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간에도 친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을 가끔 봅니다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친구라는 말 자체가 동성간의 관계임을 전제하고 있다고 해야 정확하겠군요.
따라서 이성간 가까운 (연애상대가 아닌) 사이는 친구가 아니라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지요.
이성이란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켜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동성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합쳐질 수 없습니다.
하나가 될 수 없으나 하나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관계... 그게 친구의 속성이고 아이러니입니다. (물론 요즘은 그런 친구사이 보기 힘듭니다. 가족보다 더 친구를 중하게 여기던 옛날 이야기들은 그저 조롱거리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영화 <친구>는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슬픈 영화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니가 가라 하와이’ 라고 말하면 그건 이미 친구가 아닙니다.
그들은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저로서는 장동건이 친구가 보낸 깡패의 칼에 찔려 죽어가며 하던 대사가 가장 슬프고 인상에 남습니다.
그 유명한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니가.’ 라는 대사...
여기서 장동건은 다시 친구가 됩니다. 그 전까지 친구를 부정하고 이기려던 마음이 사라지고, 자신을 죽이는 친구를 받아들입니다.
찌르지 말라고 부정하는게 아니라 이젠 되지 않았느냐고, 복수를 다짐하는게 아니라 너무 먹어서 나 힘들다고 정직하게 얘기합니다. 죽어가는 그의 몸 위로 슬프게 비는 쏟아지고요.
왜 모든 세상일은 죽음을 마주해야 바로잡아지는 걸까요?
아이의 친구관계는 성적만큼이나 엄마 아빠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사귀는 친구들은 많은지, 어떤 친구와 가깝게 지내는지 항상 궁금합니다.
하지만 잘 물어봐지지 않습니다. 성적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잔소리를 해도 친구문제는 왠지 눈치를 보게 됩니다. 성적은 공적 영역이지만, 친구는 사적 영역이라 그럴까요?
만약 남자친구라도 생기게 되면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걸 보면 지금은 없는게 확실합니다!- 물어보기는 더 어려워지겠지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니 시다바리가’ ‘니가 가라 하와이’ 같은 험악한 대화는 나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사랑하는 딸!
요즘 아빠가 너무 바빠서 얼굴 볼 시간이 거의 없네? 엄마는 아빠가 집에 늦게 오는걸 좋아하지 않는게 분명한데 너는 어떠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감독 중에 임권택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 얘기가 생각난다.
영화를 찍다보면 지방에 오랫동안 가야되는 경우가 많거든? 그런데 자기 부인이 싫어하니까 지방 촬영간다는 얘기를 하기 어려운 거야.
어떤 때는 여러날 전에 미리 해보고, 어떤 때는 하루 전에 해보고 했지만 여전히 부인의 기분이 좋지 않더라는 거야.
가끔 한두번이야 상관없지만, 출장이나 야근 등으로 집을 자주 비우면 가족의 입장에서는 좋을 리가 없지.
새들이 해가 지면 둥지로 돌아오듯이, 가족도 하루 일과가 끝나면 집에서 모이는 게 제일 보기도 좋고 행복한 경우지.
(하지만 요즘 세상은 그러기 정말 어려워.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바쁘니까 모두 밤이 늦어서야 집에 들어오잖아. 집이 가족이 모이는 화목의 공간이 아니라 그저 잠깐 잠을 자는 곳으로 변해 버렸지.
불행하고 우울한 현실...)
아빠가 다시 일을 시작한 것은 친구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야.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아빠는 영화에 대한 꿈을 포기했어. 지금 아빠 나이에 영화를 할 수 있는 건 두가지 경우 뿐이거든. 널리 이름이 알려졌거나 돈이 아주 많거나...
그러나 아빠는 유명하지도 않고 돈도 없으니 영화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하지만 아빠 친구는 아빠의 힘을 필요로 했고, 아빠는 그 친구를 위해 다시 일을 하기로 했어. 아빠의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의 꿈을 위해서.
그럴듯하게 얘기하면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여 세상에 나왔던 것처럼.
공명은 유비가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지만 죽는 순간까지 유비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그게 자신의 운명이니까.
노력으로 운명을 바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다 말장난에 불과해. 운명을 바꾼게 아니라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지.
우리가 할 일은 운명에 맞서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운명을 잘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거야.
운명을 잘 살아낸다는 것은 후회나 집착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지.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 그게 인간의 길이야.
이제 네달 남짓 일해본 결과,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아. 친구가 추진하던 일 대부분이 안됐고, 아빠가 쓴 시나리오도 반응이 좋지 않아.
게다가 오랫동안 일을 도모해온 친구는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시간이 더 지체될 경우 파산에 이를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이야. 아빠는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것이 더 큰 피해를 막는 길이라고 친구을 설득해 보지만, 친구는 어떻게든 침몰하는 배를 살려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어.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어떤 식의 결말이 나든, 친구가 아빠를 필요로 하는 한 아빠는 친구와 함께 있을 거야.
친구는 이 세상에서 아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고, 아빠를 다시 일하도록 불러낸 아빠의 보스이고, 그 어떤 이유보다도 앞서서 아빠의 친구니까.
친구(親舊)...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가족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친구사이지.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가까운게 친구인지도 몰라.
가족은 혈연으로 연결된 사이니까 내 뜻과는 상관없이 맺어지는 거지만, 친구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잖아.
보통 옛날 관계를 나타낼 때 ‘전(前)’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는데, 그 ‘전’자를 붙이지 않는 관계는 혈연관계하고 친구관계밖에 없을걸? 전아빠, 전딸이라는 말이나 전친구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그만큼 친구는 중요한 사이라는 뜻이야. 가족보다 친구를 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친구는 헤어지면 남이기 때문이야.
가족은 설령 헤어지더라도 여전히 아빠고 딸이지만 친구는 헤어지면 아무 관계도 아니지.
부부도 헤어지면 ‘전남편’이라고 이름이 있는데 친구는 그것조차도 없어.
얼마전 텔레비전의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자기에게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고...
그 말을 들으면서 아빠가 가슴이 아팠던 것은 친구가 없는 그의 현실이 아니라,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그의 마음이 가슴 아팠어.
그렇게 단호하게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마음이 섬뜩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친구가 없다는 말은 함부로 쓰면 안되는 말이야.
방문객
- 정현종 -
(전략)...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후략)
친구를 잃는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
좋은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해라. 가볍게 입을 티셔츠 하나 사는데도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 막상 친구를 사귈 때는 적당히, 만나지는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좋은 옷도 몇 년 입으면 버려야 하지만 좋은 친구는 평생을 같이 할수 있는데도 말이지.
친구는 너와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같은 거야. 여러 방면에 좋은 친구가 많을수록 너는 그만큼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이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는 밑받침이 될 수 있지.
욕심을 내고 싶거든 부디 좋은 친구를 사귀려는 욕심부터 내기를! 좋은 물건을 갖고 싶거든 부디 좋은 친구를 갖는 욕심부터 내기를!! 행복을 얻고 싶거든 부디 평생 함께할 좋은 친구를 만나는 행복부터 얻을 수 있기를!!!
친구에게 도움이 못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