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편지18;앙코르와트, 파르테논, 이과수폭포
* 이 편지는?
*** 지금 몇 개월째 세계여행 중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자 다니던 직장을 명퇴하고 오랜 꿈이던 세계여행을 (부부 단둘이서) 떠났습니다. 아시아에서 아프리카, 유럽을 거쳐 남아메리카까지 돌아올 계획이라고 합니다. 맘에 드는 곳이 있으면 적당히 살면서 다닐 생각이라고 하니 언제 그 여행이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여행을 기록하는 블로그 제목이 ‘꽃보다 감자’인데 (자신의 철학이 실용주의라는 말이겠지요?) 그런 여행이 그의 이념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여행을 꿈꾸고 계십니까?
저는 이과수 폭포를 가보는 것이 꿈입니다. 워낙에 폭포를 좋아하는데 (하다못해 제주도 정방폭포를 하루종일 보고있으라 해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막상 이과수 폭포에 가서 그 엄청난 물줄기를 보면 너무 좋아서 기절하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되기도 합니다.
앙코르와트는 단체여행을, 파르테논의 유럽은 가족여행을 다녀왔는데 남미의 이과수는 개인 배낭여행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뭐랄까, 저만의 은밀한 의식이라고나 할까요? 지구 반대편 가장 멀고 험한 곳으로, 성지 순례자들처럼 저만의 성지를 찾아 떠나고 싶습니다. (혹시 제 여편이 싫어할까요? 하지만 워낙 멀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말한 잘하면 못이기는 척 허락하지 않을까 싶네요.)
몇 번 다녀본 바, 단체 패키지 여행은 되도록 하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편하기는 하지만 그저 주마간산 식으로 다녀오는 것이라, 영화로 치면 3배속 쯤으로 보는 부실한 체험입니다.
앞에 말한 제 친구는 영어를 저보다 못하는데도 세계여행을 아무 문제없이 하고 있으니, 여러분도 아무 걱정 말고 개인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스마트 폰은 꼭 챙겨 가시구요. ***
사랑하는 딸!
우물 안에 개구리 세 마리가 살고 있었어. 엄마 개구리와 아빠 개구리, 그리고 딸 개구리.
우물 속 좁은 자리와 동그란 하늘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던 개구리 가족은 어느날 우물 밖으로 여행을 떠났어.
보름동안 개구리 세 마리는 신나게 세상구경을 했고, 예정된 시간이 지나자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갔지.
그 개구리 가족이 우물을 나와 넓은 세상을 보았을 때, 그리고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가게 됐을 때 개구리 세 마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넓은 세상을 보기 이전과 보고 난 이후의 개구리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엄마 개구리와 딸 개구리가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잘 몰라. 이내 각자의 일상생활로 돌아갔거든. 분명한 것은, 아빠 개구리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는 거야. 겨우 보름동안 여행을 다녀왔을 뿐인데 돌아온 후 20여일동안, 매일 밤 여행하는 꿈을 꾼 것만 봐도 그 충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지. 마치 유체이탈한 환자처럼 몸은 우물 속에 있지만 영혼은 여전히 바깥세상을 누비고 다닌 셈이야.
그리고 이제, 돌아온지 한달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이야기를 편지로 쓴다. 아빠 개구리가 딸 개구리에게.
시간이 지나고 여행의 흥분이 진정되면서 생생하던 느낌은 사라져 가고 있어.
꿈이었던 것처럼 아스라이 멀어지는 감흥과 달리 생각은 점점 구체적이고 뚜렷하게 정리되는데, 그중 첫 번째가 뭔지 아니?
이번 유럽 여행을 통해 아빠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 그건 바로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이야.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일단,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말을 ‘나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밖에 나가보니 훨씬 넓은 세상이 있더라’는 의미로 생각하지는 말아줘. 우리나라가 좁다는 식의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의미가 훨씬 크니까.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이아무개라는 평면적 인식에서(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자각도 별로 없었을 듯...) 전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포함하고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연대되어 있는 입체적 자아로서의 나임을 실감하게 됐어.
‘박물관이 살아있다’라는 영화를 보면 박제된 공룡이 살아나잖아? 그것처럼 죽어있던 역사가 살아있는 현실로 아빠한테 경험이 된 거지.
모나리자라는 그림이 옛날 르네상스 시대의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감상하는 현재의 그림이 된 거야.
‘루브르에 가면 있대’ 라는 우물 안 개구리 입장이 아니라 ‘루브르에 가면 있어’ 라는 범 지구적인 공간개념이 형성된 거야.
아빠 자신을 이 지구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거지.
여행이 끝나고 아빠는 다시 우물 안 개구리로 돌아왔어.
하지만 아빠는 더 이상 옛날과 똑같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야. 전에는 우물을 내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았지만(밖에 이런 저런 세상이 있대,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대...) 이제는 아니야.
여전히 우물 속이 내 생활의 터전이고 우물 안이 내 영역이지만, 더 이상 넓은 바깥을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나는 지금 이 우물 속에서, 세계인들과 함께,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인거야.
루이 14세는 ‘내가 곧 국가다!’ 라고 했다는데, 아빠는 ‘내가 곧 지구다!’까지는 아니어도 이렇게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나는 지구의 개구리다!’ 라고...
사랑하는 딸!
너는 이번 유럽여행이 어땠니? 어떤 걸 보고 뭘 느꼈니? 우리는 박물관과 고적답사를 위주로 여행했으니까 너로서는 힘들고 재미없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젤라토 넘버 1,2,3를 다 먹어본 것만 해도 너로서는 대단한 수확 아니야?
‘엄마. 케임브리지 대학 정말 좋더라. 나 공부 열심히 해서 케임브리지로 유학 갈래.’
‘각양각색 인종이 어울려 지내는 걸 보니까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나. 지구촌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소설을 쓸 거야. 정말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물론, 모두 읽을 수 있게 영어로 써야지.’
‘우리나라를 더 사랑하게 됐어. 아빠, 두고 봐! 난 우리나라를 유럽보다 더 사랑받는 나라로 만들 거야.’...
뭐 이런 식의 감동적인 대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여행경비가 눈앞에 어른거리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냐?
뭐가 제일 좋았느냐는 아빠 질문에 너는 스위스 엥겔베르크의 동네 놀이터가 좋았다고 했지. 젖은 모래 놀이를 할 수 있게 펌프를 설치한 놀이시설은 아빠도 처음 본 것이기는 해.
그렇다고 해도 유럽 각지의 엄청난 볼거리들을 다 물리치고 그걸 첫 손가락에 꼽는 그 심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돼? 너만의 독특한 내숭이라고 아빠는 생각하고 있어.
이번 유럽여행을 준비하면서 아빠가 가장 보고싶다고 생각한 것은 클림트의 벽화였어. 유럽을 소개하는 책을 보다가 무려 34미터에 달하는 클림트의 벽화가 있다는 말에 아빠는 눈이 번쩍 떠졌지.
구스타프 클림트!
아빠가 노란색을 좋아하는 거 알지? 클림트는 노란색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황금색을 환상적으로 사용한 화가야. 제일 널리 알려진 ‘키스’ 같은 작품은 너도 본 적이 있을걸?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화가로 ‘분리파’라는 사조를 이끌고 있었는데, 1902년에 베토벤을 위한 헌정 전시회를 열면서 바로 그 작품 ‘베토벤 프리즈’를 탄생시켰다는 거야.
황금색의 화가가 그려낸 그 마법같은 공간이 얼마나 멋있을까?
예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베르사이유 특별전 했었잖아? 그때 황금색 가득한 ‘거울의 방’에 들어가서 행복해 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것보다 훨씬 감동적일 거라고 김칫국을 마셔댔지. 그러나...
그러나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오스트리아 빈 분리파 전시관에 있었고, 우리의 유럽여행 스케줄에 오스트리아는 들어있지 않았어!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 분리파의 구호였다는데, 아빠에게는 그 예술을 감상할 자유가 주어지지 않더라고.
그 다음 보고 싶었던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였어. 유럽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그 색채의 화려함으로 유명하잖아. 아빠는 그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현장에서 감상하고 싶었고, 그래서 찾아낸 곳이 영국에서는 캔터베리 대성당이었고 프랑스에서는 생트 샤펠 성당이었어.
하지만 캔터베리 대성당은 케임브리지를 가야 하므로 포기했고, 생트 샤펠 성당은 엄청난 대기행렬 때문에 돌아서야 했지. 다음 코스가 오르세 미술관이었으니까.
결국 아빠는 보고 싶은 스테인드 글라스는 보지 못했고, 그나마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을 꼽으라면 아빠는 단연 파르테논 신전이야. 하도 정신없이 돌아다녀서 어디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대영박물관 어느 곳에 파르테논 신전을 재구성해 놓은 그 공간!
훼손된 조각품들과 조각조각 모아놓은 신전 파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옛날 파르테논 신전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어. 개별 전시된 조각품들을 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그리스 문화의 아우라가 아빠를 감동시켰지. ‘오! 위대한 그리스여!’ 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으니까.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등을 보면서 간절하게 든 생각. 제발 문화재들을 원형 복구시켰으면! 문화재들을 그 나라 그 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면!
박물관 천국인 유럽을 여행하면서 갈갈이 찢겨진 몸체를 여기저기서 보는 듯한 섬뜩한 기분이 많이 들었어. 대영박물관에서는 머리를, 루브르에서는 다리를, 바티칸에서는 몸통을 본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지.
대영박물관의 파르테논 신전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나마 훼손된 채라도 원형을 살리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야.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도 좋았어.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이 뭔가 위압적인 권력욕과 과시욕이 느껴져서 불쾌했다면, 두오모 성당은 정말 성전으로서의 경견함이 살아있어서 마음에 들었어.
아빠는 송광사 법당에 들어갔을 때의 그 서늘하고 청량한 경건함을 좋아하는데, 두오모 성당은 그것과 다른 포근함이 느껴져서 가슴이 찡 하더라고. 아빠가 좋아하는 선운사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로마의 포로 로마노는 ‘로마는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곳이야.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로마문화는 그저 박제된 유물로만 남아있다고 생각하던 아빠에게 포로 로마노는 ‘아니다. 로마는 지금도 이렇게 살아서 우리와 함께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거다’라는 걸 일깨워줬지.
뜨거운 땡볕 속에서 다니느라 우리는 피곤했고, 지친 너는 몇천년을 견뎌온 돌받침 위에서 잠깐 낮잠을 잤어. 엄마 아빠는 잠든 너를 보면서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로마가 살아서 아빠 속으로 들어왔어.
이젠 폐허밖에 남지 않았지만 한때는 찬란한 영화를 누리던 로마의 중심. 그 중심에 우리 세 식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거야. 변한 것은 시간 뿐이고, 그 시간이라는 것을 치워버리면 너는 로마인으로서 로마제국의 한복판에서 낮잠을 잤던 거지.
그때 그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그 로마의 정신과 패기는 여전히 남아서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었던 거야. 로마가 먼나라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라는 걸 깨달은 거지.
그리고 파리의 오랑주르 미술관 모네의 방...!
오랑주르 미술관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르누아르 작품이 의외로 많아서 횡재한 듯한 기분이었지만, 백미는 역시 모네의 수련 연작으로 꾸며진 모네의 방이야.
한 벽면에 하나씩 네 개의 작품으로 꾸며진 모네의 방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정말 이슬처럼 축복이 쏟아지는 느낌이었어. 파리에 산다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혼자 와서 여러 시간 있다가 가고 싶은 그런 공간이었지.
단순히 작품이 좋은 게 아니라 그 공간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그 시간 자체를 음미하게 되는, 모네의 세계 속에 초대받은 듯한 그런 느낌을 주는 축복의 공간...!
이번 유럽 여행을 통한 모네의 재발견!
모네가 인상파의 대표로 훌륭한 화가라고 생각은 했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었는데, 이번에 수많은 그림들을 한꺼번에 보면서 모네가 아빠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화가라는 걸 알게 됐어.
르누아르는 여전히 좋았고, 고흐는 몇몇 걸작을 빼면 생각보다 매력적이지 않았어. 루벤스도 새롭게 눈에 들어왔고...
어쨌든, 르누아르가 작고 예쁜 동산이라면 모네는 울창한 숲과 계곡을 가진 큰 산이구나 라는게 내 생각이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
여행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각자의 뜻에 달려있는 거야. 여행가서 쇼핑했다, 쉬고 왔다 하는 얘기는 단순한 현상을 설명한 것에 불과해. 중요한 것은 쇼핑하고 쉬는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어떠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느냐 하는 거야.
예술적 체험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여행의 경험 역시 우리의 언어 너머에서 이루어지지. 내 의도를 갖기 보다는 그곳 그 시간에 충실할수록 좋은 경험이 될 가능성이 많아. 우리 가족 셋 중에 네가 제일 의도하는 바가 적었을테니, 여행의 경험은 가장 풍성하게 얻었으려나?
솔직하게 말해서, 이번 유럽여행을 통해서 아빠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네가 ‘아! 아무래도 영어는 잘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으면 하는 거였어.
대충 눈치를 보면 그 의도가 별로 성공한 것 같지는 않네? 하지만 상관없어. 아빠 생각이 변했거든. 여행 전에는 네 영어가 부족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아니야. 전에는 영어를 잘해야 ‘인터내셔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영어를 잘하건 못하건 너는 이미 ‘인터내셔널’하다고 생각하니까.
키 큰 사람 있고 작은 사람 있듯이 영어 잘하는 사람 있고 못하는 사람 있는 거야,
키가 크건 작건 대한민국 사람이고, 영어 잘하건 못하건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의 동반자인 거지.
딸이 세계 역사의 당당한 일원임을 알고 뿌듯해 하는 아빠 개구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