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방안.
태인의 아버지는 등잔불 앞에서 신문을 펴고 있고, 방의 중심에 어머니가 앉아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방관자처럼 보고 있는 큰형 상인.태인을 끌어 앉히며,
칠인; 엄니 말이 틀린 것도 아니야. 니 고시만 되봐라, 가시나들 줄로 선다...
태인; 가시나 필요없다잖아. 내는 정희만 있으면 된다니까.
어머니; 고시공부하는 놈이 그래 법을 몰라 우야노? 장인이 공산당 했는데, 판검사 할 수 있나? 세상을 알아야지 세상을...
칠인; 엄니. 연좌제는 폐지돼가 그건 상관없어요.
어머니; 모르는 소리 마라! 상관없긴 뭐가 없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김대중씨 봐라. 사람이 암만 똑똑하면 뭐하노? 우리나라에선 빨갱 이 빨 자만 비춰도 망하는 거야.
태인; 내는 안 망할 자신 있으니 걱정 마이소!
어머니; 지랄한다! 김대중처럼 똑똑한 사람도 안 되는데...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칠인; 그건 아니고. 김대중은 부정선거 땜에 졌어요. 박정희가 노골적으로 불법...
상인; (갑자기 끼어든다)거 다 핑계야! 싸움은 이기고 봐야지. 비겁한 변 명이라고.
칠인; 박정희가 뭔가 큰 걸 터뜨린다는데? 확! 한방에 휘어잡으려고.
어머니; 씰데없는 소리! 너거들도 엄한 생각 말고, 그냥 갈대처럼 살아야 돼. 바람 부는 대로, 이리 불면 이리 눕고, 저리 불면 저리 눕고...
아버지가 못마땅한 기침을 하며 신문을 뒤적이자 등잔불이 꺼진다.
불 꺼진 김에 벽을 보고 누워버리는 아버지.
어머니; 너거들, 버티고 반항하는 게 멋있어 보이지? 다 일없다. 젤로 중요한기 먹고 사는 기다. 딱 하나만 생각하면 돼. 어떻게 해 야 잘 먹고 잘 살긴가... 그 생각만 해야 돼. 그라믄 절로 답이 나와. 결혼도 똑같애. 알았제? 막내야, 엄마 말 무신 말인지 알제?
태인; 엄니! 엄니는 참말로 내가 고시 될 거라고 생각하나? 그래 믿나?
어머니; 믿고말고! 우리 막둥이... 니는 될애다!
태인;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왔는데? 서울대 나와도 안되는 게 고시다.
어머니; 서울대 일없다. 니가 부잣집에서 났으면 서울대 아니라 하와이대도 갔을 기다.
칠인; 하와이대 아니고 하버드.
태인; 엄마는 진짜 내를 그렇게 믿나?
어머니; 당연하지!
태인; 그라모 장가가는 것도 날 믿어도. 잘 살게. 자신 있다!
어머니; 그기는 다른 문제다.
태인; 어차피 할 결혼이다. 엄니 나 모르나? 내는 한다면 한다. 세상 두 쪽 나도 내는 정희하고 결혼할 기다. 허락해 도.
어머니; 막둥아. 물 흐르듯 사는 기야. 사소한 거에 목숨 걸지 말고.
태인; 사소한 거 아니다. 정희는 내 전부다. 내 생명이고 내 우주다!
칠인; 오호!
어머니; 아주 지랄발광 쇼쇼쇼를 한다...! 꺼져버려!!
소리 지르는 어머니.
상인과 아버지가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침통한 표정의 태인.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가 중얼거리듯 내뱉는다.
태인; 니하고 결혼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 그냥, 같이 죽어삐까?
(다른 톤으로)내를 낳아준 엄마를 버릴 순 엄따. 니가 이해해도.
(또 다른 톤으로)희야 넌 아무 잘못 엄따. 우리 엄마도 잘못 엄따. 다 내 잘못이다...
돈 많이 벌어가 큰 선물을 왕창 줄라 했는데 미안하다... 나를 원망해라.
말을 마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태인. 혼자다. (짧은 DIS)
태인 옆에 살짝 외면하고 정희가 앉아 있다. (짧은 DIS)
정희가 갑자기 일어나 급하게 달려간다. 얼른 따라가 정희의 팔을 잡는 태인.
정희; (화난 표정으로)놔라! 이제 우리 만날 일 없다...
태인; 왜 이러는데? 내가 뭐 잘못했노?
정희; 니 잘못한 거 엄따. 그러니까 이러지 마라. 나 가봐야 된다.
태인; 그냥 상황설명을 한 기야. 별거 아니라고.
정희;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하자고.
태인; 쫌! 남자가 잘난 체 좀 한기다... 이래 어렵게 해낸다 그러는 거야.
정희; 그럼 나는? 니는 어렵고 내는 뭐 쉬운 줄 아나? 내도 힘들다고. 니는 니 생각만 하잖아.
태인; 아니다. 내는 내 생각 안한다. 니 생각만 한다...
정희; 내도 힘들다고. 상업고등학교 나온 가난뱅이 실업자한테 시집가는거... 힘들다고.
태인 말은 똑바로 하자. 실업자 아이다. 고시생이다.
정희; 잘난 고시생 혼자 마이 해라... 인자 내는 안한다.
태인; 참말이가?
정희; 그렇다니까.
태인; ...
태인이 잠시 정희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태인; 그래, 알았다! 그만하자.
정희 (놀란다)...?
태인; 내 쌈 잘하는 거 니도 알지? 내가 덩치는 쫌매도 독종이라 절대 그냥 안 진다. 니도 알제?
정희; 그라거나 말거나...
태인; 근데 니는 내가 몬이긴다. 힘이 엄써서 몬이기는게 아니라 이길 수가 엄따. 왠지 아나?
정희; 됐다고. 인자 싸울 일도 엄따...
태인; 내 잘못했다. 앞으로 니한테 힘들단 소리 안할게. 용서해 도...
휘익- 바람이 불어와 정희의 머리카락을 날린다.
태인이 몸으로 바람을 막는다.
태인을 등지고 외면하는 정희.
정희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태인이 한껏 분위기를 잡는 목소리로,
태인; 니 그거 아나? 니는 귀가 젤로 예쁘다... 아무한테나 보여주지 마라. 내만 볼끼다.
정희; ...
정희가 얼른 머리를 쓰다듬어 귀를 가린다.
살며시 정희를 껴안는 태인.
태인 니는 내 우주다. 내 하늘이고, 바람이고, 별이고 시다...
태인의 속삭임에 정희가 반색하며 돌아선다.
정희; 니...! 윤동주 시, 외우라캤더니 정말 외왔나?
태인; (으쓱하며)당연하지! 내 언제 니 말 안듣는거 봤나? 난 니가 하라는건 다 한다 뭐든지.
정희; 남자도 시 한두 개는 외와야 멋진 거야. 한번 외와봐라. 정말 외왔나 보고로...
태인; 외웠다니까! 내 고시생이다. 머리 좋다.
정희; 그래. 머리 좋은 고시생, 시 외는 거 한번 보자! 해봐라!
태인; 서시!
정희; 그거 아니고, 서-! 시.
태인; 서- 시!
정희; 목소리 좋네!
태인; (다시 한 번)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정희; 멋지다! 우리 권태인, 멋지네~~!
정희가 환하게 웃으며 태인을 껴안는다. 괜히 으쓱해져서 무게를 잡는 태인.
들국화 헌정앨범에 수록된, 렐리쉬의 <너는> 노래가 시작된다.
노래(가사) 너는 행복한 울타리 속에
귀여운 새로 자랐겠지
사랑에 겨워 너는 날아다니는구나
내 정열은 아랑곳없이
두 사람의 모습을 아래로 새처럼 날아오르는 카메라. 아래쪽의 강가로 가면 그 곳에서 록밴드가 노래에 맞춰 연주를 하고 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강금실(과 똑같이 분장한 배우. 이하 모두 같음)이고, 문성근과 이창동이 기타를 치고, 명계남이 키보드를, 한명숙이 드럼을 친다.
언덕을 오르려다가 멈추고 멀리 록밴드의 연주를 쳐다보는 현재의 태인.
저승사자는 조금 떨어져 태인을 보며 서있고, 그 반대편에 피아노 치며 노래하던 손석희가 두 사람을 따라오고 있다.
노래(가사) 날아가~ 가~ (반복)
너는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겠지
노래를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태인. 저승사자와 손석희가 그 뒤를 따른다.
카메라는 노래를 따라 하늘로 날아가며 태인 일행을 비추다가 훌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