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3일 새벽. 한 사람이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구태여 수사를 덧붙이기 싫으므로 바로 이름을 말하겠다. 그는 바로 노무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노무현에 대해 말해 왔으므로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으련다.
나는 생전의 노무현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와 개인적 인연도 전혀 없고 실제로 잘 알지도 못한다. 내가 아는 노무현은 매스컴을 통해서 본 바와, 시중에 나와 있는 몇가지 책들을 통해 안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노무현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영화의 출발은 캐릭터이고, 노무현이라는 캐릭터는 그 어떤 영화의 주인공보다도 나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에게서는 사람냄새가 난다.
노무현에게서는 사람냄새가 난다. 그는 부족하면 부족한 채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결과에 책임을 진다. 불리하다고 물러서지 않으며, 힘들어도 돌아갈 줄을 모른다.
보통 말하는 ‘바보 노무현’은 그런 뜻이다.
여기 공개하는 시나리오는 2009년 5월 23일 새벽 유서를 작성한 시간인 5시 21분부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사망한 6시 40분경까지의 시간 79분 동안 인간 노무현의 심상을 함께해본 것이다.
작품 속의 여러 에피소드는, 노무현 전기 <운명이다>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착안한 것이지만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 언급되는 실제인물들도 역시 허구이다.
노무현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몇개의 노래에 담아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이렇게나마 외롭고 힘들었을 그의 마지막 79분을 동행하고 싶었다.
2019년이면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주년이 된다.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노무현을 생각하면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시 살아난다. 이상한 일이다.
작열하는 태양. 갑자기 화면이 프리즈되더니 강제로 태양을 되돌린다.
안간힘을 다해 시간을 되돌리는 느낌으로 태양이 천천히 되돌아가더니 산 너머로 사라진다.
다시 어두워지는 하늘. 어두운 화면에 메인타이틀.
어두운 화면. 여명이 밝아오며 청명한 하늘이 나타난다.
컴퓨터 타이핑 소리가 들리고, 이어 태인의 목소리가 시작된다.
태인(소리)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낭독을 하듯, 크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유서를 읽어내는 태인.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창문을 통해 실내로 들어오는 카메라. 창밖으로 여명의 하늘이 보인다.
이어 차례로 보여지는 사진들. 태인과 아내 정희가 환하게 웃는 사진부터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 퇴임 후 시민들과 찍은 사진, 손녀와 자전거 타는 사진들이 보여진다.
태인(소리)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컴퓨터 모니터의 불빛만이 방안을 비추고 있다. 또박또박,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태인의 뒷모습.
태인(소리)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쓰기를 마치고, 잠시 저장을 망설이는 태인. 결심이 선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장하고 컴퓨터를 끈다.
일어서서 외투를 챙겨 입고 서재를 나가는 태인.
부감. 서재를 나오는 태인.
산만하게 한눈을 팔며 나오다가 뭔가에 걸려 비틀거린다.
어둠 속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얼른 태인을 붙잡아 일으킨다.
태인 아.. 이거!
태인이 바닥에 뒹굴던 장남감을 집어 들고 멋쩍에 웃는다.
태인 애들 키울 땐 바닥을 보고 다녀야 되는데... 아직도 멀리 보는 게 습관이 돼가...
혼잣말처럼 하다가 남자를 빤히 쳐다보는 태인.
태인 그런데, 뉘신지...?
남자 모시러 왔습니다.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젊은 남자, 저승사자다.
의외인 듯 잠시 동작을 멈추고 남자를 보던 태인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태인 아... 그러니까... 저승사자! 그렇지요? 가십시다!
앞장서서 현관문 쪽으로 가는 태인. 저승사자가 얼른 앞서가더니 현관문을 연다.
휘잉~~! 바람이 불어 문을 나서는 태인의 머리카락을 날린다.
석양이 물든 하늘 앞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
갓 제대한 까까머리의 태인과 단발머리의 정희가 지는 해를 보며 나란히 엎드려있다.
정희는 미소를 지으며 노을을 보고 있고, 태인은 그런 정희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정희가 멋쩍어하며,
정희 해지는 거 보자 해놓고, 노을은 안보고 와 날 보노?
태인 노을이 예쁜 줄 알았는데, 니가 더 예쁘네!. 난 예쁜 거만 본다.
정희 지랄!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네…….
태인 진짜다! 내, 말은 좀 막해도 거짓말은 안한다. 특히 니한테는 순수 그 자체다.
정희 본인이 말 막하는거 알기는 아는갑네..? 사람들이, 혼자 똑똑한 체 버릇없다고 욕한다.
태인 안다. 그래도, 아닌건 아닌거다. 니도 내가 버릇없다고 생각하나?
정희 그렇진 안 해도, 니 화나면 앞뒤 없다. 소리지르고 그러잖아?
태인 알았다. 안 그럴게... 됐나?
정희 뭐가?
태인 소리 안 지른다고. 소리 안지를테니 우리 결혼하자.
정희 진짜 지랄한다! 우리 아직 어리다. 돈도 못 벌고.
태인 약속은 할 수 있는 기지. 내, 니 호강시켜줄 기다. 결혼하자 우리.
정희 치아라! 해지는 기나 봐라. 참 예쁘네...!
태인 니가 내 태양이다. 태양신 숭배하듯이, 내는 니 숭배하고 모시면서 살기다. 돈 많이 벌어서 니 호강시켜 줄기다. 결혼하자!
정희 알았다. 이제 고마해라.
태인 결혼하는 기다 우리?
정희 니 그거 아나? 해가 질 때, 무슨 색깔이 젤 나중까지 남는지? 빨주노초파남보...
태인 빨강은 아닌거 같고... 뽀라 아닌가?
정희 마지막까지 남은 그 색을 보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태인 정말이가? 그럼 내 당장 기도한다. 자 보자...!
태양이 산과 강이 있는 풍경 너머로 사라진다.
태인이 의기양양해져서,
태인 됐다! 소원 기도했다. 우리 결혼...
정희 뭐 봤는데? 마지막 남은 색깔이 뭐드노?
태인 보라색이다. 진한 보라색.
정희 아이고!
정희가 하늘을 보며 돌아눕는다.
태인 와? 틀맀나?
정희 우리 망했다...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보나? 그라고 우찌 내를 책임진다 하노? (울상이 되며)녹색이다.
태인 내일 또 보자. 낼은 꼭 볼게. 됐지?
정희 되긴 뭐가 됐노? 우린 망했다... 소원 깨졌다.
태인 희야...
정희 와?
태인 너 지금 되게 이쁘다. 뽀뽀해도 되나?
정희 ...?
정희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태인을 등지고 돌아누우며,
정희 니 미쳤는갑다...
태인 맞다. 니가 너무 좋아서 내 미쳤다... 우리 뽀뽀하자!
정희 바보! 니는 바보다...!
태인 아니다. 내는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싸움도 잘하고, 똑똑하다.
정희 그럼 뭐하노? 바본데... 이 바보야. 그런 건 말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도둑질하듯이...
와락! 태인의 입술이 정희의 말을 막는다.
크게 눈을 떴다가 살며시 눈을 감는 정희.
황혼이 저무는 들판.
태인과 저승사자가 집을 나와 산 쪽으로 간다.
태인의 약간 뒤에서 따라가는 저승사자.
태인이 잠시 벌판 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저승사자를 돌아보며,
태인 저기서 우리가 처음 키스했어요. 군대 막 제대해 갖고... 지금 나이가 얼마나 됩니까?
저승사자 (웃으며)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태인 젊다는 건 정말 좋지요? 돌이켜보면, 젊을 때가 젤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승사자 예를 들면...?
태인 다시 돌아간다면, 실컷 연애 좀 할 거 같애요. 바람둥이 돼갖고... 내가 바보처럼, 한 여자밖에 사랑을 못했어. 평생 한 사람밖에...
저승사자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은 그게 진심인줄 압니다. 그래서 구설수에 많이 오르셨잖아요?
태인 맞습니다! 맞고요... 내가 점잔하지를 못해가 말을 좀 막합니다. 못됐지요.
저승사자 맑으신 거지요. 마음속 깊은, 사소한 것까지 다 보이는 맑은 마음... 아마 다들 그리워하게 될 겁니다. 틀림없이!
태인이 다시 벌판 쪽을 보면 그 자리에 피아노가 있다. 피아노 앞에 서 있는 남자, 손석희(와 똑같이 분장한 연기자)이다.
태인과 눈이 마주치자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는 손석희.
멀리 보이는 그의 모습에 짧은 자막.
자막 그 그리워하는 마음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손석희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김건모의 <미련>이다.
노래(가사) 그대가 나를 떠나고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밤을 숨죽여 살아왔는지
오늘도 비는 내려와
젖어드는 너의 생각에
아무 소용없는 기다림이 부담스러워
보고 싶어서
눈을 뜰 수가 없어
살아있는 순간조차 힘겨우니까
듣고 있던 태인이 길을 재촉한다.
태인 우린... 가야지요?
저승자사 괜찮습니다. 편하게 맘껏 보고 가세요. 시간 많습니다!
태인 그래도 가야지요! 멈추면, 미련이 생겨. 미련을 버려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
태인과 정희가 첫 키스를 하던 들판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손석희.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 대목에서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진다.
하나는 <미련>이라는 김건모의 노래에 대한 오마주. 얼마나 원곡의 감성을 김건모보다 더 극대화시켜 표현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동작이나 표정이 약간 과장될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손석희에 대한 인물 패러디. 얼마나 진짜 손석희보다 더 손석희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포인트는 앞으로 나오는 모든 커버 뮤직에 모두 해당한다.)
노래(가사) 이젠 버릴 수도 없어
널 그리는 습관들
나 그만 지쳐 잠들 것같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위안도 하지만
버리고 버려도 끝이 없는 너의 그리움~~~
노래하는 손석희를 지나 걸음을 옮기는 태인의 뒤로 들려오는 소리.
태인의 어머니(소리) 이 결혼은 안되는 기다. 포기해라!
태인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노래를 마치고 피아노 앞에서 일어서는 손석희.
그 조금 너머로 낡은 집 한 채가 있다. 태인의 어릴 적 살던 집이다.
태인(소리) 어무니. 델꼬 살건 낸데, 와 엄니가 안 된다 캐요?
어머니(소리) 세상 널린 게 가시난데, 와 하필 정희고? 연애하는 거 하고 결혼은 다르다...
태인(소리) 하필 정희가 아니라, 기필코 정희하고 할 깁니더. 그리 아이소!
버럭! 문이 열리고 머리가 제법 긴 청년 태인이 나온다.
급히 따라 나와 태인을 끌고 들어가는 태인의 작은형 칠인.
칠인 임마야! 성질 좀 죽이라... 대화를 해야지 대화를...
들어가며 뒤를 돌아보던 칠인이 밖에서 쳐다보는 현재의 태인과 눈이 마주친다.
잠시 멈칫 하다가 문을 닫는 칠인.
태인이 옛 생각이 나는 듯 미소를 짓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