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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pr 04. 2022

나는 3살 때부터 혼난 사람이다

여편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힘들어하는데, 코로나 이후 변화된 환경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아주 피곤하면 오자마자 쓰러지고, 조금 나으면 어떻게든 저녁은 해서 먹고 쓰러집니다. 보고 있으면 안쓰럽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겨내!”     


JTBC의 <뭉쳐야 찬다>를 즐겨보는데, 거기서 이동국이 만들어낸 명언입니다. (차마 그 말을 대놓고는 못하고 속으로만 하지요. 잘못하면 불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르니까요.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 살아남습니다.)  

   

저녁을 먹고 기운이 조금 나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로 수다를 떱니다. 여편 나름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이겨내는 방법일 겁니다. 

모든 대상이 도마 위에 오릅니다. 아이들부터 동료 선생님, 교장 교감까지. 새로운 소재가 나오기도 하고, 어제에 이어 같은 사람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3살 때부터 혼난 사람이다.”     


현재 2학년을 담임하고 있는데, 아마 교과 중에 어린 시절의 일을 얘기하는 수업이 있나 봅니다. 태어났을 때, 돌맞이 때, 두 살 때, 세 살 때 얘기를 하는 중입니다.     

갑자기,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던, 수업에 관심 없는 청소년 같은 자세로 앉아있던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얘기하더랍니다.     


여편은 당연히 놀랐지요. 그 아이로 말하자면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빵점을 맞는, 수업과 무관하고 반항기까지 있어서 방치된 아이였으니까요. 다른 아이들처럼 사진 같은 걸 미리 준비해오지도 않았으니, 즉흥적으로 떠오른 말을 내뱉은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야! 그렇구나! 너 정말 발표 잘한다.”    

 

여편은 약간 과장을 섞어 칭찬을 쏟아냈습니다. 예상 밖의 칭찬에, 3살 때부터 혼나기만 하고 살아온 아이는 당황스럽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니까요.     


“오! 대단하네. 자신을 규정하잖아. 정체성을 파악하고 있어.”     


내가 거들어봅니다. 여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각양각색의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아이들, 특히 저학년 아이들은 가정의 거울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가정의 모습이 보입니다. 온실에서 자라는 아이, 거칠게 방치된 아이, 폭력 속에 단련되는 아이... 무모의 감정과 사상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투사됩니다. 얘기를 듣다보면, 아이들 교육보다 어른 교육이 더 시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3살 때부터 혼난 아이...

어쩌면 그런 아이가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냥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말은 씨가 되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말의 뿌리는 생각이지요. ‘나는 혼나는 아이다’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어떤 꽃을 피우게 될까요?     

그 아이는 이미 반항적이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공부를 하지 않으니 받아쓰기 빵점입니다. 마음은 점점 증오심으로 가득찰 것이고, 커서 어른이 될수록 폭력적이 되어갈 게 뻔합니다.     


그 폭력의 방향은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나는 혼나는 아이’라는 자책감으로 자신을 해치는 쪽으로 가거나, ‘내가 혼난 만큼 세상을 혼내줄 거야’라는 적개심으로 구체적 범죄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요즘 흔히 발생하는 ‘스토킹 범죄’같은 것은 두 성향이 뒤섞인 경우라고 봐야겠지요.)   

  

이 아이는 어디로 갈까요? 사리분별이 잘되는 똑똑한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당한다고 느끼면 어떻게 할까요? “머리 좋은 놈들은 다 교도소에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똑똑한 아이는 불합리한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도 적개심 가득한 아이였습니다만 소심하고 음흉해서 꼭꼭 숨겼습니다. 다행이라면, 예술이라는 걸 만나게 돼서 부정적인 마음이 많이 정화되었지요. 


“네 시나리오에 꼭 나오는 게 두 가지 있어.”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 모니터링을 위해 보여주는 친구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나의 특징을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는 욕이 많이 나온다는 거고, 또 하나는 꼭 주인공이 죽는다는 거야.”     


처음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실제 생활 속의 나는 욕을 못합니다. 한 마디도, 그 흔한 ‘x새끼’라는 욕도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엄청 심한 욕을 하고 있었던 거지요. 예술을 핑계로 내 속마음을 풀어놓았던 겁니다. 영화가 나를 살렸습니다.   

  

 운이 좋았던 거지요. 심리적으로 억압되어 있었으나 무난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폭발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비틀렸으나 부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술을 핑계로 나의 억압을 풀어내었고, 비틀린 가지를 스스로 걷어냈습니다.   

  

그래서 이젠 욕을 하느냐구요? 아뇨, 하지 않습니다. 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이젠 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콜라병처럼 뚜껑만 열면 욕이 쏟아져 나왔지만, 지금 나의 속에는 쌓인 울분이 없습니다. 그저 소소한 불평불만이 그때그때 솟아나지만, 쌓이고 뭉치지는 않습니다. 욕과 살인으로 표상되는 세상에 대한 적개심과 존재적 혐오는 그림자만 흐릿하게 남아있습니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서있는 반대편에 그 아이가 있습니다. 인생의 출발점 근처에서, ‘나는 3살 때부터 혼난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을 동력으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합니다. 운이 없다면 일찌감치 험악한 환경에 내몰려 증오를 밥벌이 삼아 살아갈 테고, 어쩌면 성인이 될 때까지 유예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에 억눌린 분노와 좌절, 열패감 등은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고 맙니다. 자식에게 대물림될 수도 있구요.    

 

얘기가 또 우울 모드로 들어가려고 하네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 아이가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사춘기 이전의 마음은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멘토나 부모나 선생님의 역할이 크다고 보는데, 요즘 그런 얘기 하면 꼰대라고 손가락질 받습니다.   

  

각자가 옳고, 각자 주관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한참 전에 모텔 직원이 손님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이 인상적인 말을 해서 그것에 대해 글도 썼습니다. 잠깐 인용해 볼게요.     



(전략)

“다음 생애에 또 그러면 너 나한테 또 죽는다.”     


그 사람은 피해자를 죽이고 사체를 절단해서 버린 흉악범이라고 해. 그런 사람이 반성은커녕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거지. 언론은 그 사람의 흉악함에 더 호들갑을 떨고.     


이해를 돕기 위해 짧게 사건을 정리해 볼게. 그 사람은 모텔 종업원이었어. 죽은 피해자는 모텔의 손님이었는데, 돈 문제로 시비가 있었나 봐. 죽인 이유는 상대가 반말하고 무시했기 때문이래. 숙박비 4만 원 때문에 티격태격했고, 기분이 나빠진 살인 용의자가 피살자가 잠든 사이 방에 들어가 죽인 거지. 당사자는 “흉악범이 양아치를 죽인 사건”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렸다고 해.     


어떻게 보면 요즘 흔히 보는 사건이지. 사체를 토막 내서 유기하는 행위도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고. 그런데 ‘또 그러면 또 죽는다’는 말이 아빠의 마음을 건드렸어. 이건 확신범의 말투야. 옛날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제기했던 질문, ‘죽어야 할 사람을 내가 죽인다’는 심판관의 태도.     


나는 여기서 어떤 변화의 흐름을 느껴. 거대 담론, 도덕의 틀이 무너지고 각 개인의 주체적 판단이 행위의 기준이 되고 있어.(어쩌면 게임 같은 것이 보편적 일상이 된 때문인지도 몰라. 게임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지. 내가 이겨내지 못하면 탈락 되고 마는 거니까, 나는 무슨 수를 쓰던지 살아남아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 게임을 완수해야 해. 옛날에는 내가 세상의 작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세상이 나의 부분이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니까.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 판단에 의지해야만 하는 거지.)    

 

객관적 옮고 그름보다 주관적 판단이 중요해졌어. 흔히 말하는 ‘삼강오륜’? 그런 거 없어. ‘나’가 중요하고, ‘나’의 세계가 가치판단의 전부야. 앞의 살인 용의자가 ‘남들한테는 사소할지 몰라도 당사자한테는 사람을 죽일 만큼 큰 원한일 수 있다’는 뜻의 말을 한 것은 바로 그 맥락이지.     


얼마 전 이혼한 남편을 죽인 고 아무개 씨가 화제가 되었는데, 그것도 유사한 사례야. 역시 주관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지. 일부 매스컴에서 그 사람이 평소 웃고 즐기는 화면을 보여주면서 마치 크게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나는 그런 매스컴의 태도가 오히려 문제라고 봐.  

   

그런 보도태도는, 엽기적 범죄와 평범한 일상을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오히려 인간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불신을 야기할 뿐이야. 쓸데없이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저 사람이 어쩌면 살인마일 수도 있다’는 불결한 상상력을 유발할 수도 있어. 그것이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징후임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 되어야 해.

    --- <딸에게 쓰는 편지43; 다음 생애에 또 그러면 너 또 죽는다> 중에서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해 100% 확신하는 태도, 또 태어나 똑같은 상황을 만나도 똑같이 할 거라는 그 자기 확신... 소름끼치게 무섭지만, 그게 추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주체적 인식이 그 바탕에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주관적 태도에 객관이 전혀 개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전적으로 내 몫입니다. 옆에서 거들라치면 “꼰대짓 말라”며 조롱합니다. 객관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3살 때부터 혼나는 아이’는 커갈 테고, 자라서는 ‘혼내는 사람’으로 변할 겁니다.      


자!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말 그대로 화창한 봄날입니다. 요즘은 꽃들이 순서도 없이 핍니다. 산수유, 목련, 매화, 개나리, 진달래... 다 한꺼번에 피어납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꽃들이 ‘너는 목련이니까 좀 있다가 나와’, ‘야, 진달래야! 너 벌써 피면 안 되지!’ 이러지 않을 겁니다. 그냥 적당히 조건이 맞으면 스스로, 저절로 나오는 거지요.     


우리네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내면적 충동에 의해 피어나는 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혼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바깥 상황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나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동력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각자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한껏 계절을 빛내는 이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꽃을 마음껏 피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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