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휴에 한라산 영실울 올라가는데 사방 천지에 철쭉이 활짝 피어있는 거야. 지난겨울 온통 하얗게 덮인 눈 산을 본 이후, 또 다른 한라산의 멋진 모습을 본 거지. 브라보, 한라산!
밤에 침대에 누워 낮에 본 꽃의 향연을 되새기고 있자니 문득 ‘꽃이 좋아지면 늙은 것’이라는 말이 생각나고, 이어 나이와 꽃은 무슨 상관인지 궁금해졌어.
“나이가 들면 왜 꽃이 좋아질까?”
수많은 대답이 떠올라.
“아름다우니까. 꽃은 절정의 아름다움이고, 아제 절정을 지난 나이라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꽃은 옛날부터 아름다웠다. 다만 이제야 그걸 즐길 마음이 되었을 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꽃은 진다. 아름답지만 질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애처롭고 집착하는 것이다.”
어쩌면 백이면 백,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이유를 댈 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도 나만의 이유를 생각해 봤어. 나는 왜 꽃을 좋아할까? 분명히 예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예민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 특히 시각적으로 더 그런데, 꽃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측면이 아닌가 싶어.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꽃들이 많잖아? 나는 그들의 모양은 구별도 못하고 별 관심도 없는데, 유독 각각의 색깔은 눈에 들어와. 다 예뻐 보여.
무채색보다는 유채색이, 우중충한 색보다는 선명하고 밝은 색이 더 좋아. 철쭉의 분홍색, 잔뜩 구름 낀 하늘에 언뜻 비치는 연한 하늘색,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에 터를 잡은 고운 옥색 바닷물...
시각적 예민함은 대기질의 깨끗함에도 영향을 받아. 요즘 미세먼지가 심해서 맑은 날이 별로 없잖아? 그런 때는 마음까지 우울해져. 뿌연 날씨가 그대로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그러다가 오늘처럼 청명한 날이 되면 멀리 정신 끝까지 시원함을 느껴. 미세먼지 없이 시야 탁 트인 경치를 보면 마음이 깨뜻해져. 시각을 통해 마음이 청소되는 느낌?
왜 그럴까?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각(감각)이 예민해질까?
실제로 시력은 점점 나빠져. 물론 청력도 나빠지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모든 육체적 능력이 나날이 떨어져 가는 거야.
떨어지는 것은 육체적 능력만이 아니야. 젊은 시절 완강했던 집중력, 맹렬한 투지, 불타는 승부욕, 드높은 목표의식, 이런 모든 마음의 담벼락이 낮아지고 허물어져.
시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굳이 또렷하게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청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적당히 듣고 적당히 대응하며 살겠다는 뜻이지. 젊은 시절 굳건하게 세웠던 ‘나’라는 성을 허물고, ‘나’ 밖의 세상을 받아들이며 살겠다는 뜻이지.
그렇게 ‘나’의 성이 허물어진 틈으로 꽃이 들어오는 거야. 꽃의 색깔이, 아름다움이 ‘나’의 성안으로 들어오는 거지. 젊은 시절 내가 선택적으로 들여보냈던 것들이, 나이가 들면 나의 통제 없이 마구 밀려들어와.
그래서 나이가 들면 눈물도 많아지지. 눈물은 이미 가득 차 있어. 사소한 단어 하나, 작은 동작 하나라도 자극을 받으면 바로 눈물이 쏟아지지. 웃고 울고 화내고, 모든 감정이 제멋대로 작동해. 이성이라는 담벼락을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다양한 감정이 춤추는 거지. 화창한 몸 날 꽃들이 만발하고 색깔과 모양을 뽐내듯이.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도 달라져.
성큼성큼 힘차게 걷던 젊은 시절과 달리, 걸음은 느려지고 보폭도 짧아져. 진취적으로 전방을 향하던 시선은 점점 아래로 향하고 발밑을 보는 시간이 많아져.
젊을수록, 특히 어린 아이들은 발아래를 보고 걷는 일이 없지. 그들 앞에 남은, 살아갈 시간만큼 높고 멀리 쳐다봐. 지금 당장 눈앞에는 관심도 없지.
그러나 나이가 들면 발 앞을 봐야 해. 좋은 길로 가고 있는지, 장애물은 없는지 봐야 되거든. 왜냐고? 넘어지면 안 되니까. 너희들은 잘 넘어지지도 않고,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고, 혹시 다쳐도 금방 낫지만, 나이든 우리는 달라. 넘어지기 쉽고, 잘 다치고, 다치면 회복하는데 오래 걸려. 멀리 있는 미래보다, 당장 눈앞의 현재가 중요한 거지.
사랑하는 딸!
엄마 아빠가 너만 두고 꽃구경 다닌다고 서운해 하지는 않겠지? 이제 너도 성인이고 너는 너의 길을 가는 거니까. 너는 아직 젊고, 바깥세상 자연보다 네 안의 에너지와 너만의 세계에 집중할 때니까.
글을 쓰다가 옛날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해 썼던 편지가 생각났어. 그 편지에서 너에게 했던 말로 마무리를 할게. 어차피 아빠가 네게 하는 얘기는 항상 똑같지 않니? ‘네 식대로, 맘껏, 신나게, 잘 살라’는 예기...
...사랑하는 딸!
하지만 너는 이제 겨우 스물 하나, 막 인생의 질주를 시작하는 나이니까 단단하게 살 필요가 있어. 좀 더 강해져야 하고, 좀 더 힘차게 달려야 하고, 좀 더 욕망의 크기를 키워야 하고, 좀 더 네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해봐야 하고, 네 원하는 바를 거칠게 밀어붙여야 해. 너 자신을 알기 위해서 네가 원하는바 모든 욕망의 최대치를 발산하고 확인하고 검증해야 해.
젊다는 것은 꼭, 반드시, 죽어도, 절대로 해야만 하는 너의 것이 있다는 거야. 그 너만의 것을 위해서 싸우기도 하고 무례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칙도 할 수 있어야 해. 넘치게 담아보지 않으면 네 욕망의 그릇에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 젊음의 질주 속에서 때로는 아프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또 때로는 부서져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런들 어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바람의 시달림을 견디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 나무들이 당당한 자존심을 꼿꼿이 세울 수 있었으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꼭 해야 할 나만의 것을 해내는 과정’이야. 그 과정의 희로애락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 확인하고, 말 그대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거지. 아빠가 지금 ‘꼭’ 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은, 젊은 시절 ‘꼭, 반드시, 기필코, 때려 죽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는 뜻이야. 욕망은 치열하게 추구하면 맑아지고 가벼워지고 순수해지지만, 피상적인 자극만 좇다 보면 지저분해지고 무거워지고 부패하게 돼. 부디 네가 너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 <딸에게 쓰는 편지 51; 나이가 든다는 것은...> 중에서
--- 아빠가 꽃을 즐기듯, 딸이 자신만의 삶을 꽃피우기를 바라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