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편지17;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by 천하태평


* 이 편지는?


*** 아무리 낙천적인 부모라도 자식에게 전혀 잔소리 안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포기했다면 가능하겠지만요.)
자식이 잘될 거라고 확신을 한다해도, 만에 하나 잘못될 것을 염려해서 또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겁이 많은 개가 크게 짖듯이, 불안한 부모는 잔소리가 심합니다.

저는 지루한 걸 못참는 편이어서 TV 드라마를 잘 못보는데요, 그중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몇 개 있습니다.
편지에서 언급한 <모래시계>와, 근래의 <응답하라> 시리즈, <미생> <나의 아저씨>같은 작품들이죠.

그중에 <응답하라 1988> 11화의 한 장면은 정말 좋았습니다.
여주인공 덕선이 남자친구를 좋아하는데, 피차간에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끙끙댑니다.
덕선은 남자친구 정환과 이문세 콘서트에 가려고 하나 정환이 애매한 반응을 보여 심란해 합니다.
그러다가 정환의 착각으로 덕선이 자는 방에 가게 되는데, 정환은 잠든 덕선을 보며 심한 갈등(친구 택과의 삼각관계)을 합니다. 그때, 온 세상이 잠든 적막한 순간, 갑자기 덕선이 눈을 뜹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덕선은 정환이 자기 옆에 누워서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동네친구이긴 하지만 단둘이 누워본 적은 없으므로 놀랄 수밖에 없겠지요. 더군다다 막 사랑에 눈을 뜨는 중이어서 예민하고 부끄럽기도 할 겁니다.

갑작스런 돌발상황에 덕선이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요?
크게 소란을 일으켜도 아무 상관없을 그 순간에 덕선은 조용히, 잠꼬대처럼 한마디 묻습니다.

“콘서트 같이 가자. 너, 콘서트 갈거지?”
(아! 이 대사가 나왔을 때 제가 느꼈던 기분을 여러분이 공감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소녀는 자나깨나 정환과 콘서트 갈 생각만 하고 있으며, 그래서 잠결에 눈을 떠서 정환이 보이자 꿈에서라도 하고 싶었던 말을 그냥 합니다.
근래 작품 중에서, 영화와 TV를 통틀어, 이 대사만큼 인물을 본질을 적절하게 드러낸 작품은 없었습니다.
이 한마디로 덕선이라는 소녀가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영혼의 소유자인가를 뚜렷하게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그 어떤 호들갑보다 선명하게 사춘기의 사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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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특별한 재주도 없어서 걱정이십니까? 혹시 이름이 나빠서 그런가하여 개명할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부 못하는 덕선이가 잘 자라서 어른이 되듯이, 아이들 역시 나름대로 잘 살아갈 겁니다.
저도 잔소리를 그만둘 순 없겠지만, 딸아이의 장래를 걱정하진 않을 작정입니다. ***


사랑하는 딸!
너한테 잔소리 안하기로 했는데 오늘 못참고 또 잔소리를 했네? 아빠가 참을성이 부족하고 성질이 급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너도 좀 잔소리 안하게 잘할 수 없어? 왜 착한 아빠로 살려는데 자꾸 악당을 만드는 거야?

어쨌든...!
아빠가 대충 설명을 했는데 아무래도 네가 납득하지 못한것 같아서 다시 얘기를 하려고 해.

사건의 발단은 네 비염이었지.
요즘 네 비염이 심해진 것 같아서 아빠는 너더러 병원에 가보라고 했고, 너는 가기 싫다고 했어.
너에게 참견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얘기를 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 다시 설명을 했지. 왜 병원에 가야하는가에 대해서. 그동안 여러번 해왔던 얘기를.

아빠가 지금 다시 말하고 싶은 대목은 감정과 뜻에 대한 얘기야.
병원에 가기 싫다는 것은 감정이고,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 거니까 그걸 믿고 판단하지 말라고 아빠가 말했지?

그럼 싫다는 감정이 변하면(좋아지면) 그때 가면 되지 않느냐고 너는 반문했고, 아빠는 감정과 뜻의 관계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했어. 감정을 따르지 말고 뜻을 따르라는게 아빠의 결론이었지.
아빠의 말이 설득력이 없었는지 너는 수긍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그래서 아빠는 다시 한번 그 얘기를 하는거야. 감정과 뜻... 중요한 문제거든.

인간의 심리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대강 살펴볼까?
어떤 상황이 있고 그게 ‘이득/손해’가 되면 ‘기쁘다/화난다’는 감정이 생기지.
기쁘다/화난다는 감정은 ‘좋다/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좋다/나쁘다는 생각은 ‘사랑/미움’의 행동으로 발전하고 결국 ‘선/악’의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거야.

병원에 가야하는 일이 있어.
너는 병원에 가면 아프게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손해) 괴롭고 싫고(감정) 갈 필요 없다(악)고 생각을 하지.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여기에 빠져있는 게 있어. 바로 ‘왜?’라는 질문이야. 문제의 출발점, 왜 병원에 가야했나에 대한 고려가 빠져버렸지.
비염을 고쳐야겠다는 목적(뜻)을 잊어버린 채 단순히 좋다 싫다는 감정으로만 상황을 판단해버리고 말았잖아.

“좋을 때 잘하는 건 개도 한다!”
아빠가 가끔 하는 말이야.
기분 좋을 때는 누구나 잘하지. 문제는 기분이 나쁠 때, 하기 싫을 때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야.
분명히 옳은 일이고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하기 싫을 때 과연 해내는 뜻과 의지가 있느냐, 그게 인간이 여타 동물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인 거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기 싫을 때, 아무리 애써도 행동이 따라주지 않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빠가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윽박질러도 병원에 가기 싫을 때, 엄마가 하루 한시간은 영어공부를 해야한다고 해도 하기 싫을 때, 그럴 때는 과연 어떻게 하는게 옳을까?
그럴 때는 뜻을 살펴야 해. 네 뜻이 뭔지 살피고, 잘못된 뜻이라면 바로 잡아야 한단 말이지. 어쨌든 최우선은 뜻을 알아보는 거야.

아빠가 너더러 병원에 가라고 하는 뜻은 비염을 치료하라는 뜻이야. 하지만 너는 병원에 가기 싫어.
만약 네가 비염을 치료한다는 아빠의 뜻에 동의한다면, 다시 말해 너도 비염을 치료할 뜻이 있다면, 그런데도 병원에 가기 싫다면 너는 다른 방법을 찾아 볼거야.

병원에 안가고 비염을 치료할 방법이 없을까? 아, 알러지는 면역력 결핍 질환이니까 면역력을 기르면 되지 않을까? 골고루 잘 먹고, 운동하고, 잘 자고, 스트레스 없이 건강한 생활을 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등등...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고 그걸 행동에 옮기겠지. 왜냐하면 너는 비염을 고쳐야겠다는 뜻이 있으니까. 뜻은 행동을 일으키는 동력이니까.

그런데 너는 어땠니? 병원에 가기 싫다고 하면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기나 했니?
아빠가 보기에 너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아빠가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야. 다시 말해서 너는 비염을 고치려는 뜻이 없었던 거지.
그렇다면 그건 너의 선택이고 아빠는 네 선택을 존중할 거야. 네가 병을 가지고 고생하면서 사는게 안쓰럽고 가슴 아프지만, 설령 그로 인해 네가 점점 몸이 아파져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네 뜻이라면 인정해야지 어쩌겠어.

아빠가 잔소리를 해야했던 건 그게 정말 네 뜻이냐고 묻고 싶었던 거야.
드러난 증거로 보면 그게 네 뜻인데, 너는 그걸 알고 있느냐하는 얘기지.

알고 나쁜 행동 하는 사람과 모르고 나쁜 행동 하는 사람 중에 누가 너 나쁜 사람일까?
전에도 얘기한 적 있는데 기억 나니?

흔히 모르고 한 행동을 용서하지만 사실은 알고 한 나쁜 짓보다 훨씬 많은 벌을 받아야 해.
끓는 물인줄 알고 손을 넣는 사람과 모르고 넣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큰 화상을 입을까?
끓는 물일줄 알고 친구에게 끼얹을 때와 모르고 끼얹을 때 언제 더 큰 피해를 입힐까?
내가 하는 행동이 잘못된줄 알고 있으면 언젠가는 바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잘못된 행동인줄도 모르면 바로잡을 가능성도 그만큼 낮아지는 거야. 뜻이 없으니까, 좋아지려는 목표가 없으니까 기분따라 이리저리 인생의 미로를 헤매다가 죽고 마는 거지.

사랑하는 딸!
언젠가 아빠가 세상 모든 것은 유한하고 변하다고 했을 때 네가 물었지. 그럼 변치않는 진리는 없느냐고.
그때 아빠가 한 대답, 기억나니?

...그래. 콩 심은 데 콩 난다! 인과법(因果法)이 그래도 영원할 것 같다고 했지.
이 세상 어느것 하나 잘못된 것은 없어. 불구도 장애도 질병도, 범죄도 재난도 전쟁도 다 마찬가지야.
좋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판단이고, 신의 입장에서는 섭리에 따라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따름인 거지.

네 병도 마찬가지야.
알레르기 비염은 너의 유일한 질환인 셈인데, 그것도 역시 나쁜 일은 아니야.
암에 대해서 아빠가 말했었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세포를 괴롭혀서, 그 세포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변이를 일으켜 죽어가는게 암세포라고. 자신이 만든 병이니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같은 맥락으로 네 비염 역시 네가 심은 병임에 틀림이 없지. 그게 네가 태어난 이후 습성이건, 유전적 습성이건, 전생의 습성이건 간에.

문제는, 병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야. 그래서, 병이 있어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문제야!

(그 다음이 문제야 라는 말에 대해서는 에피소드가 있어.
아빠도 글을 쓰는 사람이고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웬만한 경우는 ‘저 정도야 나도 하지’ 라는 마음이 있어.
그런데 아빠가 미처 생각못한 대사를 보여준 드라마가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였어.

아빠는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 TV드라마를 우습게 알았고, 또 실제로도 별 재미를 못느끼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는 제법 볼만하게 만들어져서 여러번 봤지. 그러다가 끝날 무렵 주인공이 교도소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됐어.

친구는 사형을 앞둔 주인공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해.
젊은 시절 주인공은 광주항쟁의 시민군이었는데, 친구가 계엄군으로 진압작전에 투입이 됐었던 거야.
친구는 평생 죄의식을 가지고 살다가 마지막으로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빌지.

아빠 입장에서는 뻔한 이야기에 뻔한 전개니까 그저 연기를 잘 하는지, 연출은 괜찮은지 살피면서 보는 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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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빠를 깜짝 놀라게 한 대사가 바로 ‘그 다음이 문제야’ 라는 대사야.


대충 화를 내거나 침통해 하다가 용서한다고 하거나 뭐 그런 식의 진행이 예상되던 참인데,

주인공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거두절미하고 이야기의 질을 한 차원 높여 버리지.


주인공이 하는 말은 이런 거야.

그때는 내가 옳았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래서, 그 이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옳은 일을 했지만 이후 잘못된 삶을 살아서 지금 사형수가 됐고, 너는 잘못된 일을 했지만 이후 바른 뜻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 훌륭한 검사가 됐다. 나는 그런 네가 자랑스럽다... 뭐 그런 얘기야.


친구가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면서 감정을 이야기하는데, 주인공은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뜻을 이야기하지.

잊을 수 없는, 정말 멋진 대사였어!


송지나라고 당시 유명한 방송작가였는데, 어떻게 그런 대사를 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부러워.

TV 드라마에서 아빠에게 놀라움을 안겨준 송지나 작가에게 경배를!)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병이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살거냐 그게 문제야.

병을 내 책임으로 알고 같이 가면서 내 삶을 완성시켜갈 것인가, 병을 원망하고 탓하면서 여전히 병의 원인을 무시하는 결함의 삶을 살 것인가?

그 선택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는 거야. 비염이 문제가 아니라 그 비염을 가지고 어떻게 살거냐 그게 문제라는 거지.


비염을 계기로 내가 내 몸을 건강하게 보살피고 사랑하는 방법을 찾으면서 넓게는 지구의 환경문제에까지 영역을 확장시킬 것인가, 아니면 비염 때문에 내 몸이 고통받는 것은 관심도 없이 당장 귀찮고 괴로운 것만 피하려 할 것인가?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떤 씨앗을 심어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야.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해.

좋다 싫다는 감정이 아니라 옳다 그르다의 가치판단에 의해 행동하는 연습.


처음에는 생각과 감정이 일치하지 않아서 고생할 수 있지만 차츰 생각의 힘이 커지고, 선택한 결과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감정도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될 거야.


옳은 것을 행하는데 싫은 감정이 드는 것이 내 진심이 아니라 사소한 신경회로 이상으로 인한 잠깐의 고장상태라는걸 알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러한 고장은 항상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싫다는 감정이 불쑥 생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솟아올라도 그다지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거야. 그게 사람이니까.

사람은 원래 그렇게 고장이 잦은 기계고, 그래서 의학 과학 철학 예술 종교 등 여러 가지 보완장치들이 발달한 거니까.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 하는 것은 어렵고 안하는 것은 쉽다.

기분대로 대충대충 사는 것은 쉽고, 뜻을 세워 노력하면서 사는 것은 어렵고 힘들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려면 배의 노를 저어야 하고, 한시라도 노를 젓지 않으면 배는 물살에 휩쓸려 망망대해로 떠내려가고 말거야.


설마... 수영도 못하는 아빠가 너를 찾으러 바다를 헤매게 하지는 않겠지?


딸이 인생의 강을 잘 건너기를 바라는 아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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