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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un 16. 2022

딸에게쓰는편지77;Full과 Enough사이의 세월

   

너도 알다시피, 아빠가 최근에 영여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했어. 연말까지를 기한으로 해볼 건데, 기초회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는 게 목표야.     

사실 영여회화를 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는데 구체적 필요성을 못 느껴서 작심삼일 식으로 끝나곤 했지. 부디 이번에는 성공하기를~!      


“I'm full."

"I'm enough."     


기초회화를 몇 번 듣다보니 갑자기 위 대사가 생각이 났어. 영화 같은 데서 가끔 나오던 대사라서 그런가? <해리포터>에서 본 “I'm all set."과 함께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생활영어 대사지.     


I'm full. 배부르다는 말이지.

I'm enough. 역시 배부르다, 잘 먹었다는 정도로 쓰이는 것 같고.     


실제적인 뉘앙스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두 표현의 사이에 엄청난 세월의 간극이 있음을 느껴. 'full'이라는 말과 ‘enough'라는 말 사이에서 보이는 수많은 나이테의 무늬...     


“와! 배가 터질 것 같아.”     


'I'm full.'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기분이야. 욕심껏 먹고 먹어서, 더 이상은 들어갈 곳도 없다고 생각될 때 나오는 말. 옛날에 뷔페 열심히 다닐 때 생각나니? 그때 네다섯 접시는 보통으로 먹었잖아. 그렇게 먹고 또 디저트 먹고...    

 

‘full'은 욕망의 단어야. 질주하는 욕망의 느낌이 있다고. 솟아오르는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침없이 음식을 흡입하고, 술에 취해 이성이 흐려지는 기분을 느끼려고 술잔이 무수한 상하운동을 하지. 그렇게 먹고 마시고, 더 이상 욕망을 지속할 힘이 남아있지 않을 때, 그때 나오는 말이 바로 “I'm full!"인 거지.     


그렇다고 해서 그 욕망이 사라졌느냐? 아니야. 육체는 가득 차서 멈췄지만, 마음은 여전히 욕망의 질주를 계속하려고 해. 토하고 또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지.     


“너를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대중가요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이런 대사도 그런 사랑의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어. 괜한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고.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시간을 함께 하고 있어. 객관적인 모습으로는 완성이 되어 있지. ‘I'm full.'의 상태. 그러나 마음에서는 여전히 격정의 사랑이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에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     


다시 말해서, ‘I'm full.'은 젊은이의 언어표현인 거지. ’왕성한 욕망이 여전히 들끓지만, 육체적 객관적 상황이 제한되어 있으니 잠시 멈추겠습니다.‘ 하는 말.   

  

“적당히 잘 먹었어.”

“오늘은 여기까지.”     


반면 'I'm enough.'는 ‘배가 꽉 찼다’는 물리적인 표현이 아니야.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만족하게 먹었다는 뜻이 강하지. 

‘더 먹을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라고, ‘배는 꽉 차지 않았지만 마음은 꽉 찼네요. 만족합니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아까 ‘full'이 욕망의 단어라고 했지? 반면 ’enough'는 정신적인 단어야. 객관적, 외부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주관적 정신적인 판단기준으로 행동을 계속할지 말지를 결정해.     

여전히 더 먹고 싶고, 술에 만취해 완전한 ‘마음의 해방 상태’를 맛보고 싶은 유혹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밤새 격정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     


그러나...

그러한 육체적 갈망과 끓어오르는 열정과 불타는 욕망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하지는 않아. 개가 주인의 말을 들어야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는 것처럼, 욕망과 몸과 정열의 마음은 내 정신의 결정을 따라야 해. 성숙한 주인이 뛰노는 개에게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주인인 나는 “enough!"라고 말하는 거야.  

   

그런 면에서, ‘I'm enough.'는 늙은이의 언어라고 할 수 있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이 “숲은 깊고 어둡고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할 약속이 있다.”고 말하는 거지.     


사랑하는 딸!

너는 젊고 아빠는 늙었어. 너는 너의 언어로 말하고, 나는 나의 언어로 세상을 살아가야해.

세상에 네 것, 내 것이 따로 있기야 하겠냐마는, 흐르는 강의 뒷물이 앞물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시간에 해야 하는(혹은 하면 좋은)것들이 있기 마련이지.    

 

아빠가 “와! 배불러. 배가 터질 것 같아.”라고 말한다고 흉은 아니잖아? 주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웃고 넘어갈 수 있지.

하지만 네가 “됐어요. 잘 먹었네요.”라고 말하는 건 좀 이상해. 징그럽다고 해야 하나?     

뒷물이 앞물인 척 하면 황당한 상황이 되는 거야. 앞물이 뒷물처럼 발랄한 척하면 조크지만, 뒷물이 앞물 흉내를 내면 ‘갑분싸’인 거지.     


“I'm full!"     


아빠는 이 욕망의 언어가 좋아.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솔직하고 단순하고 활기차. 젊음의 특징이지. 나는 네가 한껏 이 젊음의 언어를 누렸으면 해.     

네 욕망에 대해서, 네 감정에 대해서, 네 생각에 대해서, 그 용량의 끝까지 한껏 밀어붙이며 살기를 바래.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솔직하고 단순하고 활기차게.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은 어쩌면 욕망의 질주를 끝내고 희미한 잔불만 남은 상황일지도 몰라.

깊고 아름다운 숲을 뒤로 하고 약속을 위해 떠나는 것은 정열의 화산이 활동을 멈춰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젊다는 것은 꼭, 반드시, 죽어도, 절대로 해야만 하는 너의 것이 있다는 거야. 그 너만의 것을 위해서 싸우기도 하고 무례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칙도 할 수 있어야 해. 넘치게 담아보지 않으면 네 욕망의 그릇에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 젊음의 질주 속에서 때로는 아프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또 때로는 부서져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런들 어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바람의 시달림을 견디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 나무들이 당당한 자존심을 꼿꼿이 세울 수 있었으랴?   

            --- <딸에게 쓰는 편지 51; 나이가 든다는 것은...> 중에서           

     

아빠는 네가 네 욕망의 끝까지 질주했으면 좋겠어. “I'm full enough!" 라고 헐떡이며 말할 만큼 먹었으면 좋겠어. 누군가는 말하지.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아?”     


똥인지는 안 먹어봐도 알 수 있지만, 된장은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지. 적어도 한 번은 먹어봐야 알아. 그냥 지식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르거든.


부디 너의 젊은 시간을 몸으로 경험하는 복된 시간으로 채우기를~!

                              --- 딸이 언젠가 'enough'의 즐거움을 알기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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