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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Dec 21. 2018

지금도 그놈은 살아있다! -- 영화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 (감독 봉준호. 주연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2003년. 한국)


--- 이 인터뷰는 가상의 공간에서 진행된 가상의 인터뷰입니다.


--- 참석자; 봉준호 감독, 그리고 천하태평.          



살인을 추억한다고?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처럼 이질적인 두 단어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조금 다르다. ‘강원도의 힘’은 ‘강원도’와 ‘힘’이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단어가 붙어서 낯선 느낌을 만들어낸다. ‘강원도’라는 정적 단어가 ‘힘’이라는 동적 단어와 연결되면서 어떤 시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강원도의 힘’처럼 시적 감흥을 일으킨다기보다는 우리의 정서에 혼란을 유발시킨다. 서로 반대되는 정서의 두 단어를 붙여놓음으로써, 의도적으로 보는(듣는)이의 마음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표준국어 대사전에 나오는 ‘추억’에 대한 설명이다. 이 설명 그대로라면 사실 문제가 없다. 돌이켜 생각하는 지나간 일이 살인일 뿐이니까. 추억의 대상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 무엇을 추억하든 상관없지만, 우리 인간의 속성은 나쁜 것을 추억하려 하지 않는다. 좋은 것은 다시 떠올리려고 하지만, 나쁜 것은 가능하면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 ‘생일파티의 추억’은 자연스럽지만, ‘첫 구토의 추억’은 어색하다. 틀린 것은 아니나 마음에 저항감이 생긴다.     

‘살인의 추억’ 역시 마찬가지다. 거북한 연결이다. 아직 초반이니까 지루해하지 않으리라고 보고 좀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 두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하나는 이 추억의 주체를 살인의 당사자, 즉 살인자로 보는 경우. 살인자가 자신의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고 보는 것이다. 말은 되지만 영화와 연결시키면 적당하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화의 내용이 살인자 입장에 있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앞에서 ‘인간은 좋은 것을 떠올리려 한다’고 한 말과 연관지으면 확 소름이 끼친다. 이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연쇄살인의 추억을 좋다고 생각한다는 뜻 아닌가?     



다른 하나는 작가(감독)가 우리에게 ‘살인을 추억하라’고 강요한다고 보는 것. 우리 일반대중이 잊으려고 하고 잊고 싶어 하는 것을 애써 환기시켜 잊지 말라고 애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납득이 간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으려 했다는 뜻이니까. 다시 말해서 이 사람, <살인의 추억>의 감독 봉준호는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태생적으로 삐딱하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다시 말해 ‘덕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각오하고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해 보도록 하자.     


 영화의 처음과 끝에 대하여     


천하태평(이하 ‘천태’로 줄임); <살인의 추억>은 황금빛 벌판에서 시작해서 황금빛 벌판으로 끝나는 영화다. 또, 어린아이가 구체적인 대상(메뚜기)를 바라보는 쇼트로 시작해서 어른인 박두만이 불특정대상(정면)을 바라보는 쇼트로 끝난다. 일단, 왜 농촌인가? ‘농촌 스릴러’라고 홍보하기도 했는데, 사실 실제 사건의 발생장소인 화성이 농촌은 아니지 않나?

봉준호; 지금은 아니지만 농촌이었다.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었고, 많은 것이 혼재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런 혼란스러움, 충돌, 그런 것을 좋아한다. 농촌 스릴러라는 말도 그런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농촌의 평화스럽고 정적인 느낌, 그 속에 뭔가가 던져지면서 스릴이 생겨난다. 예상치 못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다.

천태; 문제는 그 변화가 좋지 않다는 거다. 나쁜 일이 생긴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괴물>에서는 백주에 재난을 맞게 된다. 비관론자인가?

봉준호; 그렇지는 않지만 근거 없는 낙관론을 경계한다. 그 역할을 예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을 피울 때, 가끔 부지깽이로 헤집어주지 않으면 불이 꺼진다. 산소 공급이 안되기 때문이다.

천태; 당신 영화가 산소 역할을 한다는 말인가?

봉준호; 예술 자체는 힘이 없다. 작품을 통해 변화하지 않는 상황의 비극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각성을 하도록 도울 뿐이다.

천태; 비극이라고 말을 하지만, 당신은 상황을 (결정적인 상황에서 특히) 희극적으로 그려내곤 한다. 의도적인 건가?

봉준호; 아니다. 체질이다. 체질적으로 뻔한 걸 싫어한다. 당연한 얘기를 당연한 방법으로 말하는 건 예술이 아니다. 난 그런걸 못견딘다. 질식할 것 같다.



천태; 그 말을 들으니 당신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생각난다. 정말 그런, 질식할 것 같은 사회에, 산소같은 영화였다!

봉준호; 그 말은, 나의 다른 영화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처럼 들린다.

천태; 솔직히 말해도 되나?

봉준호; 물론. 당신 정도의 사람이 하는 말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우린 체급이 다르다.

천태; 데뷔작으로만 봤을 때, 내가 한국영화에서 천재라고 생각한 사람이 둘 있다. 하나는 <해피 엔드>의 정지우 감독이고, 또 하나는 <플란다스의 개>의 봉준호 당신이다.

봉준호; 당신 말에 특별한 감흥이 없다. 나는 송강호가 천재라고 칭찬했어도 감동먹지 않았던 사람이다.

천태; 세간의 평가와 달라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나는 그 이후의 당신 작품들이 기대 이하였다. 작품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플란다스의 개>가 보여줬던 그 산소 가득한 상쾌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완성도는 높아졌을지라도, 너무 빈틈이 없고 무겁다. 그게 박자감을 둔화시키고 작위적이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가는 게 아니라, 강력한 공력으로 윽박지르며 끌고가는 느낌? 그건 천재의 길이 아니다. 장인의 길이다. 장인은 가끔 나올 수 있지만, 천재는 정말 어쩌다 한 번 보게 되는 재능이다. 나는 당신이 장인이 아니라, 천재의 길을 가기를 바란다.

봉준호; 동의하지 않는다. 일단 나는 천재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 뚜벅뚜벅 나의 길을 가고 있다. 세상은 한두 명의 천재가 만들어가는 게 아니다.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대중들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구경꾼일 뿐이다.

천태; 그런데, 거기에 문제가 있다. 대중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실상 영화 속에서 대중은 바람직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어리석고 서툴고 한심스럽다.

봉준호; 그렇다. 우린 불완전한 존재다. 그게 왜 문제인가?

천태; 그 불완전한 대중에 대해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어리석은 대중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살인의 추억> 다음 작품으로 대성공을 거둔 게 <괴물>이다. 잘 만든,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지만 나는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너무 무난했달까?

그런데 유독 나의 마음을 건드린 장면이 있다. 그냥 사소하게 스쳐지나가는 장면인데, 이상하게 나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괴물>에서 유일하게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느낀 장면이다.


영화 도입부, 한강다리에서 중년남자가 투신을 하려고 하다가 괴물을 본다. 사람들에게 ‘한강에 괴물이 있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자 그 사람은 "끝까지 둔해빠진 녀석들! 잘 살아. 들!" 이라고 말하고는 뛰어내린다. 이 때 그 남자의 포정과 대사, 그 감정의 생생함에 나는 놀랐다.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크게 스트레이트 펀치 한 방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건 분명히 불특정 다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하는 욕이었기 때문이다. ‘이 바보들아! 너희는 세상의 진실을 못 보고 있어! 눈 뜬 장님이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봉준호; 대꾸하지 않겠다. 착각은 자유다.

천태; <살인의 추억>에도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프롤로그에 박두만(송강호가 연기)이 경운기를 타고 피살자가 있는 농수로로 온다. 아이들이 ‘똥차’ 라고 놀리며 뒤를 따라오고, 두만은 그런 아이들을 향해 ‘엿’을 먹인다. 그것도 카메라 정면을 향해서. 관객은 시작하자마자 ‘엿 한방 먹고’ 영화를 보게되는 것이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봉준호; 악의적인 시각이다.



천태; 물론 나는 당신의 선의를 믿는다. 당신이 대중에게 애정이 있다는 말도 믿는다. 그러나 당신의 의식 한 구석에는 ‘끝까지 둔해 빠진’ 대중들에 대한 적대감이 있다. <괴물>의 뜬금없는 욕이나 <살인의 추억>에서 아이들에게 하는 난데없는 ‘엿 먹임’은 그런 잠재의식의 표현이다. 심하게 말하면 ‘나는 천재이고, 너희들은 진실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봉준호; 닥쳐라! 어디서 이따위 인터뷰를...!

천태; 본 대로 말하는 거다. 영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똥차라고 놀리는 차는 고장나 서있는 경찰서 차량이다. 다시 말해 공권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공권력이 고장났다고, 부패했다고 대중들이 시위를 하는데 주인공인 두만이 그들에게 욕을 하는 거다. 더군다나 두만의 직업은 형사다. 공권력의 대리인이다.

봉준호; 당신이 창작에 대해서 뭘 아는가? 그런걸 성격화(characterization)라고 한다. 두만은 단순히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 것이고, 그의 성격상 노는 방법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그리고 설령 그 행동이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그건 두만이라는 인물의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다. 당신은 작중 인물과 작가도 구분을 못하나? 둔해빠진 건 당신이다.

천태; 성격과 극의 흐름이 꼭 같이 가라는 법은 없다. 인물의 의도와 드라마가 맞아떨어질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 간극이 벌어질수록 극적 긴장감이 높아진다. 그런 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시작부터 극적 긴장감을 높여놓고 있다. 당신 말대로 주인공 두만은 아이들(대중)에게 특별한 악감정이 없다. 그저 자신의 스타일대로 사는 것 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런 두만을 놀린다. 단순히 놀리는 것이 아니라 두만의 일을 방해하면서 신나 한다. 사건 현장을 한껏 훼손하는데도, 두만은 소리를 지를 뿐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메뚜기 소년의 존재이다. 메뚜기 소년이 두만의 대사를 똑같이 흉내내서 따라해도, 이상하게 두만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즉각적이고 다혈질인 그의 성격대로라면 분명히 혼을 내서 쫓아버릴 만한데 그러지 않는다. 두만은 왜 소년을 혼내지 않는가?



봉준호;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나? 송강호 불러서 물어봐라.

천태; 송강호는 모른다. 이건 감독의 영영이다. 현장을 훼손하는 아이들에게 투덜대던 두만이 배수로에 죽어있는 사체를 본다. 고개를 들다가 메뚜기 소년을 보고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소년이 두만을 노골적으로 놀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제사 두만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풍요로운 평야가 보이며 제목 ‘살인의 추억’이 쓰여진다.

봉준호; 그게 내 취향인 것은 맞다. 느닷없이 보인다고 말했는데, 나는 관객의 예측대로 가는 것을 싫어한다. 어떻게든 비틀어보려고 한다.

천태; 수용미학 용어로 하면 ‘기대지평(Horizon of expectations)의 파괴’다.

봉준호; 그런건 모르고, 그런 ‘예측의 비틀음’이 코미디나 스릴러 드라마의 기본이다. 내 영화가 스릴러와 코미디 요소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천태; 맞다. 특히 <살인의 추억>에는 코미디와 스릴러가 마구 뒤섞여 있다. 균질하지 않고 잡탕이다. 그런데 그 잡탕인 요소가 철저한 연출력으로 잘 통제되어 있다. 그게 참 묘하다. 통제된 잡탕은 잡탕이 아니다. 나름대로 정돈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봉준호; 약간 불안해진다. 뭔가 나쁜 소리가 나올 것같다.

천태; 나는 당신처럼 삐딱한 사람이 아니니까 나쁜 소리 먼저 하겠다. 잡탕이 잡탕다우려면 재료를 너무 다듬으면 안된다. 각각 재료를 최대한 살려야 한다. 그런데, 디테일이 강해서 당신 별명이 ‘봉테일’이라며? 너무 세심하게 디테일을 통제하다보니 재료 본연의 맛이 사라지고 감독의 의도대로 덧칠된다. 대상을, 상대를 믿고 맡겨야 하는데 당신은 그게 안된다.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봉테일이라는 별명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당신에게 그건 칭찬이 아니라 욕이다. 천의무봉! 천재는 디테일이 없다!

봉준호; 내가 근래에 들어본 중에 가장 황당한 평가다.

천태; 영화는 개구리 소년의 얼굴에서 시작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메뚜기를 쳐다보는 개구리 소년’이 <살인의 추억>의 시작이다. 시간 절약을 위해서 결론부터 말하겠다. 개구리 소년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 본편의 핵심, 연쇄살인의 범인을 상징한다. 소년은 메뚜기를 잡아서 병에 넣는다. 그리고 두만이 타고오는 경운기를 보며 그 병을 뒤로 숨긴다. 연쇄살인을 하는 범인의 행동과 다른 점이 있는가? 없다. 게다가 그 소년은 두만을 조롱한다. 자신을 잡으려는 형사의 행위를 놀리는 것이다.

봉준호; 새롭지 않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간 해석도 들어본 적 있다.

천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런 개구리 소년을 대하는 두만의 자세다. 처음에 두만은 소년을 그냥 평범한 동네꼬마로 생각한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지나간다. 그러다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흉내내며 조롱하는’ 소년의 태도에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제목 ‘살인의 추억’이 뜨기 전 쇼트에서 두만은 ‘얘, 뭐지?’ 하는 표정을 보인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하루하루 살아가던 두만에게 하나의 질문이 생긴 것이다. 이어 제목이 떠오르고, 그 질문의 구체적 내용이 영화의 본 내용이 된다.

봉준호; 토달지 않겠다. 해석은 개인의 자유다.

천태; 타이틀에 이어 본편이 시작되고,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끝이 난다. 그리고 에필로그. 두만은 형사를 그만두고 녹즙기 대리점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처음의 현장에 다시 가게 되고, 거기에서 소녀에게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며칠 전에도 어떤 사람이 왔었다는 것이다.  


  

 소녀; 옛날에, 여기서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진짜 오랜만에 한번 와봤다... 그랬는데?   

  

두만은 만감이 교차한다. 옛날같으면 흥분해서 떠들었겠지만 현재의 두만은 그러지 않는다. 감정을 통제하면서 차분하게 묻는다.     


두만; 그 아저씨, 얼굴 봤어? ...어떻게 생겼어?

소녀; 그냥... 뻔한 얼굴인데?

두만; 어떻게?

소녀; 그냥... 평범해요.     


그 말을 듣고, 그동안 통제되어왔던 감정이 요동친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격해진 감정의 두만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어두워지는 화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완전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똑같이 추수를 앞둔 황금 들판. 시작은 살인사건이 일어난 어수선한 현장이고, 끝은 평화롭기만 한 한적한 들판이다.

시작의 두만은 메뚜기 소년에게 조롱당하고, 끝의 두만은 소녀에게 잊고있던 옛 사건의 범인에 대해 듣는다. 시작의 두만은 의문을 가진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끝의 두만은 극단적 감정을 담은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정면을 보는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감독 스스로 ‘범인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좀더 복합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범인을 보며 ‘너를 잊지 않겠다. 반드시 잡고 말겠다’ 혹은 ‘사지가 썩어서 죽어버려라!’는 저주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두만이 구체적으로 반응을 보인 것은 ‘평범하다’는 말에 대해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지 않으면 이런 비극은 언제든지 또 일어난다는 뜻이다. 두만 역시 잊고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다가 소녀의 말에 죽비를 맞은 것처럼 화들짝 정신을 차린 것이다. 영화가 메뚜기 소년을 보며 ‘이건 뭐지?’ 하는 두만의 의문으로 시작했다면, 평범하다는 소녀의 말에  ‘아!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얻고 끝이 난다는 말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감지 않겠다는 다짐. 나는 절대로 잊지 않을테니 여러분도 잊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부탁.


그러나 두만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자주 잊고, 그래서 <괴물>의 재난이 또 일어난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박근혜 정부의 놀음판이 벌어지고, 결국 <설국열차>의 뒷칸에 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범인은 누구?     


천태;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범인은 누구인가? 박현규(박해일이 연기)가 범인인가, 아닌가?

봉준호; 모르겠다. 영화에 나온 그대로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천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 이해한다. 오프더레코드로 하고, 솔직하게 얘기하자. 감독이 아니라 그냥 관객의 한명으로서, 박현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나?

봉준호; 감독은 입이 없다.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

천태; 원작인 연극 <날 보러 와요>라면 범인을 특정하지 않는 그런 태도가 맞다. 연극은 분명하게 사회비판적인 코미디극이고, 그런 형태에서 누가 범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연쇄살인이 발생하게 되는 사회, 그런 사회구조, 분위기, 그런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극 <날 보러 와요>는 그런 게 잘 그려져 있다.

봉준호; 좋은 연극이다. 내 영화가 <날 보러 와요>의 이름에 흠집을 내지 않았으면 한다.

천태; 솔직히 그런 점에서, 나는 <살인의 추억>이 <날 보러 와요>에 못미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살인의 추억>은 묘하게 불균질하다. 이런 듯 하면 저렇고, 이건가 하면 저렇다. 뒤죽박죽으로 잘 섞여있다. 잘 통제되어 있다. 영화 자체는 깔끔한데, 그 내용은 흐트러져있다. ‘이것은 이것이다!’ 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시대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영화 자체의 통일성 면에서는 마이너스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러한 어긋남, 균열, 빈틈, 구멍(평야의 배수로와 기찻길 터널 포함) 등등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더 확장해서 보면 피살자들의 훼손되는 음부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어디선가 당신의 영화는 ‘삑사리의 미학’이라고 한 걸 본 기억이 있는데,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는 장치가 된다. 스토리나 인물, 사건, 극적 맥락, 이런걸 떠나서 이 ‘빈틈의 모티브’에만 집중해서 보면 기분이 묘하다. 처음에는 코미디다. 재미있다가, 점점 슬퍼지기 시작한다. 조금만 예를 들어보자.     



영화가 시작하면 평화로운 벌판이다. (어긋남)자동차가 고장나 있고, 주인공은 경운기 뒷자리에 타고 있다. (어굿남)황금벌판 배수로에 여자의 사체가 눕혀져 있다. (어긋남)메뚜기 소년이 형사를 흉내내며 놀린다. (어긋남)두만이 전입 오는 서형사(김상경이 연기)를 추행범으로 오해해서 두드려 팬다. (어긋남)두만과 서형사는 상반되는 스타일이다. (어긋남)초반의 코믹한 분위기가 스럴러로 변해간다. (어긋남)과학수사를 중시하는 서형사가 점점 두만을 닮아간다. (어긋남)중요한 살인용의자가 ‘부드러운 손’을 가진 예쁜 남자이다. (어긋남)결정적인 증거인 유전자 검사가 ‘불일치’로 나온다...   

  

점점 슬퍼진다고 말했는데, 그러므로 마지막 철길 위에 장대비가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늘도 슬퍼하는 것이다. 형사와 용의자가 서로 뒤엉켜 싸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싸움에 확실한 편가름이 없다. 선악이 불확실하고, 피아가 불확실하다. 묘하게 유력한 연쇄살인 용의자인 박현규도 피해자인 것처럼 그려진다. 이상한 착란상태인데, 그 착란이 용인된다.     


“씨발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가라. 씨발 놈아.”    

 

유명한 이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이 용인되는 것도 그러한 착란상태 때문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상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두만이 박현규를 걱정할 리는 없으니, 이 말은 ‘너같이 악마같은 놈도 밥은 먹냐? 그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냐?’ 하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대사의 원래 의미와 상관없이, 극적 맥락에서 이 말은 복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원래의 의도와 상식적 의미가 함께 전달되고, 그로 인해 어긋남과 충돌이 발생한다. 두만과 박현규 사이에 묘한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느낌이 있다. 형사와 용의자라는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거기에 슬픈 정조의 음악도 같이 거든다.   

  


이러한 착란상태, 경계의 무너짐, 근거없는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지금은 평론이나 작품분석을 하는 시간이 아니므로 간단하게 답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아까 말한 모티브(어긋남, 균열, 빈틈, 구멍)가 그 슬픔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어긋남은 우리 인간사에서 어찌할 수 없이 생겨난다.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사의 속성일 수도 있고, 인생 자체의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99.999% 확실한 유전자 검사가 불일치로 나오는 이 현실. 손이 고운 젊은 남자가 연쇄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 현실. 

결정적으로 범인의 얼굴을 말할 순간, 아빠에게 학대당한 아들 백광호는 그 학대의 시간을 떠올리고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아?’라고 말하며 철길에 올라 죽는다.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어긋남을 견뎌야 한다. 균열을 메우려고, 빈틈을 채우려고, 연쇄살인자가 하듯 피살자의 몸 속에 이물질을 넣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연쇄살인자의 태도에 주목하는 것은 또다른 접근방법이다. 그런 인물형은 그들만의 폐쇄적인 가치관을 고수한다. <살인의 추억>의 연쇄살인범이 살인과정에서 나름의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형사; 반장님, 쉽게 생각하세요. 애국조회할 때 애국가 부르고 시작하는 거나 똑같은 겁니다. 

 ‘깔끔’하고 ‘철저’하고 ‘똑똑’하다고 형사들이 말했듯이, 그 세계 나름의 확고한 질서가 있을 수 있다. 그 얘기를 자세히 하는 것은 논점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위험이 있으므로 하지 않겠다.)     


어쨌든, 우리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깨어서, 되도록 그 어긋남이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균열이 가속화 하는 이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봉준호; 뭔가 속은 느낌이다. 지금 나는 들러리고, 당신이 주로 말을 한다.

천태; 난 속인 적 없다.

봉준호; 분명히 인터뷰 섭외할 때, 내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가?

천태; 그렇다. 그렇게 얘기했고, 지금 듣고 있다. 뭐가 문제인가?

봉준호; 내가 주인공인데, 왜 당신이 주인공처럼 얘기를 주도하나? 반칙이다.

천태; 착각하지 마라. 지금은 당신이 주인공 아니다. 지금 이 시간의 주인공은 나다. 지금은 나의 쇼타임이다! 그리고, 내가 말을 바꿨다고 해도 그걸 문제 삼아서는 안된다. 왜냐? 그게 인간이니까. 인간은 변한다. 좋게도 변하고 나쁘게도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신반장(송재호가 연기)을 봐라. 조형사(김뢰하가 연기)에게 구타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자신은 조형사를 발길질한다. 그게 인간이고 인간사다.

봉준호; (약올리는 듯한 천하태평의 태도에 화가 난다.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다가)그래, 잘났다. ...난 인간이 뭔지 인간사가 뭔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밥은 먹고 다니냐?



천태; 옛날에는 밥 먹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낑낑거렸다. 그러나 요즘 시대의 문제는 그게 아니다. 밥 먹는 것 같은 훤히 보이는 문제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를 위협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문제들이 우리를 집어삼킬지 알 수 없다. 그게 <살인의 추억>의 공포다. 연쇄살인이 일어나지만, 육하원칙이 맞지 않는다. 서로 어긋난다. 균열이 생겨있다. 심증으로는 분명히 범인인데, 객관적 물증은 아니라고 한다. 어느 한쪽을 틀렸다고 하면 편한데 그럴 수 없다. 양쪽 다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다.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는 박두만 형사와 구체적 물증과 자료에 의지하는 서태윤 형사, 누가 틀렸는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은 점점 상대의 영역으로 스며들어간다. 박두만은 서태윤이 되고, 서태윤은 박두만이 된다. 정체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 그게 무섭다.

봉준호;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발전해 가면서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연대해야 한다. 내 가족과 내 이웃과 공동체가 서로 힘을 합해서 지켜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의 먹이가 될 것이다.

천태; 지금 한 말 속에 당신의 모든 영화가 다 들어있다. 태도의 일관성이 있다. 갑자기 존경스러워진다.

봉준호;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존경받는 영화감독으로 평가받고 싶다. 임권택 감독님이나 박찬욱 감독님을 닮고 싶다. 평생 일하는 감독... 부럽다.

천태; 박찬욱 감독 얘기가 나오니까 생각이 난다.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 송강호가 돌연 정면을 노려보고 화면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크레디트 타이틀이 올라오다가 화면이 밝아지면 황금들판이 나타난다. 본편 영화의 분위기와 다르게 평화롭고 아름답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가야 할 이상향을 잊지말라는 뜻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봉준호; 아! 설원 장면?

천태; 비슷한 느낌이다. 위안의 느낌과 어떤 각오같은 느낌도 있고... 영향을 받았나?

봉준호; 그 질문은 박찬욱 감독에게 해라. 두 작품 모두 2003년 작품이지만, <살인의 추억>이 먼저 개봉했다. 아니, 영향을 받았다고 해두자. 사실 박찬욱 감독은 나에게 아버지같은 존재다. 영화적 아버지. 항상 그를 존경하고 닮고 싶어한다. 특히 그의 유머감각을 부러워한다. 나는 도저히 흉내낼 수도 없다.

천태; 이건 뭐지? ‘겸손은 나의 것’인가? ...그건 그렇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형사들 중심으로 사건의 주변을 탐색하던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범행에 집중하는 것은 영화 시작 46분 정도 지난 다음이다. 여학생들 입을 통해 화장실 괴담을 소개한 직후, 살해되는 여자에게로 화면이 넘어간다. 우산을 들고 남편을 맞이하러 나가는 여자. 이 여자를 살해하려고 덤벼드는 범인의 모습이 처음으로 보여진다.


인터뷰 초반에 영화가 박자감이 부족하다고 얘기했는데, 이 장면은 내가 유일하게 박자감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장면이다. 비오는 분위기, 음악, 촬영, 빗소리, 휘파람 소리, 바람소리, 움직임의 변화 등 여러 가지가 잘 어우러져서 스릴과 공포가 잘 살아났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편집이다. 벌판을 배경으로 긴박감을 증가시켜가던 편집은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떡! 하니, 하얗게 빛나는 시멘트 공장 전경을 보여준다. 이어 여자가 공장 쪽으로 달아나고, 드디어 범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내가 유일하게 몰입되었던 장면이다.

봉준호; (모처럼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서)실제로 극장에서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천태; 그건 범인의 모습이 보일 때...



봉준호; 물론! 그 장면 말하는 게 아닌가?

천태; 그건 수많은 공포영화에서 항상 보던 거다. 나는 그게 무서울만큼 순진하지 않다. 내가 공포를 느낀 것은 시멘트 공장이 보여지던 순간이다. 그동안 벼가 출렁이는 벌판을 배경으로 진행되던 화면에 갑자기 환한 불빛 아래 우람한(정확히 말하면 차갑고 딱딱한) 공장건물이 나타나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이미지가 주는 공포가 엄청났다.

봉준호; 잘못 본 거다. 그건 여자의 피난처로 제시되는 장면이다. 오독을 일반화시키면 안된다.

천태; 난 영화가 보여준 대로 말하는 거다. 그동안 영화에서는 공장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시골의 소규모 도시의 일상적인, 익숙한 풍경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지는 공장 건물의 이미지는 강력하다. 피난처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범죄의 근원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봉준호; 어이가 없다. 상상력 만렙이다.

천태; 나는 사실상 이게 <살인의 추억>의 코어 이미지(Core Image)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공장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사회가 무너져 간다. 시골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다. 그 바뀌는 형태의 구체적 모습이 시멘트 공장이다. 나중에 형사들이 찾아간 채석장의 풍경도 을씨년스럽다. 흉흉하다. 그리고 그곳에 연쇄살인의 용의자 박현규가 근무한다. 



공장의 모습과, 공장의 사람들과, 공장의 역할 모두가 외부에서 새로 들어온 것이다. 전통적 시골의 형태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세력인 것이다. 마지막 타이틀백의 황금벌판과 시멘트 공장은 서로 상극이다. 내 말이 틀리나?

봉준호; 그런 배경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아까 그 장면에서 그걸 느낀다는 건 오버센스라고 본다. 영화의 맥락대로 봐달라.

천태; 문제는 그 맥락이 잘 맞지 않는다는 거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나는 그 맥락의 어긋남이 이 작품의 주요한 포인트라고 보는 입장이다. 여자가 피난처로 생각하고 달려간 공장이 사실은 살인의 근원이라는 것도 역시 그런 어긋남의 하나이다. 아이러니다.


맥락이 맞지 않는 것은 또 있다. 학교 화장실 괴담과 그 괴담의 실제 주인공인 여자... 여자는 연쇄살인마에게서 살아난 유일한 생존자인데, 그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범인은 왜 여자를 살려준 건가?

봉준호; 여자가 말하잖나?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고. 봤다면 죽었을 거라고.

천태; 그건 이유가 안된다. 그 싸이코패스는 그런 자비심이 없다.

봉준호; 그럼 당신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천태; 그것도 일종의 어긋남, 균열이라고 본다. 영화의 내용대로 하면 여자가 당한 사건은 실제 연쇄살인이 발생하기 전이다. 아직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기 전이라는 것은, 그가 아직 미완성이었다는 말이다. 아직 미숙했다는 말이고, 만약 그 때 그를 추적했다면 잡을 수 있었고 이후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는 말이다.

봉준호; 여자가 신고를 했어야 한다, 그런 뜻인가?

천태; 당연히! 그러나 여자는 신고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여자의 사연은 학교 괴담이 되어 떠돌게 되었다. 사실이 묻히면 진실은 신음을 한다. 그 신음은 괴담이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한때 봇물처럼 터지는 듯하던 성촉행 미투가 다시 잠잠하다. 그러면 안된다. 말해야 한다. 그래야 괴담이 생기지 않고, 각종 범죄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봉준호;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살인의 추억> 얘기 중이다. 논점이 벗어났다.

천태; 아니다. 이건 영화 얘기다. 어긋남이라는, <살인의 추억>의 중요한 키 모티브를 말하고 있는 거다. 우리는 영화 내내 무수한 비틀림, 왜곡, 어긋남을 보게 된다. 오해도 있고, 의도적 왜곡도 있고, 인물들은 모르고 지나치는 비틀림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틀림이 비극의 씨앗이 된다. 때로는 희극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비극이다.

나는 앞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송강호의 시선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경각심이라고 말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겠다는 다짐이라는 거다. 그런 ‘깨어있음’만이 어긋남으로부터 비롯되는 비극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다. <괴물>의 마지막도 그런 것 아닌가?

봉준호; 그런 식으로 나의 동의를 유도하지 마라. 영화를 어떻게 보건 그건 당신 자유지만, 나는 그런 의도로 만들지 않았다.

천태; 그럼 당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살인의 추억>에서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말해보라.

봉준호; 물론 나도 내 영화가 사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 감사하겠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는 영화이고, 감독은 감독일 뿐이다. 철학자나 택배기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운동가도 아니다. 영화를 통해 관객과 교류할 뿐이다.

천태; <살인의 추억>은 5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영화다. 2003년 작품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공이다. 만족하는가?

봉준호; (트집을 잡는다고 느껴져서 짜증이 난다)...만족은 중국의 소수 민족이고, 나는 한민족이다. 그리고 독도는 우리 땅이다.

천태; 영화가 범인을 잡는데 도움이 되길 바랐다고 하던데...?

봉준호; 그건 사실이다. 취재를 하면서 그런 바램이 더 강해졌다. 홍보카피처럼, 정말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천태; <살인의 추억> 개봉 10주년 기념 관객과의 대화에서 당신이 했던 말이 화제였다. 범인에 대해 잘 알고있으며, 그 자리에 와 있을 거라고... 1971년 이전 출생의 B형 남자이므로, 문을 닫고 참석자의 유전자 검사를 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서 “저기, 뒤에 누구 나가시네?” 라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는 얘기.



봉준호; 사실 나는 <살인의 추억>이 개봉을 하고, 그로 인해 범인을 잡았다는 보도가 나오면 최고의 영광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는 정말 어렵다.

천태; 앞에서 당신은 당신 영화가 부지깽이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봉준호; 세상이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을만큼 어리지 않다. 나는 다만 내가 만들고 싶어하는,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나에게 꿈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님이나 박찬욱 감독님이 나의 롤모델이다.  

   

왜 영화를 하느냐 하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가장 바보같은 질문이다. 영화는 나의 일이다. 영화감독이 나의 직업이다. 왜 일을 하느냐 하는 말은 왜 사느냐 하는 말과 같다. <살인의 추억>을 왜 만들었느냐고?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태; 아까 내가 물어본 의도는...

봉준호; (말을 막으며) 중요한 것은! 일과 재미가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과 재미가 분리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소외된다. 일이, 직업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돈을 벌어다주기 때문이라기보다, 일이 우리 삶의 보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일의 주인이다.     


아까 ‘봉테일’이라는 내 별명에 대해서 비꼬는 투로 얘기했는데, 나는 그 별명을 좋아한다. 자랑스럽다. 그 별명대로 나는 디테일을 중요시한다. 그걸 다루는게 재미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고 비난하지만, 옛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 사소함 속에 삶의 진실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만약 나의 디테일이 진실을 담고있지 못하다면 그건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디테일 탓이 아니다. 디테일은 내가 영화 만들기를 즐기는 이유이다.    

 

<플란다스의 개>를 좋아한다고? 그 작품은 나의 데뷔작이다. 2000년 개봉이다. 그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고,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옛날 작품을 칭찬하는 것은 지금의 나를 욕하는 말이다. 

나는 딸에게 가끔, ‘너는 5살 때 제일 예뻤어.’ 라고 말하는데, 그건 다시 말해 지금은 그때만큼 예쁘지 않다는 뜻이다. 사실이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불쾌한 말이다. 내가 딸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도 예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하는 말은 그 뜻이 아니지 않나?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물론 나로서도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고 아닌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의 나다.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전성기가 지난 예술가여서 작품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옛날의 나보다 지금 더 성숙해짐을 느낀다. 감독으로서 나는 <플란다스의 개>나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보다는 <옥자>나 <기생충>을 말해주기를 바란다. 지금의 작품으로 나를 말해달라는 것이다. 현재 작품이 문제가 있다면 차라리 그 얘기를 해달라. 그게 나를 위하는 행동이다. 그게 지금의 나니까. 현재 나의 최선이니까. 

    

환자를 진단하면서 ‘아! 당신 옛날에, 2003년에 아주 좋았군요!’ 라고 말하는 의사는 없다. 지금 현재의 상태를 말해야 한다. 병이 들었으면 어떻게 나쁜지 정확히 얘기해주는게 맞다. 나이가 들면서 관심사도 변하고 가치관도 조금씩 바뀐다. 무엇보다 재미있어하는 포인트가 달라진다. 나는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확신은 없다. 그런 얘기를 듣고 싶다.


칭찬? 물론 들으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그 때 뿐이다. 별 도움 안된다. 솔직히 너무 많은 칭찬을 들어서 식상하기도 하다. 과거에 만든 요리에 대한 칭찬보다는 지금 요리가 맛이 어땠는지가 더 궁금하다. 왜냐하면, 나는 평생 관객들을 위해 요리를 만들고 싶고, 그들로부터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천태; 알겠다. 이번 섹션의 소제목이 ‘균열이 가속화 하는 이 시대어떻게 살 것인가?’ 인데, 그것에 대한 답이 된 것도 같다. 인터뷰 도중 무례가 있었다면 용서해 달라.

봉준호; 내가 용서한다고 한번 저지른 잘못이 없어지지 않는다. 본인이 참회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지가 썩어 죽는다...

천태; (놀라고, 겁에 질린다)뭐라고???



봉준호; 아! 발음 착오다. 자지가 아니라 사지다. 잘못 말했다. 미안하다.

천태; 감사하다! 인터뷰 마치겠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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