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은 칭찬은 (물론 저에게 한게 아니라 남에게 하는걸 들은 겁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입니다.
시끌벅적 잔치같은게 있어도 안보여서 찾아보면 다락방같은 곳에서 책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평소에도 시간만 있으면 책을 찾구요.
제가 기억해봐도 어려서 책에 집착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왜 그렇게 열심히 책을 찾았느냐인데, 책이 좋아서라기보다 세상을 (사람을) 피하는 수단으로 책이 이용됐던게 아닌가 합니다.
책을 보고있으면 사람들하고 얘기를 안해도 되고, 현재가 아닌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그 또한 좋습니다.(왜 그렇게 고립적이 됐을까 하는건 제 오랜 궁금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알아낸 것은 어려서 제가 겪은 어떤 나쁜 경험과 관련되어 있더군요. 그 경험이 저를 방어적으로 세상과 담을 쌓도록 만든 거지요.)
꽤 오랜 시간을 사람들 사이에 섬처럼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어울리는 듯 보여도 외톨이였지요.(갑자기 백뱅의 ‘loser'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루저, 외톨이, 센척하는 겁쟁이... 제얘깁니다.)
적개심과 분노와 열등감과 자존심과 망상으로 섬을 만들어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섬이 무너져내림을 느낍니다. 적개심도 분노도 열등감도 자존심도 망상도 약해지고 사그러들고 증발해버렸습니다. 약간의 잔해만 남아있습니다.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기름이 살려내는 불길은 부끄러움입니다.
과거 나의 적절하지 못한 행동들에 대한 부끄러움. 그 부끄러움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변하고, 다시 후회의 불길로 타오릅니다.
다시 살면 그렇게 살지는 않겠지만,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쨌든!
사람들 사이에 있던 섬을 비우니 그 사이가 보입니다. 그 비어있는 사이를 통(通)하고 싶습니다. 통해서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
사랑하는 딸!
아빠하고 너 사이에 뭐가 있을까? 공기? 아니면... 사랑? 그것도 아니면, 엄마?
넌센스 퀴즈 식으로 답하자면 ‘하고’가 되겠지만, 시인 정현종은 ‘섬’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대답하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단 두 줄의 짧은 시지만, 그래서 더욱 유명한 시야.
이 시인은 공기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하고도 아니고, 섬이 있다고 말하네?
섬이 무슨 의미인지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거야. 이 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건 그건 각자의 몫이야.
시 감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니까 아빠도 섬이 무슨 뜻이고 그런 얘기는 하지 않을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이 시가 생각이 났을 뿐이야.
대부분 1행의 섬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아빠는 2행을 말하려고 해.
1행에서 시인은 ‘섬이 있다’고 말을 해.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나 상황에 대한 설명이지. 주인공이 등장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2행에서는 ‘가고 싶다’는 주인공의 욕망이 표현되고 있어. 바로 이 점이 이 시가 오랫동안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라고 아빠는 생각해. 단순히 섬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정적인 상태로 끝났다면 그냥 멋진 시 정도로 머물렀을텐데, 시인은 ‘가고 싶다’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시를 동적인 상태로 변화시켜 버려. 그 변화의 주인공은 물론 ‘나’지.
이 시를 가지고 좀 더 놀아볼까?
1,2행을 한 줄로 줄이면 어떻게 되겠니?이것 역시 정답은 없겠지만 아빠는 이렇게 줄이고 싶어.
사람들 사이에 ... 가고 싶다
사람들 사이... 너와 아빠 사이, 엄마와 아빠 사이, 친구 사이...
사이가 있다는 것은 틈이 있다는 것이고, 떨어져 있다는 뜻이야.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지.
그 사이에 뭐가 있건(가장 좋다는 사랑이라고 해도) 핵심은 ‘분리되어 있다’는 거야. 가고 싶다는 것은 그 분리를 넘어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지. 불가능한 욕망...
사람과 사람이 하나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육체적인 분리가 어쩔 수 없는 거라면 정신적 심리적으로 통하는 게 하나되는 유일한 방법이겠지.
그 섬에 가면 하나되는 비밀의 열쇠가 있는지도 몰라. 그 열쇠로 비밀의 통로만 열면 아빠가 너한테 이렇게 편지를 쓸 필요도 없지. 편지는 통하려는 노력인데, 우리는 이미 통해 있으니까.
그런 상태, 사람과 사람이 서로 통하여 하나가 된 상태가 이거구나라고 느낀 적이 있어. 아빠의 경험이 아니고 서영은이라는 소설가의 경험담이야.
서영은(徐永恩)은 ‘먼그대’ ‘사막을 건너는 법’ 등을 쓴 소설가인데, 문학적 스승인 김동리와 사랑을 했지.(김동리를 아나? ‘등신불’ ‘무녀도’ 등을 쓴,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설가 중 한 사람이야.)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고, 30년이라는 나이차도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을 순 없었어.
그런 어느날의 일이야. 남편 김동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고, 서영은은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지.
그냥 각자 자기가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어. 김동리와 자신이 완벽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거야.
특별히 상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랑의 감정이 충만한 것도 아닌데 그냥 완전히 통해 있다는 충일감이 느껴지더라는 거야.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의 상태에 있었던 거지.
완벽히 하나된 상태...
주고 싶다거나 받고 싶다거나 하나가 되고 싶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를 활짝 열어서 상대와 완전히 통해버리는 상태. 그래서 더 이상 너와 나라는 구분이 없어진 상태. 너도 없고 나도 없는 무아의 경지...!
이렇게 완전상태가 아니라면 잘 통하는 사이가 되어야 해.
제일 잘 통하는 방법은 물론 마음으로 통하는 사이겠지. 말이나 행동이란 어느 정도 제약이 있게 마련이고, 마음은 사진 찍듯이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주면 되니까.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그런 뜻이지.
이심전심의 예로 흔히 드는 것 중에 염화미소(拈華微笑)라는 말이 있어.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사람들에게 설법을 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지. 부처님이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어.
그때 제자 중에 마하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는데, 이에 부처님이 가섭에게 불법이 전해졌음을 선언했다는 얘기야.꽃을 든 마음에 미소로 답했다는, 그걸로 서로 통했다는, 알듯 모를 듯한 이야기.
(엄마 아빠도 마음으로 통하는 거 알지? 가끔. 엄마가 ‘사과가 있나?’ 하고 물으면 아빠가 ‘응, 있어’ 하고 대답하잖아. 너는 그게 사과 얘기가 아니라 배 얘기라는 걸 알고 엄마 아빠를 비웃지만 엄마 아빠는 이미 마음으로 통했던 거야.)
마음으로 통할 수 없다면 말과 행동으로 통하는 수 밖에 없지.
내 뜻과 생각과 기분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해야 돼. 굳이 말과 행동을 안해도 마음을 알거라고 생각하지 마.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해.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은 왜 나쁜지 어땠으면 좋겠는지 얘기를 해야 돼. 사람 몸에 혈액순환이 잘 안되면 혈관이 막혀서 병이 오듯이, 사람 사이도 의사소통이 잘 안되면 오해가 깊어져서 관계가 나빠져.
얼마전 아침식사 때 아빠가 ‘개학해서 기분 좋겠다?’고 물었더니 너는 말했지. ‘왜요?’
아빠는 너하고 통하려고 말을 걸었는데 너는 막히는 대답을 했어. (아빠가 정말 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궁금했겠어? 그냥 너하고 통하고 싶었을 뿐이야!)
물론 너는 습관적으로 한 대답이었겠지. 적절한 대꾸가 생각나지 않으면 너는 ‘왜요?’ ‘정말요?’ 그런 말을 잘 쓰니까. 문제는 무의식적으로 쓰는 그 말이 심각한 관계단절을 유발할 수 있다는 거야.무슨 난해한 질문을 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면 되잖아. ‘신난다’ ‘졸리다’ ‘숙제 안해서 걱정이다’... 정 말하기 싫으면 ‘말하기 싫다’고 하면 돼.
그럼 아빠는 ‘왜? 기분이 안좋아?’‘알았어! 그냥 밥 먹자’ 등등 뭐라고 대응을 하겠지.탁구치면 서로 공을 주고 받듯이 그냥 그렇게 주고 받으면 되는데, 너는 넘어온 공을 잡고 물어봐. ‘이 공 어떻게 해요?’ ‘이 공 왜 나한테 보냈어요?’ 라고...
최대한 좋게 봤을 때 너 나름의 애교떨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애교란게 상대한테 귀엽게 보여야 되잖아.
귀염을 떨어서 기분좋게 만들어야 애굔데, 그 방법은 아니야! 제발 새로운 애교를 개발해 줘~~~!!!
말을 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표현하는데 문제는 없어야 해.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상대와 통할 수 없고, 상대와 통하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어.
사람들 사이에는 말이 있고, 우리는 그 말을 통해서 상대방과 만나는 거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
오늘은 우리집 최대의 명절, 결혼 기념일이야.
우리집 2대 명절 알지? 엄마 아빠 처음 만난 날과 결혼 기념일. 엄마 아빠가 만났기에 우리집의 역사가 시작됐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가족이 되었고 네가 태어날 수 있었지. 우리집에 이날보다 더 뜻깊은 날이 어디 있겠어?
아빠 욕심으로는 나라 전체를 공휴일로 정해서 축하하고 싶지만, 요즘 국가 경제가 좋지 않으니 그냥 우리끼리 기념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조촐하게!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관계가 있지만, 부부 사이는 가장 어려운 관계야. 오죽하면 ‘전생의 원수가 부부로 만난다’는 말이 있을까.
엄마 아빠가 결혼한지 이제 14주년... 원수는 벗어난 것 같고, 적어도 같은 배를 탄 동반자는 되지 않았나 싶어.
여전히 말이 필요한 사이니까 이심전심이 되려면 한참을 더 가야 할테지. 그렇게 가다보면 어느날인가는 하나되는 시간도 오지 않을까?
아빠에게, 엄마에게, 딸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시간이. 그냥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는 그런 시간이...
딸이 항상 사람들과 잘 통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