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역사를 함께했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겉모양뿐이고,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방송을 보면 감정코칭을 잘하는,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에 공감을 잘하는 엄마들이 있기도 합니다마는 그건 제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이고 감히 해볼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 부모를 둔 아이들은 복이 많은 거지요. 저희에게 태어난 건 딸아이의 운명입니다. 감수해야지요.
딸아이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말이 없어지고, 본격적으로 사춘기를 겪으면서 거의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살아서, 건강하게, 주는 밥 제때 챙겨 먹고, 학교 안 빼먹고 다니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들어서면서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해서 조금씩 말을 붙여봅니다만, 아직도 시원하게 속내를 털어놓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이제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운명입니다.) 그나마 요즘은 먼저 다가와서 말도 걸고 괜한 수다도 떨고 하는 걸 보니 이제 사춘기는 확실히 지나간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사나 이리저리 말을 붙여서 겨우 얻어낸 대답이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냐’ 뭐 그런 질문을 했을 텐데, 아이는 ‘잉여롭게 살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잉여롭게? 처음 그 말을 듣고 약간 아찔했습니다. 잉여라는 말은 보통 ‘나머지, 쓰레기, 쓸모없는 것’ 등을 의미하는 나쁜 말 아닙니까? 설마 그런 뜻으로 말하진 않았을 테니 무슨 뜻이었는지 다시 물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그저 ‘속박당하지 않고, 여유롭게, 한가하게’ 정도의 뜻이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지요.
여러분은 자식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
사랑하는 딸!
TV의 어느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데 부부가 맞추기 게임을 하는 거야. 상대방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알아보는 게임인데, 그걸 보면서 아빠는 엄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생각해 봤어. 막상 구체적으로 따져보니 정확히 알고 있는 게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 할머니에 대해서는 더욱더 모르고. 그래도 너에 대해서는 잘 알지 않을까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사실 아빠로서 네 역사는 탄생 이전부터 지금까지 다 알고 있어야 정상인데, 하루를 넘기지 못하는 기억력과 컴퓨터의 휴지통을 자주 비우는 습관 때문에 영 자신이 없네.
아빠가 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생일 6월 5일, 혈액형 AB형, 치킨 라면 책 읽기 판타지 소설 좋아하고, 그네타기 아주 좋아하고. 착하고 예쁘고 배려심 많고 적극적이고, 편식하고 콩 싫어하고 게장 잘 먹고 감자 좋아하고. 피아노는 배우다 말았지만 가끔 혼자 띵똥 거리고, 할머니 댁 가기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TV시리즈 ‘명탐정 코난’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우리 집에는 케이블 TV가 없으니까.)
빨간색을 좋아하고(아닌가? 보면 빨간색 티셔츠를 즐겨 입는 것 같아서.) 갈비탕 설렁탕 삼계탕 좋아하는데 특히 아산 스파비스 온천 앞의 앉은뱅이 갈비탕을 제일 좋아하지.
김연아 좋아하고(아빠가 듣기에 네가 언니라고 부른 유일한 사람.) 가수 박정현 좋아하고 소녀시대 좋아하고 여전히 ‘타라 덩컨’ 좋아하고... 이 닦는 거 싫어하고, 머리도 잘 안 감았는데 요즘은 그래도 잘 감는 편. 어쨌든 전반적으로 씻는 거를 싫어하는 셈이지.
눈 나쁘고 알러지성 비염 있고 키는 작고 피구 하면 끝까지 살아남는 편이고.(피하기는 잘하는데 공을 잡기는 잘 못하지.) 치마를 잘 안 입고, 멋내기보다는 그냥 편한 캐주얼 복장을 선호하는 편.(특히 힙합 스타일의 후드티 후드잠바를 즐겨 입음.) ‘오만과 편견’을 여러 번 읽은 걸로 아는데, 작가 제인 오스틴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작품 속의 로맨스에 관심이 많은 게 아닌가 싶음.
쌍둥이를 부러워하고, 노트북 갖고 싶어 하고, 혼자만의 비밀을 갖고 싶어 하지.(핸드폰 비밀번호 해놨다가 엄마한테 여러 번 혼났지?) 빨리 23살이 돼서 결혼하고 싶고, 다락방 있는 2층 집에서 살고 싶고, 엄마 아빠를 벗어나면 당장 개를 키우려고 할 거야.(아빠는 그래도 반대야!)
아이들 좋아하고 가르치는 것 좋아하고 그래서 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있지.(엄마는 그다지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고, 아빠는 네가 학자가 되고 싶다면 찬성이야.) 인사 잘하고 남 도와주는 것 좋아하고(아빠는 괜한 참견이라고 하지.) 항상 놀 준비가 되어있고 여행 갈 땐 꼭 가방을 직접 싸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놀거리들이 가득하지. 어딜 가도 꼭 책을 가져가야 안심이 되고 여행을 갔다 오거나 하면 그동안 못한 책 읽기를 몰아서 하는 습관이 있어.
엄마한테 들은 책 읽기 에피소드 하나.
네가 일곱 살 땐가 어린이집 다닐 때야. 엄마가 출근하면서 너를 어린이집에 내려주고 갔어. 복지관을 들어가면 어린이집 입구에 도서실이 있었는데, 너는 어린이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도서실로 출근을 했지. 그리고 점심도 안 먹고 저녁에 엄마가 찾으러 올 때까지 책을 읽고 있었어.
출석 확인도 안 한 어린이집 선생님 덕분에 너는 하루 종일,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하고 독서를 한 거지. 널 데리러 온 엄마가 얼마나 황당했을지!
엄마 아빠를 약간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고, 드문드문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 같긴 한데 주로 네가 혼자 좋아하는 편인 듯한 느낌?
다양하게 여러 가지를 하기보다는 좋아하는 한 가지를 하는 스타일. 옷도 이것저것 입지 않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계속 입어서 오히려 눈총을 받지.(운동화를 항상 똑같은 것만 신어서 고모가 볼 때마다 신발 사준다고 하고. 사면 한두 번 신고 또 옛날 신발만 신잖아.)
성차별적 시각이나 행동에 거부감이 있고, 돈을 아끼는 편이고, 새로운 노트나 수첩 같은 것에 약간의 집착이 있는 것 같고.
맛있는 건 아꼈다가 나중에 먹고, 그러다가 배불러서 안 먹고 남기는 경우도 많지. 학교 가는 것 좋아하고 집에 혼자 있기 좋아하고 친구들하고 놀기 좋아하고. 사회 과목 싫어하고, 수학은 좋아하지만 수학 문제 푸는 건 또 싫어하고. 아빠를 좋아하지만 아닌 척하고,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난 걸 내심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적어 봤는데 대부분 맞는 얘기지?
문득, 중계동 이사 가서 네가 좋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할머니가 네 요와 이불을 새로 해 주셨는데, 그 꽃분홍 이불을 감싸고 즐거워 어쩔 줄 몰라하던 그 모습이...
불현듯 그 모습이 떠오른 것은, 그게 아빠에게 너의 대표적 인상이기 때문일 거야. 아빠가 알고 있는 너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 즐거워하고 열심히 즐기는 아이인 거지.
사랑하는 딸!
너는 아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사실 가족이라고 해도, 막상 같이 지내고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아. 아침에 일어나면 각자 자기 생활에 바쁘고, 집은 그저 들어와 잠자는 공간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오히려 직장 동료들끼리 지내는 시간이 더 많고, 그래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한다고 해.(직장 배우자(office spouse)라는 말이 있는데, 집의 남편이나 여편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이성을 뜻하는 말이야.)
TV에서 본 우스개 얘기 한 토막.
아빠가 친구들과 만나 놀다가 아이가 화제에 올랐지. 아직 어린 아이라 키가 얼마나 되나 물어보니 그 친구가 두 팔을 좌우로 벌려서(위아래가 아니라!) ‘이만한가...?’라고 말했다는 거야. 아침 일찍 나왔다가 밤늦게 들어가서 아이가 잠자는 모습만 보니까 누워있는 키밖에 모르더라는 얘기지.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
아빠는 키가 작은 편이야. 중학교 때까지는 큰 편이었지만, 아빠는 안 자라고 다른 아이들은 자라니까 작아져 버렸어. 크고 작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중요하다고 생각해. 크기도 경쟁력이니까.
아빠가 좋아하는 색은 노랑이야. 물론 계속 바뀌지. 고등학교쯤까지는 파랑이었다가 빨강이었다가 보라, 초록이었다가 지금은 노랑이 됐어. 그중에서도 금색.
전주비빔밥 좋아하고 강원도 백촌 막국수 좋아하지. 의정부 평양냉면도 가끔씩 먹어줘야 되고. 여름철에는 토속촌 삼계탕도 빼놓을 수 없지.(아! 하동관 곰탕도 있군!) 불현듯 족발이 먹고 싶은 때가 있고, 순댓국도 잘하는 집 있으면 찾아가 먹고 싶어.
아빠가 멋있지는 않지만 멋있는 사람 좋아하고 옷 잘 입은 사람 좋아하고 노래 잘하는 사람 부럽고 재미있게 얘기하는 사람 좋아하지. 약간 수다스러운 사람 좋아해. 최화정이라고 라디오 DJ 있는데, 귀엽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안 어울리는 감이 있지만...^^
답답하면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가서 한껏 차려입은 멋쟁이들 구경하는 것 좋아해. 아빠 스스로 그렇게 멋 내려고 노력할 생각은 없지만 보고 있으면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어. 꽃구경하는 거하고 비슷하지.
온천은 거의 유일한 아빠의 취미고, 숲길 산책하는 거 아주 좋아해. 그래서 절을 많이 다니게 되는데 그중 선운사 좋아해.(특히 마당이 마음에 드는데 요즘은 건물을 많이 지어서 답답해졌어.) 선운사 갔다가 그 앞에서 장어 먹고 변산 가서 바지락죽 먹고 온천하고 올라오는 게 우리 집 정기 드라이브 코스잖아?
스포츠를 즐기지는 않는데 격투기 중계방송은 좋아해.(이사하면서 엄마가, 케이블 TV 끊으면 불편한 게 있느냐고 물어봤어. 그래서 격투기 못 보는 거 빼면 없다고 했더니 힐끗 경멸의 눈초리로 아빠를 보고는 ‘끊자’고 하더라고.)
싸움을 잘 못하고, 그래서 가능하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있으려고 하지.(안철수가 비슷한 얘기를 한 게 기억나. 자기는 싸움이 싫어서 도전받지 않을 정도로 월등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같은 생각에 전혀 다른 결과의 두 사람.)
아빠는 심각하고 진지하게 살았는데 점점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좋아져.(가수로 치면 아빠가 좋아한 가수가 조덕배였는데 이문세로 바뀌는 거지. 당대의 문장가라고 하는 김훈의 글을 싫어하는 것도 같은 경우야.)
게으른 편이라 복잡한 걸 싫어해. 생각도 단순하고 생활도 단조로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최소한의 몇 가지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에는 무심한 편이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뿐, 그 밖에는 뭐든 해도 된다고 생각해.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지는 거니까.(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단 하나의 일.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
정치적으로는 좌파야. 기득권층은 가진 만큼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고 국가는 약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해. 교육(특히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점점 크게 느끼고, 그 기본이 되는 엄마 아빠의 재교육 기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
(엄마가 아빠더러 불평불만이 많아졌다고 하는데 무력감 때문 아닐까?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구체적으로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무력감...)
흔히 하는 질문 있잖아, 무인도에 간다면 뭘 가지고 가겠느냐?
셋만 가져가라면 첫째로 3 테너 콘서트 영상을 가지고 갈 거야. 우리가 항상 보는, 파리 에펠탑 앞에서의 공연으로. 심심할 때 보기에 제일 좋고, 특히 파바로티의 장난기 넘치는 하이 C 장면은 언제 봐도 재미있잖아.
나머지 두 개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뭐냐고?
뭐긴 뭐야? 당연히 너하고 엄마지! (이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혹시 둘 다 안 간다고 하는 거 아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
아빠가 너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을 얘기했다고 해서, 아빠에 대해서 두세 가지 것들을 알려줬다고 해서 우리가 가까워졌다고 할 수는 없을 거야.
논어(論語)에 공자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고 한 것처럼, 아빠는 너와 아는 사이가 되기보다 좋아하는 사이가 되고 싶고 좋아하는 사이보다는 즐기는 사이가 되고 싶어.
즐기는 사이란 어떤 사이일까?
안다는 것은 대상과 내가 나누어져 있다는 뜻이고, 좋아한다는 것은 그 대상과 감정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고, 즐긴다는 것은 대상과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지.
아빠는 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많이 좋아하니까 언젠가는 즐기는 날도 오지 않을까? 아빠가 너한테 바라는 것도 없고, 너도 아빠한테 바라는 것이 없고, 그저 즐거운 그런 날이...
딸을 생각만 해도 벌써 즐거워지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