”     


지나갈 때마다 입에서 투덜거림이 저절로 나와. 학교 앞 이면도로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수많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큰 도로를 30km로 가라고? 등하교 시간만 그런 게 아니라 하루종일, 일년 365일을? 이번에 제주도 가서 아빠는 어린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한밤중에서 그 속도를 지켜야 해. 그게 법이니까. 지키지 않으면 불륜이 되는 거지.     


“최소한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열심히 반성하고 생각해본다. 내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옷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이 점점 파편화되고 개인화되면서, 뭔가 공식적으로 정리해주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단 얘긴가? 그러나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한밤중에 텅 빈 대로를 30km로 달리다 보면 도저히 적응이 안된다.     


“왜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를 주지 않는 거야?”     


내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라고 정의했지만, 내가 진보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판단의 근거가 없으니까.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이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아빠는 체질상 ‘자유’와 ‘자율’이 없는 삶은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입버릇처럼 ‘나는 천성적으로 삐딱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나는 자유주의자다.’라는 뜻이었군!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自由);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이 정의를 받아서 말하자면, 자유주의자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여기서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은 물리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 도덕적인 규율도 포함되는 거겠지?     


“그럼 나쁜 짓을 해도 된다는 말이냐?”     


자! 드디어 오늘의 핵심질문이 나왔네? 과연 자유에는 ‘나쁜 직을 할 자유’도 포함되는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폴 엘뤼아르의 시 <커브> 전문  

   

아빠의 답은 ‘당연히!’야.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우리에게는 금지된 것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있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니 여기서 끝내자.

괜히 잔소리하는 심한 아빠는 되기 싫으니까.

그래도 더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되면 다시 편지를 쓸게.     


   --- 요즘 인턴 생활하는 딸이 대견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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