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탕하고 김밥은 내가 한 게 제일 맛있어!”
엄마가 점심으로 삼계탕을 먹으며 감탄하듯 말했지.
이게 조금 의외인 게, 대부분 경우 제일 맛있는 게 뭔지 물으면 정해진 답이 있거든.
“남이 해주는 건 다 맛있어.”
내 손으로 하는 음식은 노동의 결과물이라 맛이 안 난다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 음식에 그렇게 감탄하는 것은 그만큼 맛이 있다는 말이겠지?
인정!
“잘 먹고 잘 놀고. 그거만 잘하면 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자알 먹고, 자아알 놀고! 그러면 끝! 알았지? “
엄마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너에게 삶의 비법을 전수하기 시작했어. 잘 먹고 잘 노는 두 가지만 잘하면 세상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얘기지. 100% 동감이야.
얘기를 좀 더 진전시켜 보자.
잘 먹고 잘 논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어떻게 하는 게 잘 먹고 잘 노는 걸까?
두 개를 ‘잘’과 ‘먹고 논다’로 나눠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먹고 논다’에 대해서.
아빠는 여기서 ‘논다’에 더 주목을 하려고 해. 먹는 행위도 광의의 차원에서 노는 것에 포함된다는 말이지. 엄마가 삼계탕을 먹으면서 즐거워했던 것처럼, ‘먹고 노는’ 거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늙는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뜻이니 노는 것은 젊음의, 다시 말해서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라는 얘기지. 우리는 놀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야.
논다는 건 무슨 뜻일까?
보통 ‘논다’는 말을 ‘일한다’는 말의 반대에 두고서 나쁜 듯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세상을 조종하는 기득권 세력의 속임수야.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하는 개념이니까.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고, 놀기 위해서 일하는 거지. 전에도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우리의 직업이란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이어야 하는 이유도 그거야.
어릴수록 노는 시간이 많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노는 시간이 줄어들지. 의무감으로 생활을 하고, 순간순간은 생기를 잃고 채무자의 시간이 되어버려. 그걸 사회화라고 말하고, 사회인의 의무라는 말로 정당화시키지.
과연 그럴까? 우리는 정말 ‘지구를 지켜야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을까?
<스파이더 맨; 노웨이 홈>의 피터 파커처럼?
물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운명을 지고 태어나. 보통 ‘업’이라고 표현하지. 아빠가 <스파이더 맨; 노웨이 홈>을 보고 감상을 말했지?
“운명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세상살이라고 해도 좋고, 팔자라고 해도 좋아. 피터 파커처럼 엄청난 업은 아니어도,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감당해야할 업을 지고 살아가게 마련이야. 그리고 그 업은 대체로 우리가 ‘노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해.
얘기가 자꾸 원론적인 문제로 가려고 하니 간단하게 결론만 말하도록 하자.
업은 집착이야. ‘나’라는 허상을 진짜로 여기면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
이 집착에서 벗어나 ‘원래의 나’로 돌아가도록 하는 동력이 바로 ‘노는’ 거야. ‘놀이’의 즐거운 에너지는 집착을 완화시키고 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해.
무거운 것은 가라않고, 가벼운 것은 떠오르지.
감정이나 생각도 마찬가지야. 무거운 감정은 우리 마음속에 가라앉아서 우리가 원치 않는 작용을 일으키지만, 즐거운 마음은 가벼워서 이내 휘발해버려. 사라져 없어지지.
다시 말해서 즐거움은, 노는 것은 우리를 업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사랑하는 딸!
농담처럼 던진 엄마의 말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겠지? 엄마의 말이 워낙 본질에 닿아있어서 아빠가 사족을 보탰는데 도움이 됐나 몰라?
저번에 “생각하지 말라.”고 한 말도 그렇고,
이번에 “잘 먹고 살 놀자.”고 한 말도 그렇고,
엄마한테 갑자기 깨달음의 신이 들렸나본데...
젊은 너에게는 실감나지 않겠지만 그냥 마음에 새겨둬. 그러다보면 언젠가 그 말들이 네 마음을 울리는 시간이 올 거야.
네 마음에 종이 울리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
‘아! 어제 내가 운명의 고단한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고 있구나.
내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구나.‘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 계속 잘 먹고 잘 놀자!
---고단한 스파이더 맨의 삶을 보고 애처로워진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