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물장어의 꿈③
-<주문>(동방신기)

by 천하태평


8. 광안리 바닷가(1980년 무렵) /저녁


갈매기가 보이고, 넓은 바다를 가르는 2인용 요트가 나타난다. 그 뒤로 다른 요트가 보이고, 그 위에 30대의 태인이 바람을 맞으며 조종을 하는 게 보인다. 뭐라고 큰소리로 주고받으며 요트를 운전하는 태인.



9. 바닷가 요트 정박장 /저녁

요트를 정박시키고 있는 태인.


동료; 와~~! 권 변호사님 정말 힘 좋으시네! 그 바람을 그냥 받으면서 가시잖아?

태인; 요트가 뭐 힘으로 탑니까? 그냥 흘러가는 기지... 바람의 힘을 받아서 가는 깁니다.

아! 기분 좋다~~!!! 이렇게 힘 한번 쭉 빼 주고 나면 새 힘이 솟구쳐요. 새살 돋는 것처럼...


온통 젖고 탈진한 모습. 그러나 한껏 기분이 좋아 보인다.


10. 근처 백사장 /저녁


활짝 웃으며 걸어오는 태인.

바닷가에서 놀고 있던 아들 경수(8세)가 태인을 발견하고 달려온다.


경수; 아빠!

태인; 아들!


번쩍, 경수를 껴안고 들어 올리는 태인.

딸 경미(6세)도 달려오며 소리 지른다.


경미; 아빠! 나도!

태인; 우리 공주님! 잘 놀았어?


태인이 양 팔에 아들딸을 안고 걸어온다.

돗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보며 웃는 정희.


정희; 경수야! 내려와라. 너 인제 무거워가 아빠 힘들다!

태인; 괘않다! 배 타는 거에 비하믄 하나도 안 힘들다. 아이고!


태인이 돗자리에 와서 벌러덩 드러눕는다.


정희; 이게 뭐야? 모래도 안 털고... 하이고. 내가 못살아.


경수가 바닷물 쪽으로 가자 경미도 따라간다.

돗자리에 누워 크게 소리 지르는 태인.


태인; 아! 개운하다. 기분 좋~~다!

정희; 참 이해가 안 돼... 그렇게 일부러 힘 빼놓고 좋다 하니...

당신 취미 가 요트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아나? 와! 부자네 그런다.

그 왜 있잖아, 영화에 나오는 그런 밴 줄 아는 기야.

태인; 그건 부르주아들 취미고. 이건 거친 남자들의 스포츠다, 스포츠...

꼭 얘기해주라. 쬐만한 돛단배 타는 억수로 힘든 스포츠라고.

정희; 변호사 해가 떼돈 버는 줄 안다니까.

태인; 그래! 떼돈은 아니어도 좀 벌어보자고. 돈 벌어가, 쬐만한 농장이나 별장도 하나 사고,

경수 경미 유학도 좀 보내고. 우리 돈 없어가 못 배운 거 한도 좀 풀어보자!

정희; 술술 읊어대는 기 돈 벌 자신 있는 갑네?

태인; 자신보다도... 방법이 있어야 된다. 돈은 길목을 잘 지키면 돼. 그럼 돈이 들어온다.

배 타는 거랑 똑같애. 배는 바람만 잘 타면 그냥 가거덩? 돈은 돈길만 지키고 있으면 저절로 들어와.

정희; 그걸 우예 아노? 돈길인지 아닌지...


정희가 말을 멈추고 다가오는 사람을 쳐다본다.

아예 눈을 감고 기분 좋게 소리 지르는 태인.


태인; 그게 기술이지! 내가 조세 전문 변호사 아니가? 돈길은 내가 잘 알지.

정희; 경수 아빠...


정희가 태인을 슬쩍 흔든다. 눈을 뜨는 태인.

허름한 복장의 아줌마가 태인을 보며 서 있다. 태인이 몸을 일으키며,


태인; 아니, 아주머니. 어제 다 말씀드렸는데, 여기까지 쫓아오시면 어떡해요?

아줌마; 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안되겠심더. 내 돈 돌려 주이소.

태인; 얘기했잖아요. 거래가 끝난 거라고. 알아듣기 말씀드렸는데... 이리 오세요.


태인이 일어나 아줌마를 데리고 멀리 간다.

다소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보다가 경수와 경미에게 시선을 돌리는 정희.

태인이 조곤조곤 아줌마에게 설명을 한다.


태인; 법이 그렇게 돼가 있습니다.

계약을 하고, 변호사가 피해자 접견을 하면 일을 시작한 거가 돼서 수임료 반환이 안돼요.

아줌마; 담날 바로 합의를 했잖아요. 그리고 그 돈... 빌린 돈입니더! 급전 물고 갚아야 되는 돈이라고요.

태인; 그건 아주머니 사정이고... 변호사가 법을 어길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줌마; 안됩니더. 돌려 주이소!

태인;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이렇게 막 찾아오고 그러지 마세요. 우리 아이들도 있고 한데...

아줌마;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요!


갑자기 아줌마가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아줌마; 남편 살려낼라고 허겁지겁 마련한 돈입니다.

변호사님... 사람 하나 살려주는 셈 치고, 제발 돈 돌려 주이소.


태인이 고개를 돌려 정희 쪽을 돌아본다.

경수 경미와 나란히 서서 쳐다보고 있던 정희가 얼른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가린다.


태인; 자... 일어나시고요. 딱한 사정 이해합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되는 겁니다.


태인이 아줌마를 잡아 일으킨다.

간절한 눈빛으로 태인을 바라보는 아줌마.


태인; 혹시 법적으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제가 전문가니까요, 얼마든지 도와드리께요.

아줌마; 대단하시네요!

태인; 예...??

아줌마; 변호사들... 본래 이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 무식한 사람 등쳐먹고...

태인; 무슨...? 말씀이 좀...

아줌마; 그래 사는 거 아닙니더. 세상 부끄러운 줄 아이소!


홱, 돌아서 가버리는 아줌마.

멍하니 바라보던 태인이 문득 고개를 돌려 정희 쪽을 바라본다.

나란히 서서 똑바로 태인을 보고 있는 정희와 경수, 경미.

태인이 어쩔 바를 모르고 서 있다.



11. 태인의 아파트 침실 /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자고 있는 태인과 정희.

태인이 갑자기 몸을 뒤틀더니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태인.

정희가 놀라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앰뷸런스 소리가 들린다.



12. 병원 응급실 안 /밤


앰뷸런스 소리가 계속되면서 초점 흐릿한 전등 불빛이 오락가락한다.

들려오는 정희 목소리.


정희(소리); 선생님! 우째... 괜찮습니까?

의사(소리); 예, 걱정 마세요. 곧 좋아지실 거구요.

정희(소리); 뭐, 큰 병은 아니지요?

의사(소리); 쇼크예요, 스트레스성 쇼크...

정희(소리); 스트레스요? 뭔 스트레스를 그리 받아쓰까요?

의사(소리); 그거야 저흰 모르죠.


전등 불빛이 또렷해지며 태인의 정신도 정상으로 돌아온다.

정희와 의사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는 태인.


정희; 스트레스 받는다고 매번 이래 난리 치면 우째요? 어떻게 해야 돼요?

의사; 비위가 심하게 상했을 수 있어요. 왜, 배알이 꼴린다고 하잖아요?

안 그러면 되지만, 쉽지 않죠. 성질이 있으시니까.


듣고 있던 태인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태인; 거, 뭔 소리를 그렇게 해요? 의사가...

의사 어? 깨나셨네! 그냥, 농담예요. 이런 적 처음 아니시죠?

태인; 뭐, 몇 번...

의사; 착하셔서 그래요. 성질을 부려야 되는데, 참으니까 속이 뒤틀리는 거죠.

정 아프시면 오늘처럼 응급실 오세요.

정희; 성질 못된 병이란 거잖아요? 거, 희한한 병이네...

태인; 이 양반이... 젊은 의사분이 말을 너무 막 하시네.

정희; 사실 말이야 맞는 말이지.

태인; 뭐가 맞아? 맞다 쳐도... 맞는 얘기를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나?

의사; 시작을 잘 보셔야 돼요. 감정의 시작은 부끄러움이거든요? 부끄러울 때, 그걸 피하지 마시고 정면으로 부딪쳐야 돼요. 긍정적으로... 그럼 거기 맞는 행동이 나오죠.

태인; ...


의사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말하자 태인이 놀란 얼굴로 쳐다본다.

가만히 보니 의사의 얼굴 생김새가 저승사자와 똑같다.



13. 태인의 사저 근처(현재) /새벽


저승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태인. 저승사자가 웃는다.


저승사자; 그렇게 보시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인; (웃으며)그때는 몰랐어요! 부끄러움을 긍정해라... 행동해라...

이제 알겠어요. 무슨 뜻인지 알기는 알겠는데... 긍정이 안돼요! 긍정이.

저승사자; 부정적인걸 보셨잖아요. 그런 만큼 긍정하고 사신 거예요. 이젠 전 같은 복통 없으시잖아요?

태인; 아, 그래요! 언제부턴가... 아마, 정치 시작하면서부터? 그쯤부터 아픈 게 없어진 거 같애...

저승사자; 부끄러움과 연민은 선생님을 이끌어온 두 동력이죠.

부끄러움은 선생님 자신의 것이고, 연민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것. 긍정적으로 사신 거예요.


태인이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미소 짓는다.


태인; 난 내가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열등감, 모욕감, 자존심, 분노... 그런 것 땜에 많이 괴로웠거든.

저승사자; 그걸 잘 푸셨잖아요. 불의에 대한 분노로... 성공하신 거죠.

태인;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또 갑시다! 아~~ 기분 좋다!!


앞장서서 걸으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 태인.(이 장면은 다큐멘터리 <노무현이다>의 마지막 장면과 똑같이 하면 된다.)

저승사자가 곁을 지키고, <미련>을 노래한 손석희와 <너는>을 연주한 강금실, 문성근, 이창동, 명계남, 한명숙이 태인의 뒤를 따른다.



14. 붉은 방 /밤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가 바지를 걷어 올리자 온통 시퍼렇게 멍든 다리가 보인다.

자리에 앉아있던 태인이 놀라 다가가 살펴본다.


태인; 이거... 맞은 거요?

노동자; 축하한다고..

태인; 축하요? 뭘 축하해요?

노동자; 조합장 축하한다고... 제가 이번에 노조 조합장 됐심더.

태인; 조합장 됐다고 이리 맞았다는 거예요? 회사에서 때렸어요?

노동자; 회사가 아니라 파견대장이...

태인; 파견대장이 조합장을 왜 때려요?

노동자; 그래서 사표냈심더. 겁이 나가 도저히 못 다니겠어요.

태인; 그러면 안 되지요! 잘못은 그 사람이 했는데, 와 당신이 그만둬요?

노동자;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조합장도 이래 우습게 아는데...

태인; 조합장 아니라 조합장 똘마니라도 이런 취급받으면 안 됩니다. 그게 법이에요.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보안대 간부(소리); 그렇게 책에 있는 얘기 말고, 현실 얘기로 하자니까!


돌아보는 태인. 방의 반대쪽에 검은 안경을 쓴 보안대 간부가 책상에 걸터앉아 소리 지른다.

(이건 심리적 공간 연결이므로 앞부분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간부; 쥐새끼 잡다가 실수로 좀 부서질 수도 있지. 깡패 잡다가 상처 좀 냈다고 형사보고 책임지라고 그러면... 나라는 누가 지키냐고! 우리... 상식대로 합시다!

태인; 나라는 알아서 지키시고. 내는 변호사니까, 법대로 합니다.

간부; 법이 뭔데? 국민을 지키는 기 법 아니요?

태인; 최소한 먹고 살 권리는 지키고 살자고 하는 깁니다.

간부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다른 일을 해도, 밥그릇 뺐지는 말아얄거 아뇨? 구제신청 취소합시다.

태인; 그리 몬합니다.

간부; 권변호사땜에 그 사람 옷 벗게 생겼어요. 식구가 여섯인데... 불쌍하지 않아요?

태인; 불쌍합니다.

간부; 그러니까!

태인; 다 불쌍하지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다 불쌍합니다. 변호사 하면서 배운 게 뭔지 압니까?

정의의 여신이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 왜 안대를 하는지 확실히 알았어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다 불쌍하니까, 그래가 눈을 가리는 겁니다. 법만 본다는 거지요. 법대로 합시다!

간부; 죽는 길인 줄도 모르고... 한번 해보자는 거지요?

태인; (욱! 하는 기분을 참아내며)내,,, 피하지는 않을랍니다!


해볼 테면 해보세요 하는 담담한 태인의 표정 위로 결의에 찬 태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태인(소리);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네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내리네...



15. 부산 거리 /낮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등의 구호가 보이고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진군한다.


태인(소리);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가누나...


행진이 멈춰진다. 멀리 대규모 진압 전투경찰 대열이 보이고, 최루탄 발사대가 위협적으로 노려보고 있다.

선두가 머뭇거리자 앞으로 나서는 태인, 경찰들을 향해 소리 지른다. 그 모습 위로 태인의 목소리가 계속된다.


태인(소리); 아~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싸워나가리


‘당장 해산하라’ ‘불법시위자는 모두 체포 엄단하겠다’는 등의 경고방송을 하는 경찰.

태인은 시위대에게 선동을 계속한다.


태인(소리);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타타타타...! 최루탄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시위대가 무너진다.

제일 앞에서 꼼짝도 않고 최루탄을 받아들이는 태인.

몽둥이를 든 전투경찰들이 달려온다. 정지하는 화면.



16. 대공 분실 감방 /밤


음침한 방안. 탈진해 벽에 기대어 있던 태인이 중얼거리듯 노래를 시작한다.

아까 들었던 가사의 노래 ‘어머니’를 부른다.


태인;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내리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가누나

아~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싸워나가리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을 위해


복잡한 감정의 태인.

덜커덩! 문이 열리고 요원이 태인을 손짓해 부른다.



17. 대공 분실 복도 /밤


방을 나와 음산한 분위기의 복도를 걸어 나가는 태인.



18. 대공 분실 사무실


앞 장면에서 본 보안대 간부가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아 태인에게 한마디 한다.


간부; 앞으로... 다신 만나지 맙시다! 그땐 그냥 못 나가.


태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려다가 멈춰서 돌아본다.

약간 반항적으로 건들거리며 간부 앞으로 다가가는 태인.

의외의 태도에 간부가 긴장하며 발을 내린다.

간부의 얼굴 앞으로 가까이 몸을 숙이며,


태인; 아니지요! 또 만나야지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에서! 그렇지요?


잔뜩 전의를 드러내며 웃어 보이는 태인. 밖에서 동료 변호사 노기철(문재인)이 쳐다보고 있다.



19. 대공 분실 앞 /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정희를 보고 태인이 멋쩍게 웃는다.


태인; 여긴 뭐 하러 와... 애들은 어떡하고?

정희; 애들 걱정하는 사람이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어데 다친 데는 없어요?

태인; 엄따. 내한테 함부로 몬한다. 뭐하러 왔노? 미안하게...


태인이 힐난하는 눈초리로 기철을 본다. 왜 데려왔느냐는 표정.

사람 좋은 웃음을 웃어 보이는 기철.


기철; 죄송합니다!

정희; 당신 잡아갈라꼬 내가 고집부렸다... 아니면 또 딴 데로 갈 거 아니가?

태인; 딴 데는 무슨... 내 몸은 딴 데 있어도 맘은 항상 집에 있다. 당신 곁에. 그거 알아도.

정희; 됐고! 가입시더.


정희가 기철에게 말하며 걸음을 옮긴다.


태인; 잠깐! 이래 어렵게 만났는데 그냥 가면 우야노?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정희와 기철.


태인; 이리 온나. 한번 안아보자!

정희; 이 양반이... 당신, 감방 갔다 오더니 미쳤는갑네!

태인; 어데? 당신 보고싶어가 죽을 뻔했구만.


기철이 짐짓 모른 체하며 운전석에 오른다.

정희를 보고 웃는 태인.


태인; 자! 아무도 엄따. 어서 이리 온나!

정희; ...!


태인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추고 잠시 망설이는 정희.

슬며시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는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성큼성큼 다가가 정희를 안는 태인.



20. 칼국수집 /낮


깔끔한 칼국수 두 그릇.


김총재; 권변 얘기를 많이 들어서, 내 한번 보자 했어요. ...듭시다!

태인; 예. 잘 먹겠습니다.


야당 총재인 김총재와 태인이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한다.

햇살이 잘 드는 전망 좋은 방.

칼국수 한 그릇을 다 먹을 동안 두 사람 아무 말이 없다.

태인이 가끔 김총재의 눈치를 살피지만, 김총재는 전혀 반응을 안 보이고 먹기만 한다.

끄윽- 트림을 하는 김총재.

그 소리에 태인이 젓가락을 놓는다.


김총재; 권 변호사. 세상이 맘에 안 들지요?

태인; 예. 첨엔 몰랐는데, 알면 알수록 그리 되네요.

김총재; 여자 같지. 너무 자세히 보면 피곤해. 대강 맞춰 살아야지.

태인; 그건... 그건 전 생각이 다릅니다.

김총재 (순순히 긍정)그래요. 그럴 수 있지.


일어나는 김총재. 태인도 따라 일어난다.

김총재가 나가려다가 태인을 향해 돌아서며,


김총재; 나하고 정치해볼 생각 없어요?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보지.

태인; 저는 법은 잘 알지만도 정치는 하나도 모릅니다!

김총재; 해보세요. 내 도와줄게. 부산에서 적당한 데 골라봐요. 자신 있는 데로.

태인; 자신보다도... 한다면 허재수하고 붙어볼랍니다. 군부독재의 실세 아닙니까?

김총재; (피식 웃고는)권변. 정치는 현실이에요. 명분도 좋지만 일단 이기고 봐야 돼.

태인; 명분 없는 승리보다는, 그럴 바엔 명분 있는 패배를 선택하겠습니다.

김총재; ...그래요! 하고 싶은 게 많지요?

태인; 예. 무엇보다 세상을 바꾸고 싶지요! 반칙 없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김총재; ...


김총재가 잠시 그 말을 새기는 듯하더니 심각하게 태인을 보고 얘기한다.


김총재; 그거 말야... 나도 꿔봤는데... 개꿈이야!


김총재가 껄껄 웃으며 태인의 어깨를 툭 친다.



21. 태인의 사저 근처(현재) /이른 아침


언덕 바위에 앉아 쉬며 미소를 짓는 태인.

옆에 서 있던 저승사자에게,


태인; 담배 있어요?

저승사자; 아뇨. 담배 안 피웁니다.

태인; 음... 그렇지요? 그게 맞는 거지! (짧은 한숨)어쨌든...

내 꿈도 개꿈이었던 거지요? 난 그때,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던 거였어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저승사자의 뒤로 손석희, 한명숙, 강금실, 문성근, 이창동, 명계남 등이 묵묵히 서 있다.

슬그머니 태인에게 다가가 담배를 건네주는 문성근.

태인이 환하게 웃으며 담배를 받아 든다.


태인; 저런 사람땜에! 수렁으로 떠미는 사람땜에...

내가 우리 마눌님 말을 잘 듣는 편인데, 대놓고 안 들은 게 몇 번 안돼요.

얼핏 생각나는 게 담배 끊는 거 하고 정치 시작한 거 정도?

대통령으로는 불량품이었는지 몰라도, 이 정도면 남편으로는 합격점 아닐까요?

저승사자; 저승에 들어가실 때 결산 점수를 매깁니다. 그중에 채점 예외 항목이 두 가지 있어요.

태인; 아! 그런 게 있습니까?

저승사자; 잘잘못을 가릴 수 없다는 거지요. 하나는 모든 싸움의 승패를 묻지 않는다는 거구요...

태인; 약자를 보호하자는 건가? ...좀 묘하네요?

저승사자; 또 하나는 부부간에 잘잘못을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웃으며)합격점 주신건 완전히 주관적 점수인 거지요!

태인; 논리적으로 보면 싸움하고 부부관계를 같은 개념으로 본다는 건데...

그건 좀 사리에 맞지 않는데요? 저승세계가 꼭 공정한 건 아니군요?

저승사자; 전혀 또는 완전히!

태인; 갑자기 힘이 나네요! 뭔가, 저승에 가도 뭔가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희망...??

저승사자; 저승을 사리에 맞게 고쳐보시게요? 하하하!!


함께 웃는 태인과 저승사자.



22. 태인의 아파트 거실 /아침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태인.

정희가 앞자리에 앉아 잔소리를 한다.


정희; 경수 아빠야. 내가 부탁하께... 제발 정치는 하지 마라. 그기는, 인권 변호사하고 또 다르다.

태인; 고마해라. 밥 좀 묵자.

정희; 내 언제 당신 하는 거 갖고 뭐라 하드나? 하지만도, 정치는 경우가 다르다.

정치하고 노름은 하면 안 된다. 패가망신한다...

태인; 무신 말인지 알았다. 알았고... 내 잘 할게.

정희; 뭘 잘 할긴데? 노동자들 돕자고 정치한다면서. 내도 노동자다 가사 노동자. 내 좀 도와도.

그라고... 당신은 정치하믄 안 되는 사람이야. 왠지 아나? 당신은 수가 너무 뻔해. 단순하단 말야. 무게 잡을 줄도 모르고...

태인; 일절만 하자. 애국가도 아니고.

정희; 정치인 해봐야 그거 껍데기다. 솔직히 권력은 돈하고 언론하고 검찰한테 있는기 아니가?

일개 국회의원이 무신 힘이 있노?

태인; 당신 말이 맞다. 다 맞는데... 내 한번 바꿔보께. 불공평하고 반칙이 난무하는 이 세상 바꿔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내 한번 만들어보께.

정희; 세상 그리 말랑말랑하지 않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야.

태인; 그거는...


태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탁! 숟가락을 놓고 일어난다.

자리에 앉은 채 태인을 바라보는 정희.


태인; 그건 우리 엄마 얘기고. 당신은 그래 말하지 마라.

계란은 깨져서 병아리가 되고 닭이 되지마는, 바위는 깨져서 흙이 되고 먼지가 된다. 그라고...


정희 옆으로 다가오는 태인.

태인; 세상 말랑말랑하지 않은 거 내도 안다. 옛날에 그거 외면하고 산기 부끄럽고, 모난 세상에 상처받는 사람들 보면 안됐다. 말랑말랑까지는 아니어도, 모난 거라도 쫌 뿌솨버리고 싶다. 내 꿈이다.

정희; (외면하며)참...! 피 끓는 청춘도 아니고.

태인; 우리 아 들... 경수 경미는 좀 나은 세상에서 살아야 안 되겠나? 자...


태인이 정희를 잡아 일으킨다.

살포시 감싸 안는 태인.


태인; 당신이 있어서 내가 있는 기다. 당신 없으면 내도 엄따... 당신이 내 쫌 도와줘.

정희; 내가 무신 힘이 있다고!

태인; 당신은 아무것도 할거 엄따. 당신은 그냥 있어만 주면 된다.

머슴이 일하지 언제 주인이 일하드나? 내는 당신 머슴이다...


두 사람 키스한다.



23.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낮


국회의원이 된 태인이 첫 대정부질문을 하고 있다.

국무총리 이하 모든 국무위원과 각 당 국회의원들이 참석해 태인에게 집중한다.


태인;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 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더 욕심을 부리자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태인이 말을 멈추고 회의장 안을 둘러본다.

이어 배경의 화면에 준비된 사진들이 차례차례 보여진다.

산업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재해를 입은 여러 사람들의 모습들.


태인; 문 광현 군입니다. 온도계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일을 시작한지 불과 두달만에 수은중독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중독 판정을 받고 석 달도 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열 다섯이었습니다.


태인이 일일이 그 사진을 설명한다.


태인; 현진 레이온 작업장에서 아황산 탄소에 노출되어 사지가 마비된 노동자입니다. 우리가 회사를 추궁해 직업병임을 인정받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합의서도 받았지만, 회사 측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저 사진의 어린 소녀는 저에게 매달려 아빠 좀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저 전신 마비된 노동자의 굳은 얼굴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도! 그들과 함께 울기는 했지만, 그밖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 정부가 이 사람들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돈벌이에만 급급하고, 노동자들의 생명과 복지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국무위원 여러분...!


잠시 숨을 고르던 태인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태인; 아직도 경제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국무총리를 가리키며 고함을 지르는 태인.


태인;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실내가 소란스러워지고, 국회의장이 품위를 지키라며 태인을 제지한다.

두 눈 부릅뜨고, 눈물 글썽거리며 소리 지르는 태인.

그 광경 위로 ‘동방신기’의 노래 <주문>이 시작된다.


노래(가사) 시작은 달콤하게 평범하게 나에게 끌려

언제나 그랬듯이 먼저 말을 걸어와

모든 가능성 열어둬 Oh-


연단에서 고함치기를 계속하는 태인.

마이크는 꺼지고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불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노래(가사) 사랑은 뭐다? 뭐다! 이미 수식어 Red ocean

난 breakin` my rules again 알잖아 지루한걸?

조금 다쳐도 넌 괜찮아 Oh-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어날 수 없어

I got you- Under my skin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넌 나의 노예

I got you- Under my skin


태인이 대정부질문을 하던 자리에서 양정철 전희철 등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국회의장 자리에서 의사봉을 들고 내려오는 다른 멤버 이호철.


노래(가사) 네 머릿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눈빛

나 아니고선 움직이지도 않는 Chrome heart

네가 선택한 길인걸 Oh-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수억 개의 나의 Crystal

마침내 시작된 변신의 끝은 나

이것도 사랑은 아닐까? Oh-


사진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있던 산재노동자와 딸도 함께 노래를 부른다.

사지마비를 풀고 일어나 함께 춤을 추는 남자와 딸.


노래(가사)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어 날수 없어

I got you- Under my skin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넌 나의 노예

I got you- Under my skin



24. 태인의 사저 근처 차밭 /이른 아침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이호철 양정철 전희철 김경수 윤태영.

손석희 등 앞에서 노래했던 사람들도 함께 춤추며 노래한다.

그 앞에 태인과 저승사자가 그 모습을 보며 서 있다.


노래(가사) 두 번의 키스 뜨겁게 터져버릴 것 같은 내 심장을

Yeah 너를 택했어 You know you got it

Yeah Come on Come on

I got you- Under my skin

네 꿈속에 난 널 지배하는 마법사

내 주문에 넌 다시 그려지고 있어

I got you- Under my skin

My devils ride 더는 숨을 곳이 없잖아

그렇다면 이젠 즐겨 보는 게 어떨까

I got you- Under my skin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헤어날 수 없어

I got you- Under my skin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넌 나의 노예

I got you- Under my skin


태인이 두 손을 모아 함께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다시 길을 떠나는 태인 일행. 그동안 노래를 했던 사람들이 함께하므로 제법 인원이 된다.

태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손에는 각각 노란 풍선 하나씩 들려있다.


( ---다음 편에 계속)

이전 02화<민물장어의 꿈>② -<너는>(렐리쉬. 원곡 들국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