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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un 27. 2022

딸에게 쓰는 편지 78; 몇살까지 살 것인가?


사랑하는 딸, 너는 몇 살까지 살 생각이니?

몇 살까지 살고 싶어?     


아빠가 딸에게 하는 질문으로 너무 이상한가?     


“30살까지만 살 거야!”

“40 넘어 사는 건 추태야. 절대 그럴 일 없어!”     


너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나이니,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고. 또 많은 사람들은.     


“백 살까지는 살아야지. 그 이상은 덤이고.”

“만수무강. 무조건 오래.”     


이렇게 말하기도 할 거야.

지금의 너는 어느 쪽이니? 오래 살고 싶니? 아님 절정일 때 끝나는 게 좋니?     


“나는 80까지 살겠다.”     


아빠의 대답은 이거야.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 오래된 생각이야. 80이란 숫자가 좋았는지, 아빠는 80까지 산다는 생각을 바꿔본 적이 없어.

(엄마한테도 얘기한 적 있는데, 엄마는 이 얘길 싫어하더라고? 자기가 정년퇴직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땐데, 너무 빠르다는 거지. 나는 지나가는 애기처럼 가볍게 말했는데, 엄마가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대부분은 허황된 얘기로 받아들이거든. 목숨을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딱 80이라고 확정을 하니까 믿지 않지. 엄마가 무겁게 받아들여서 그 얘기는 조심하고 있어.)    

 

왜 하필 80인지는 모르겠어. 유추해보면 대충 이런 것 아닐까?


‘너무 늙은 나이까지 살고 싶지 않다.’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기 전에 생을 마감하겠다.’

‘80 넘어서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겠나? 무의미한 삶은 필요 없다.’     


너희들이 ‘3,40 넘은 인생이 의미가 있나?’ 라고 생각하는 것하고 비슷한 거지.     


포인트는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 일거야. 자살이 아니라면 죽음의 시간을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으니까. 아빠가 ‘80까지 살겠다.고 하면 코웃음 치던 친구들은 그 말을 ‘내일은 해가 뜨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 정도로 들었던 거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빠는 80까지 산다는 생각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 생각이 확고하면 흔들리지 않지.     

분명히 자살할 생각은 없는데, 그럼 어떻게 정확히 그 나이에 죽겠다는 걸까?


예지력? 꿈은 이루어진다? 이도저도 아니면 돈키호테식 주관적 망상?     

전혀 의심이 들지 않는 게 이상해서 나도 곰곰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 할머니에게 들은 할머니의 할아버지 이야기.

즉 나의 외증조 할아버지이자 너의 외고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굉장히 깐깐하고 엄한 학자였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자상한 할아버지였던 기억밖에 없어.


10살 전이었을 것 같은데, 외가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셔.

그래서 미처 잠이 덜 깬 채 “예!” 하고 대답했더니 “내 더위 다 가져라!” 하면서 껄껄 웃으시는 거야. 정월 대보름에 더위 파는 풍습을 가지고 손자를 놀리신 거지.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야.


증조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그러니까 당신의 큰 아들)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돌아가셨어. 외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투병하실 때, 얼마 후에 돌아가셨지.

그런데, 너의 할머니(이자 나의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때 증조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보다 늦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다는 거야. 그래서 아들보다 먼저 죽으려고 일부러 곡기를 끊으셨대.


아무도 모르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증조할아버지가 가까웠던 동네 의사선생님에게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해. 아들을 먼저 보낼 수는 없다고.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나는 믿어.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납득이 가는 얘기니까.


할머니 말씀을 듣고 아마 그게 인상 깊게 새겨졌나 봐. 내 의지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거잖아?     


‘아, 그런 방법도 있구나!’     


내 의지로 숨을 안 쉴 할 수는 없지만 밥을 먹지 않는 건 가능하지.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랄까?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면 너무 심한가?

어쨌든 나는 그 얘기를 들은 후 마음이 편안해졌어. 끝이 정해졌으니까. 끝을 알고 있으니까.     


“그건 자살이야. 그러면 안 되지.”     


본질적인 얘기를 하자면 세상의 모든 죽음은 자살이야. 각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니까, 당연히 죽음도 각자의 몫이지. 진정한 자신의 뜻을 잊고 있을 뿐.     


또 하나. 가장 자연스러운 노화에 의한 자연사는, 병이 없다고 할 때, 먹지 못해서 죽는 거야. 기력이 쇠해서 음식을 먹을 기운이 없고, 결국 곡기를 끊게 되는 거지. 나는 외증조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돼.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에,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밥이 넘어가겠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게 가장 큰 불효라는데, 자식보다 먼저 죽음으로써 불효를 막으려 했던 거잖아. 그것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랬는데...

80까지만 자연스럽게 살자 했는데...     


요즘 들어 살짝 마음이 변해가고 있어. ‘80까지만 살겠다.고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되는 거야. 오만한 에고의 발로라는 생각?     


행위는, 선택된 행동은 각자 인간의 존엄한 권리야. ‘먹겠다.는 것만큼 ‘먹지 않겠다’는 선택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해. 설령 ‘먹지 않겠다.는 생각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해도.   

  

나는 늘 ‘나쁜 짓을 할 권리’에 대해 말해왔지.(그 바탕에는 ‘세상에 나쁘다 좋다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라는 생각이 있지만 그 얘기는 그만 두자.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나의 선택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최대한이냐 하는 거라고. 나의 운명을 완전하게 살아내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고.     


아! 그러고 보니 이해가 되네. 왜 갑자기 생각의 변화가 왔는지, 새삼스럽게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긴 것도 아닌데 왜 80까지 살겠다는 생각이 흐려지고 있는지 의아했거든. 굳건한 바위에 쓴 맹세 같던 다짐이 모래 위의 낙서처럼 부서져가는 이유가 궁금했거든.     



(전략)

“I am that I am!"          


성경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스스로를 지칭한 말이라고 해.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나는 ’~이다‘ 이다”(’나는 모든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함)라고 번역하기도 하더라고.        

  

“나는 있다.”      

   

나의 번역이야. 하나님은 ‘있다’는 사실 자체라는 거지. 그것 외에 이렇다 저렇다 덧붙이기 시작하면 거짓이 되어 버려. 불확정성 원리에서, 입자가 ‘있다’고 규정되는 순간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거지.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한다는 사실 말고는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다 버려야 해. ‘이래야 한다’ ‘이게 정답이다’ ‘내일을 위해서’ ‘올바른 선택’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더라도 다 버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나에 집중해서, 나의 진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거야. 내가 좋은 대로.          

처음에는 걸리는 것도 많고 잘되지 않을 테지만, 믿고 가. 그러다보면 공자가 70의 나이에 도달했다는, 從心所欲 不踰矩 (종심소욕 불유구)의 경지가 될 테니까.     

               ---<딸에게 쓰는 편지 71; 애즈 유 라이크 잇!> 중에서     


그러니까, 너에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고 말하면서, 아빠는 내심 지금 이 순간을 배반하고 ‘그만 살겠다.는 생각에 현재를 종속시키려고 했던 거지. 있지도 않은 ‘죽음’에, 미래의 허상에 현재를 저당잡힌 삶...    

 

God Bless Me! 내 마음 속에서 그게 잘못된 걸 알아챈 거야! 우리 인간의 할 일은 결과를 예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결과는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임을 안 거지.     

먹기를 중지하는 게 아니라, 내 힘이 닿는 한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최선을 다해서 먹는 게 나의 할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안 거야!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이제라도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시 말하면 이 편지의 처음, ‘너는 언제가지 살 생각이니?’라는 질문은 ‘하늘은 언제 무너질까?’ 같은 전혀 쓸모없는 질문인 거였어. 질문 취소.

           ---딸이 아빠보다 지혜롭기를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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