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는 소형 아파트 전세를 삽니다. 물론 따로 집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집을 살 형편이 안되기도 했고, 애써 집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살 수 있겠지, 그냥 집 없이 살 수도 있다고 맘 편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조그만 집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 것 아냐?’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한 자식인 딸아이에게 최소한 집은 남겨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사실 저는 딸에게 무얼 물려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저 자신이 조금 놀라웠습니다. 대학까지 가르치면 부모가 할 의무는 끝이라는 게 제 평소 주관이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유산을 그것도 집을 물려준다는 생각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요.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유는 집값이 (아울러 전셋값도) 너무 비싸기 때문이었습니다.
딸아이가 능력이 부족해서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한다고 했을 때, 아무리 곤란해도 제 한 몸 먹고살 정도는 (열심히 하면) 벌 수 있으리라도 봅니다.
문제는 집이지요. 작고 누추한 집이라도 한 채 있으면, 그 다음은 정도껏 살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는 것만 해결되면, 그 다음 먹고 입는 것은 형편대로 맞춰 살면 되니까요.
먹고살기도 힘든데 누울 집조차 마땅히 없다면 너무 비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제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집값이(전셋값이) 정말 정말 너무너무 말도 안 되게 비싼 게 문젭니다!
지방은 좀 낫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되어있는 지금 현실에서, 가진 것 없고 능력 없는 사람이 서울을 박차고 떠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돈 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서울 근처에 있어야 합니다.
편지를 다시 보니 자연과 통하는 전원주택이 좋다고 말하고 있군요.
현실적으로 서울에 그런 주택을 갖고 살 수는 없을 테고, 그런 집을 갖는다면 서울을 벗어나야 합니다. 서울 집중의 현상에 저항해야 합니다.
저희 부부의 인생이야 이미 정해진 것이니, 앞으로의 문제는 딸아이의 선택입니다.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나의 원하는 바를 위해 과감한 저항을 시도할 것인가...?
저희가 물려줘야 할 것은 집이 아니라, 앞으로 미래에 대한 확실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이나마 거창하게 ‘위대한 유산’이라고 붙여가면서. ***
사랑하는 딸!
잘 지내고 있니? 벌써 몇 일째 아빠 없이 엄마하고 둘이 생활하는데, 어때? 지낼만해?
아빠가 없어서 더 편하다고는 말 안 하겠지? 아빠가 있다고 해서 너한테 불리한 건 사실 별로 없잖아. 어쩌다 한번 잔소리를 들을 순 있겠지만 그 정도야 뭐...
아빠는 잘 지내고 있어. 네가 모닝콜을 해줘서 금상첨화야. 하루를 네 목소리 들으며 시작하니까 한결 상쾌한 기분이 들고.(객지에서 외로울 때 그리운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는 달콤한 기분, 너는 모를 거야.)
집을 떠나 출장 나오면 사실 먹는 게 제일 문젠데, 이번에는 고모가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주니까 전혀 아쉬운 게 없어. 아주 좋아!
솔직히 말하면(엄마는 서운하다고 하겠지만...)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 너랑 엄마하고 떨어져 있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게 마음에 들어.
물론 여기가 고모집이어서 남의 집이라는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쨌든 아빠는 여기가 좋아. 이런 집에서 이렇게 살고 싶어.
일을 하다가 잠시 눈을 들어 창 밖을 보면 푸른 산 울창한 나무들이 보이지. 그리고 새들이 울고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고.
아빠는 그런 속에서 살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문득 아, 집이란 이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빌딩 숲 자동차 홍수를 피해 숨듯이 들어오는 닫힌 아파트 공간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하는 열린 공간이 집이로구나!
그냥 자연 속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 자연과 함께 하되 비를 피하고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 집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이 열려있다는 느낌, 자연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되게 소중한데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 모르겠네.
좋기는 정말 좋은데, 사람들한테 정말 좋은데...!
우리 아파트에서도 산이 보이지. 거실 밖으로 나무도 있고 또 새들도 울고 꽃도 펴.
하지만 그게 여기 고모 집하고 다른 점은, 우리 아파트의 자연은 그저 볼뿐이라는 거야.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단절되어 있는 단순한 구경거리에 불과한 거지.
내가 그것과 통하기 위해서는 아파트 복도를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밖으로 나와야 해.(그렇게 애써서 나와봐야 만들어진 자연일 뿐이야!) 어떤 근사한 아파트라도 외부와는 격리되어 있고, 대부호의 호화주택이라고 해도 인공적인 자연미를 꾸몄을 뿐 역시 분리되어 있지.
아무리 멋진 정원을 꾸며놓으면 뭐해? 나와의 통일성이 깨져 버렸는데.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에 불과한데.
고모집은 달라. 창 밖으로 항상 자연을 접할 수 있고, 문만 열고 나서면 자연 속으로 들어가게 돼. 항상 자연과 내가 통하고 있는 거지.
나와 자연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집은 잠시 우리를 보호하는 안락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야.
자연과 함께 하되 언제든 내가 쉴 수 있는 안식처인 집!
‘아, 이게 집이구나! 집은 원래 이래야 하는구나!’ 고모집에 며칠 있으면서 아빠는 그런 생각을 했어.
고모집은 (아빠가 알고 있는 한) 최고로 멋진 집이야! 이렇게 멋진 집을 지은 (그것도 혼자서!) 고모부에게 무한한 경의를...!
쏟아질 비난을 감수하면서 말할게.
아빠가 고모집을 좋아하는 또 한 가지 이유, 집안이 넓다는 거야.
(벌써 야유 소리가 들려.‘최소한 아파트 5,60평은 되는데 말이 되느냐’ ‘꿈 깨라’ ‘그러니 된장남 소리 듣는 거 아니냐’ 등등...
그래도 할 수 없어. 살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좋다는 건데, 최소한 좋은걸 좋다고 할 자유는 있는 거 아냐?)
아빠가 넓은 집을 좋아하는 것은 걸을 공간이 있기 때문이야.
물론 제일 좋은 것은 숲길을 산책하는 거지만, 내가 무슨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아니고 종일 숲길을 걸을 순 없잖아?
이런저런 생각이 막힐 때 서성대는 게 아빠 습관인데, 집안에 공간이 넉넉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울 때나 더울 때나 걸을 수가 있잖아.
동물원의 사자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만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비난받을 얘긴가?
전에 할머니가 고모집에 오셨을 때 일이야.
아빠하고 할머니하고 고모 셋이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고모부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그때 고모 대답이 ‘글쎄? 어딘가 있겠지’ 였는데 아빠는 그 대답이 매우 인상적이었어.
우리 집처럼 작은 아파트에 살면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이 집은 집안에 있기는 하지만
어느 장소에 있는지는 확인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숨어있을 공간이 많은 집... 뭔가 여유 있고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니?
갑자기, 확, 그런 집에 살고 싶어 지지?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
아빠가 가장 좋은 느낌을 갖고 있는 기억 중의 하나가 시골 외갓집에 대한 기억이야.
특별한 건 없어.
보통 한옥집처럼, 집안 마당에 작은 꽃밭이 있어서 철마다 여러 가지 꽃들이 피지.
넓은 대청마루가 있어서, 특히 여름에 뒹굴며 놀거나 낮잠을 자면 아주 기분이 좋아.
집 앞마당에 나서면 넓게 논밭이 보이고, 집 뒤로는 크지 않은 산이 있어.
아빠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가을 아침에 산에 가는 거야.
외가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부스스 눈을 뜨면 얼른 뒷산으로 가지. 이슬 맺힌 풀을 밟는 기분도 좋지만, 산에 떨어진 밤을 줍는 기분은 정말 최고야. 혹시 예쁘게 떨어져 터진 홍시를 주워 먹을 수 있으면 그날은 횡재한 거지!
그 가을산의 청량함과 아침이슬의 촉촉함과 젖은 햇밤의 매끈한 느낌은 지금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
아빠가 살고 싶은 집은 그런 집이야.
집 뒤로 작은 산이 있고, 앞으로 작은 마당이 있는 집.
멀리 마을이 보이고, 강이나 개울이 있어도 좋아.
근처에 산책하기 좋은 숲은 꼭 필요해.
집이 클 필요는 없지만 방이 2개는 있어야겠지? 엄마가 저기압일 때 피난할 장소는 있어야 하니까.
너는 어때?
항상 작은 정원과 다락방이 있는 2층 집에 살고 싶다고 대답했었는데 여전히 그러니? 말하자면 3층 집인 셈이지.
얼마 전 네가 1학년 땐가 그린 그림 보니까 5층에 다락방이 있던데, 앞으로 5년 후면 단층집으로 바뀌는 건가...?
몇 층이건 무슨 상관이야?
중요한 건 집이 얼마나 크고 좋으냐가 아니라, 집이 나와 세상을 단절시키는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나와 집과 세상이 통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집... 아빠는 네가 그런 집에서 살기를 바래.
비가 온다고 하네? 이번 비가 오고 나면 본격적인 가을이 되는 셈이지.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시간, 열매를 거두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를!
떨어져 있어서 더욱 딸의 하루가 궁금해지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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