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하태평 Sep 14. 2018

종소리가들리면과잉의 축제가 시작됩니다-영화<올드보이>

 

종소리가 들리면 과잉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 <올드보이>(감독 박찬욱. 2003년. 한국


<올드보이>에는 온통 재미있는 것 투성이다. 이야기, 그중에서도 가장 금기시되는 근친상간을 다루면서 폭력의 스릴, 공포, 코미디, 다양한 음악, 멋진 영상, 재치 있는 대사와 내레이션, 탁월한 박자 감각 등 세상의 모든 재미있는 것들을 다 모아 모아서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라고 공표하면서. 그리고 친절하게 그 축제의 마지막이 어떨지에 대해서도 미리 얘기해준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라고...     


    

박찬욱이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얘기한 걸 상기하지 않더라도, <올드보이>는 확연히 히치콕의 영향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후반부에서는 노골적으로 히치콕을 인용하고 있으며, 대놓고 ‘이건 <현기증>의 외전이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박찬욱이 다시 풀어낸 <현기증>. 

<현기증>이 이야기의 정수만을 엄선해서 다듬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올드보이>는 다양한 재밋거리를 풍성하게 서커스처럼 풀어낸다. 아니, 서커스라기보다는 폼나는 대중소설 같고 혹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는 것 같다.


그것들의 특징은 어떤 특정한 형태를 취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에 갇히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비틀고, 비약하고, 과시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흘러간다. 이런 자세는 사실 쿠엔틴 타란티노가 <펄프 픽션>에서 의도했던 것이기도 한데, 그가 <올드보이>에 열광한 것이 어쩌면 <올드보이>가 <펄프 픽션>보다 그런 의도를 더 잘 구현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수렴한다. 수렴하면서 감정이 정리되고, 주제가 명확해져서 결국에는 감동을 준다. 하지만 <올드보이>는 수렴하지 않는다. 단선적으로 흘러간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길을 계속 가다가 그냥 툭! 끝난다. 감동? 그런 거 관심 없다. 주제? 그딴 거 주느니 차라리 군만두를 주겠다! 

<올드보이>가 지향하는 유일한 가치는 ‘재미’다. 지금 이 순간, 영화를 보고 있는 이 찰나의 재미가 <올드보이>가 추구하는 유일한 목적이다. ‘즐겨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즐길 것이다.’   


  

<올드보이>는 대한민국 대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사이트 아이엠디비(IMDb)의 영화랭킹에서 평점 8.4로 67위에 올라있다(2018년 8월 현재). 전 세계 모든 시대를 통틀어 매긴 순위이므로 67위라면 대단한 것인데, 이걸 볼 때마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과연 이 사람들이 <올드보이>의 참 맛을 제대로 즐겼을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올드보이>를 보는 중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 말‘이 주는 재미이기 때문이다. <올드보이>를 보고 있으면, 내가 한국 사람인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한국말을 알고, 그 말의 재미를 누릴 수 있다는 게 고맙고 감사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파출소에서 대수가 추태를 부린다. 그 과정의 소소한 재미도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친구 주환이 나타나 데리고 나갈 때 대수가 하는 대사가 특히 가관이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그럼 수고하시구요... 일간 한번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 ‘일간 한번 찾아뵙겠다’는 말은 우리 문화에서 지극히 예의 바른 인사법이다. 바로 전까지 경찰들에게 ‘이 개새끼들아’ 하고 바닥을 뒹굴며 난동을 피우던 대수가 할 말이 아닌 것이다. 

이런 식의 유머가 <올드보이>에는 널려있는데, 한국문화에 익숙지 않은 외국관객이 정말 이런 맛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경찰이 ‘다 필요 없으니까 오지 말라’고 하자 대수가 뭐라 하는지 기억하는가? “내 마음입니다 이 씨발 놈들아!” 하고는 주먹 엿을 먹이고 재빨리 도망간다. 개구쟁이를 보는 듯 즐겁다. 

하지만 ‘내 마음입니다 - 이 씨발 놈들아 주먹 엿 - 도망’이라는 연결이 주는 유쾌한 장난은 이내 벌을 받는다. 철없는 어른이 지옥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15년 동안의 감금생활을 보여주는 태도 역시 다르지 않다. 최악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그때 그들이 15년이라고 말해줬다면 조금이라도 견디기가 쉬워졌을까’ 궁금해하고, 자신을 잠재우는 최면 가스가 러시아군이 체첸 반군에게 쓰던 것이라며 쓸데없이 지식을 자랑하고, 자신을 감금하고 있는 자들이 머리도 깎아주고 옷도 갈아입혀주고 청소도 해준다며 ‘고마운 놈들’이라고 감사해한다.


이런 태도는 재미있기는 한데 웃음이 나오지는 않는다. 유머 코드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로서는 이게 유머라기보다는 박찬욱 특유의 ‘거리두기’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박찬욱의 유머센스는 조금 이상하다. 어떤 때 보면 살짝 변태 같다. <올드보이>는 시종일관 관객이 영화의 내용에 빠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관객이 몰입하지 못하도록 이야기를 비틀고, 생략하고, 내레이션이나 음악으로 새로운 레이어를 만들고, 다양한 영화적 기술들을 사용하고, 썰렁한 유머를 풀어놓는다.  

     

이러한 ‘거리두기’의 태도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나는 처음 <올드보이>를 보고 그냥 잘 만든 오락영화라고 생각했었다.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아보면서 당시 내 판단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는 <올드보이>가 근친상간이라는 거창한 소재를 그리스 비극식으로 풀어내고 싶어 한, 그러나 시늉에 그친 대중영화라고 단순하게 판단했으나 실상 <올드보이>는 그런 전통적인 영화 독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태도에 기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대중영화는 ‘중앙집권적’이다. 어떤 극적 구성(플롯)을 전달하기 위해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만들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갖가지 영화적 수단을 총동원한다. 그런데 <올드보이>는 조금 다르다. 


물론 여기에도 극적 구성이 있고, 인물이 있고, 사건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영화적 수단들이 종속되어있지 않고 독립적이다. 말하자면 ‘지방분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각각의 요소들이 나름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인물이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사건이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영화적 기술이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그 결과 <올드보이>는 갖가지 요소가 각각 재미를 뽐내는 화려한 축제를 보여주는 영화가 되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을 듣다 보면 처음에는 멜로디가 귀에 들어온다. 그러다가 차츰 멜로디는 사라지고 첼로 소리만 남는다. 단순한 소리의 움직임, 추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히치콕의 <현기증>이 비슷한 체험을 하게 하는데, <현기증>의 현대적 버전이라 할 <올드보이>가 지향하는 세계도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올드보이>가 <현기증>과 동급의 걸작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현기증>이 이루어낸 단순함, 정수를 경험하는 느낌이 <올드보이>에는 없다. 


수영에 능숙한 어른이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최소화된 단순함으로 자기의 길을 가는 반면, 혈기왕성한 소년은 그냥 가지 않는다. 강가를 지나가는 사람도 구경하고, 갑자기 속도를 내거나 잠수도 하고, 괜히 몸을 뒤집어 하늘도 보며 간다. <현기증>이 달통한 장인의 영화라면, <올드보이>는 호기심 많은 소년의 영화 같다.


그렇다고 해서 박찬욱이 잘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박찬욱의, 최소한 <올드보이>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태도, 거대한 하나의 힘에 지배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 과거와 미래는 물론 현재에도 머무르지 않으려는 태도, 단 하나의 미덕 ‘현재 영화 보는 순간을 즐겨라’만 실천함으로써 그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태도는 분명히 지켜졌다고 생각한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오대수처럼, ‘이 순간만을 대충 즐기면서 살자고요’라는 것이 <올드보이>의 모토인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끝난 후에 뭔가(감동, 환희, 충격, 뭐 그런 따위의 것들...)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관람 즉시 영화의 내용 자체를 휘발시켜 버리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재미는 있으나 좋은 영화는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올드보이>를 보았을 때 나의 생각이 그랬다. 그러나 다시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영화 내용이 아니라, 영화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중요하고 <올드보이>에서는 그 태도가 일관성 있게 적용되었다고 느꼈다. 다시 말해 영화의 줄거리나 내용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 영화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 가치관이 주인공임을 알았다는 말이다.


대사의 경우를 보자. 

박찬욱은 영화 속에서 말(대사)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한다. 대사를 잘 쓰는 감독으로 <타짜> <도둑들>등의 최동훈 감독을 들 수 있는데, 두 사람은 아주 다르다.

 

최동훈의 대사는 재치 있고 감각적이고 재미있지만 영화 스토리의 틀 안에서 기능한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어가는 종속변수인 것이다. 그러나 <올드보이>의 대사는 이야기에 종속되어있지 않다. 자주 예상되는 틀을 넘나 든다. ‘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작품의 모든 것을 통괄하는 하나의 태도라는 말이다.

 

영화는 주고받는 정상적인 대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상황은 비정상적이다. 옥상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너는 누구냐’고 묻고, 그의 목줄을 잡고 있는 주인공 오대수가 ‘내 이름은...’ 하고 말하면 장면이 바뀌고 ‘오, 대, 수’라고 대답하는 과거의 오대수가 나타난다. 과거의 상황으로 시간이 바뀐 것이다. 

이런 식의 장면 전환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영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받는 <시민 케인>에 나온다. 어린 케인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한 후 ‘해피 뉴 이어!’로 커트되면 성인이 된 케인이 등장한다. 

이러한 시작은 ‘지금부터 영화 시작합니다. 우리 한번 재미있게 놀아보자고요!’라는 신호 같다.


이후 <올드보이>에는 말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가 사용된다. 정상적인 대사, 독백, 녹음기, 전화기 소리, 다양한 종류의 내레이션... 

그중 영화의 에필로그 부분만 살펴보자.

영화의 절정 부분, 펜트하우스에서의 광란이 우진의 자살로 마무리되면서 대수의 내레이션이 들린다. 


“여기까지가 제가 겪은 모험의 전부입니다...”


이후 대수가 쓴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보이고 그 위에 대수의 내레이션이 덧붙여지더니 이어 난데없이 설원에 앉아있는 대수와 최면술사가 보인다. 최면술사가 말한다.

“솔직히 내가 선생을 도울 이유는 없죠. 근데 말이죠. 이 마지막 한 줄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그리고 다시 대수의 편지가 보이는데 이 부분에는 아무런 대사가 없다.  

    

 ‘제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지금 <올드보이>의 대사 사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상기해주기 바란다. 앞에서 편지가 보일 때에는 대수의 내레이션이 사용되고 있고, 이어 최면술사의 대사가 나오기 때문에 이 편지의 내용도 대수의 내레이션이나 최면술사의 대사가 사용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 소리도 없이 편지의 글자를 천천히 보여준다. 

이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대수나 최면술사 대신 영화를 보는 관객 스스로가 이 대사를 말하게 된다. 대사를 없애버리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대사를 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흐름상 당연히 나와야 할 소리를 없애버리면서 관객을 강제로 참여시키는 이 시도는 무슨 뜻일까? 이 대사에 대한 강조일까?


일반적으로 묵음은 강조의 효과가 있다. 또 이 대사는 앞에서 두 번 반복으로 사용된 바 있으므로 세 번씩이나 나오는 걸 보면 분명히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있는 것도 같다. 이 말의 뜻을 되새기며 ‘아! 정말 좋은 주제야!’라고 감탄하고 감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정중하게 충고하고 싶다.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 그럴듯한 주제를 찾아내고 가슴 울리는 감동을 먹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볼 것이 아니라 근처 엿 가게에 가서 한주먹 가득 엿을 사서 드시라고.

여기서 대사를 묵음 처리한 것은 분명 의외이고 눈에 띄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진이 대수에게 ‘그날 일을 왜 잊어버렸는지 아느냐. 그냥 잊어버린 거다’라고 한 것처럼 그냥 그렇게 한 것이다. 흔히 해왔던 대로 재미없게, 사람들이 예상하는 대로 하기 싫어서 그냥 대사를 없애고 문장만 차근차근 보여준 것이다. 관객의 예상을 어긋나게 영화를 진행시키는 것, 이것이 <올드보이>의 중요한 목표이다. 그래야 게임이니까, 그래야 재미있으니까.     

<현기증>이 최고의 맛을 보여주는 정갈한 단품 요리라면, <올드보이>는 풍성하고 다양한 메뉴를 자랑하는 뷔페식 요리라고 할 수 있다. 뷔페가 좋은 이유는 한 접시에 여러 가지를 동시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어가 많다는 것이다.


앞에서 대사 얘기를 했지만 대사는 대사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공간은 공간대로,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각자 자신의 길을 간다. 때로는 서로 겹치고 때로는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지면서 다양하게 조응한다. 이야기가 주된 역할을 하고 다른 요소들이 그것에 종속되는 일반적인 영화들과 다르다. 

이 경우를 보자.


대수가 감옥에서 방출된 후 횟집 앞에서 수족관을 구경하고 있다. 혼잣말로 수족관의 돌돔에 대해 잡학 지식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던 중 누추한 행색의 남자가 다가오자 말을 멈추고 ‘이게 무슨 냄새지?’ 하며 긴장한다. 남자는 지갑과 핸드폰을 건네주며 “나한테 뭐 물어볼 생각 하지 마. 나, 하나도 몰라.”라고 말하고 가버린다.


이거 얼핏 생각하면 단순한 장면이지만, 따져보면 복잡한 구석이 있다. 

먼저 남자의 대사. 그의 입장에서는 진실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약간의 돈을 받고 심부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냄새는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대수가 ‘이게 무슨 냄새지?’ 하고 말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왜? 지난 15년 동안 지겹도록 맡아왔던 바로 그 냄새니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삼시 세 끼, 군만두의 냄새니까... 

물론 명시적으로 남자가 군만두를 먹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입안에 불룩하게 뭔가를 먹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단순한 악취 같은 거라면 대수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강력하게 그를 긴장시키는 냄새인 것이고, 그건 남자의 입 안에 가득한 군만두의 냄새인 것이다. 

말과 실제의 뜻, 청각과 후각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이런 식의 복합 레이어가 <올드보이>에는 널려있다.   

  

내레이션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대수의 내레이션이 등장하는 것은 그가 감옥에 갇히고 처음 발버둥을 친 다음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수; 그때 그들이 15년이라고 말해줬다면, 조금이라도 견디기가 쉬워졌을까? ...아니었을까?

     


이 첫 내레이션의 특징은 말하는 대수의 시점에 있다. 현재 시점이고, 아마 모든 상황이 다 끝난 다음일 것이다. 

혹자는 이 내레이션이 대수가 최면술사에게 쓴 부탁의 편지일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대수의 내레이션은 주로 대수의 주관적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는데 쓰이고 있는데, 그게 이야기의 전개나 화면을 설명하기보다는 나름의 멋을 부리고 재미를 주려고 애쓴다.


앞의 내레이션이 전하고자 하는 정보는 ‘대수가 15년 동안 갇히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걸 전달하는 문장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그게 15년의 시작이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고, ‘그때는 전혀 몰랐다...’는 영탄조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데 대수는 어떻게 말하는가? 


‘그때 그들이 15년이라고 말해줬다면, 

조금이라도 견디기가 쉬워졌을까? 

...아니었을까?


가정법이고, 의문문이고, 힙합의 랩처럼 각운을 맞춘 반복 어법이다. 

멋있지 않은가? 일부러 가장 폼나는 대사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괜히 러시아군이 체첸 반군에게 쓴 최면 가스를 얘기해서 지식을 자랑하고, 옷도 갈아입혀주고 청소도 해주고 머리도 깎아준다며 고마운 놈들이라고 넓은 아량을 보이며 (그러나 그 청소의 결과물들은 대수가 아내를 죽인 증거물로 조작된다. 오대수 바보!), 

‘만약에 당신이 비 오는 날 공중전화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보라색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를 만나게 된다면 난 당신이 텔레비전과 친해지길 권하고 싶다’고 주제넘은 충고를 한다. 

만약에 내가 비 오는 날 공중전화 앞에서 오대수를 만나게 된다면 ‘너나 잘하세요’라고 권하고 싶다.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다. ‘난 당신이 텔레비전과 친해지길 권하고 싶다’는 대수의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최면술사? 아니다. 미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지금 대수는 우리에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직접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 속에 화자로서 간접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직접,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손등에 문신을 새기는 장면이 보이면서 ‘처음엔 여섯 줄을 한꺼번에 새겨야 한다. 내년부턴 좀 편해지겠지’라고 말하는 것이 혼잣말이 아니라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내레이션이, 대사가, 음악이, 스토리를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관객을 향해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올드보이>는 해방이 된다. 스토리로부터 해방되어 생산자(감독)와 소비자(관객)의 직접 거래가 이루어진다. 생산자의 목표는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재미를 주는 것이다. 그 재미를 위해 때로는 스토리를 따라가고, 때로는 앞서가고, 때로는 벗어나면서 관객을 즐겁게 한다. 

‘십 년 동안의 상상훈련, 과연 실전에 쓸모가 있을까?’ 했을 때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던 것처럼 

<올드보이>에서 스토리는 때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러한 해체주의적, 탈 중심주의적 태도가 <올드보이>에서는 잘 구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그렇다. 

감옥에서 방출된 대수가 미도를 만나게 되고, 미도는 기절한 대수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사소한 갈등을 겪고 나서 대수에게 민해경의 노래 <보고 싶은 얼굴> 얘기를 한 미도는  “그, 개미요. 아직도 나와요?‘ 하며 궁금해한다.  

   

미도; 고독- 하면 개미죠. 내가 만나본 진짜 외로운 사람들은 다 잠깐이라도 개미 환각 겪었어.   

  

그리고는 바로 그 장면이 나온다. 

미도가 “그래서 외로운 사람들은 개미 생각 자꾸 하게 되나 봐. 물론 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지만.”이라고 말할 때 또 다른 화면이 중첩되면서 달려오는 지하철이 보인다. 

그리고 울고 있는 미도와 외로운 개미 한 마리가 보이는데, 영화의 문맥상 동떨어진 특이한 장면이다. 영화는 대수와 우진 중심으로 진행되고 그 외 다른 인물을 설명하지 않으며, 미도가 중요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속까지 묘사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다.


그런데 왜 흐름을 벗어나면서까지 미도의 심리 쇼트를 보여주는 걸까? 

처음 달려오는 지하철을 미도의 얼굴과 함께 보여줄 때 마치 그것이 미도의 회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는 미도에게 공감하고, 그의 고독에 연민을 느낀다. 그렇게 은근히 미도의 외로움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다음 장면에서 미도가 눈물을 닦고 대수의 팔을 베고 누울 때 그 연대감에 동의하게 된다. 

개미 환상은 대수와 미도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아주 효과적인 매개체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상 전개와 별개로 이 지하철 환상 씬이 의도하는 바는, 이는 일종의 ‘박찬욱식 조크’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데 있다. 

“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지만”이라는 미도의 말에 대한 폭로성 화면, 다시 말해 ‘아니래요. 얘, 지금 거짓말하는 거래요’ 하고 관객에게 고자질하려는 의도가 더 중요하다. 이야기의 흐름과는 별개로 관객을 상대로 유희를 하는 게 <올드보이>의 핵심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뜬금없는, 맥락을 벗어나는 유희 본능은 시도 때도 없이 돌출한다.

군만두를 맛보며 중국집을 찾아다니던 대수는 드디어 그 집이 ‘자청룡’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군만두를 주문한다. 배달원을 따라가 갇혀있던 장소에 도착하는 대수. 숨이 차서 헉헉대는 대수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배달원에게 대수가 말한다.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주방에 얘기해라. 군만두에 부추 좀 웬만큼 넣으라고.” 

    

대수는 지금 지난 15년의 복수를 하려는 중이다. 군만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그를 감금했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하고, 오랫동안, 토하면서 군만두 먹으면서까지 추적하던 바로 그 감금방에 도착한 시점이다. 

그런 사람이 한가하게 군만두 얘기를 할 것 같은가? 이건 주인공 오대수의 대사가 아니라 감독 박찬욱이 오대수의 입을 빌어 웃기려고 하는 대사이다. 질주하는 서사를 중단시키고 잠시 곁가지로 비트는 것이다. 

왜냐고?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뻔한 게 싫으니까.


이것도 비슷한 경우다. 대수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미도를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감금방에 맡기려고 폭력배 두목 박철웅에게 간다. 대수가 보호의 대가로 돈을 주려 하자, ‘적의 적은 친구’라며 거절하는 철웅에게 반지를 건네준다. 

앞에서 대수는 ‘미도의 유방을 만졌다’며 철웅의 손을 자르려고 했고, 우진은 그런 대수에게 그 ‘미도의 유방 만진 손’을 대수에게 보낸 바 있다. 그리고 반지는 그 잘린 손에 끼워져 있던 것이다.

화면은 대수가 주는 반지를 건네받는 철웅의 클로즈 쇼트이고, 그 위에 미도의 대사가 들린다.   

  

“손은 썩어서 그냥 버렸어요.”     


이 대목에서 나는 <올드보이>의 감독인 박찬욱에게 정말 물어보고 싶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영화를 보고 있는 내가 어떻게 반응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여러 번 <올드보이>를 보았고, 볼 때마다 이 부분이 재미있었지만 한 번도 웃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고 갑자기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웃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이미 지나가버린 후였다. 만약 이 대목에서 진짜 타이밍 맞춰 웃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할 용의가 있다. 

웃으라고?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거라고? 웃을 시간을 안 주면서 어떻게 웃으라는 말인가? ...그리하여, 웃지 못하는 나는 고독하게 운다.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 <고독>을 읊조리면서.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감독 박찬욱이 혹시 ADHD 환자가 아닐까 추측하며, 만약 박찬욱 감독이 이 글을 본다면 내 말을 듣고 정신과 진단을 받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위의 상황에서 “손은 썩어서 그냥 버렸어요” 같은 대사를 쓰지 않는다. 그게 잘린 손의 당사자인 박철웅을 위로하는 말인가? ‘사실 그것도 갖다 드려야 되는데 죄송해요’라고 말하고 싶은가? 지금 약 올리고 있다는 거 알고 있는가?


박찬욱은 짓궂다. 개구쟁이 말썽꾸러기 과잉행동장애 소년 같다. 평범하게 예측 가능한 전개를 싫어한다. ‘과잉의 축제’라고 제목을 단 것은 <올드보이>가 그러한 과잉을 의도적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가장 즐거운 사람은 물론 감독 자신이다. 박찬욱은 “손은 썩어서 그냥 버렸어요”라는 대사를 녹음하고는 속으로 낄낄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타이밍 뺏겼지? 아마 니들 아무도 못 웃을걸?’ 하고 관객을 놀리면서 말이다. 

    

타이밍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박찬욱은 타이밍의 예술가다. 전체적인 호흡, 박자를 가지고 노는 능력이 정말 탁월하다. 예를 들어보자.


대수에게 이빨을 뽑힌 철웅이 복수를 하려고 미도를 농락한다. 우진의 언질을 받고 급히 뛰어간 대수 역시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 

이때 미도가 “살려주세요 아저씨” 하고 울먹이자 “내가 죽게 생겼다”라고 혼잣말하는 것이 <올드보이>에서 당연한 처리방법임을 이제는 알 것이다.


장도리를 들고 새로 해넣은 이를 보이며 대수 앞에 앉는 철웅이 “여기 치과 잘 하더라”라고 말한다.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이 이를 뽑아버리겠다는 예고이고, 치과의 명함을 대수 옷 주머니에 넣어주는 친절함이 역시 박찬욱식 조크. 

그리고 시작되는 음악 비발디의 <사계- 겨울> 멜로디! 또 다른 축제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대수의 이를 뽑은 공포스러운 과정이 경쾌한 음악소리와 함께 진행되고 미도의 비명을 절정으로 그 과정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철웅의 대사.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존나 용감해질 수 있어. 이번엔, 진짜 간다.”     


다시 공포가 시작되나 싶을 순간 대수가 반격을 하려고 하고 또 때맞춰 철웅의 전화벨이 울린다. 

서프라이즈와 서스펜스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스토리의 시간을 밀고 당기는 탁월한 박자 감각을 보라.



이 상황의 핵심은 ‘철웅이 대수의 이를 강제로 뽑는다’는 것이다. ‘내가 죽게 생겼다’는 대수의 내레이션 직후 장도리를 든 철웅이 대수 앞에 앉으면 우리는 철웅이 이를 뽑으려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때 철웅이 명함을 대수에게 주며 “여기 치과 잘하더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시간적으로 이를 뽑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작하려는 순간 끝난 이후의 상황을 미리 단정해버림으로써 훌쩍 스토리의 시간을 비약해 버린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정해진 시간 배열을 흩트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공포스러운 이빨 뽑기 시간이 진행되지만 이내 그것이 가짜였음이 드러난다. 스토리의 시간이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명함을 통해 당겨진 시간이 여기서는 밀려난다. 

그리고 철웅의 대사로 잠시 정지했다가 다시 시작되려 할 때 대수의 반격 시도를 보여주으로써 시간을 비틀어놓는다. 그리고 핸드폰이 울리며 이제까지의 모든 시간들을 무효화해 버린다. 

시간을 당기고 밀고 멈추고 다시 시작하다가 갑자기 끝내는 다양한 기술이 간단한 하나의 장면에서 한꺼번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탁월한 박자 감각을 볼 수 있는 장면이 또 있다. 이건 스토리의 시간을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니고 커트의 리듬을 타는 것이지만 역시 박찬욱의 박자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장면이다. 

대수가 옥상에 버려져서 자살남을 만난 후 거리에 나온 상황이다.


“집도 없어졌다. 친구나 친척집에 전화를 할 수도 없다. 난 아내를 살해한 사람이니까... 난 도망자니까.”


대수의 내레이션과 함께 카메라가 아래로 이동하면서 건들거리고 있는 부랑아들을 보여준다. 

이어 멀리 대수가 계단을 내려오고, 갑자기 커트되어 부랑아가 피우고 있는 담배를 말도 없이 빼앗아 피우는 대수를 보여준다. 담배 피우는 대수의 입 빅 클로스업. 

대수 쓰러지고 부랑아가 “이 좃방새가...” 욕을 하며 대수를 발로 걷어찬다. 뒹굴어 떨어지는 대수. 


여기까지의 커트 리듬은 사실 예민한 부분이라 일반적으로 즐기기 어려울 수 있다. 커트 길이의 변화, 동작 방향과 속도의 변화 등을 느끼면서 보다 보면 차츰 그 리듬감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보는 재미의 또 다른 영역인 셈이다.


맞고 쓰러진 대수가 천천히 손을 올려 담배를 피우며 내레이션, “좃방새...

이어 슬로 모션으로 동작이 바뀌면서 일어나 부랑아들에게 가는 대수가 보인다. 

계속되는 내레이션. “처음 듣는다. 텔레비전은 욕을 안 가르쳐주니까...”

싸움의 중간에 동작은 패스트 모션으로 바뀌고 다시 정상 속도로 돌아온다. 

이어지는 내레이션. “십 년 동안의 상상훈련, 과연 실전에 쓸모가 있을까? ...있다!” 

싸움의 결과를 굳이 볼 필요가 없으므로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움직여 암전 효과를 내며 끝맺는다.


자, 이빨 뽑는 장면에서 스토리의 시간을 조절하는 박자 감각과 여기 부랑아 장면에서 영화적 묘사의 시간을 구사하는 박자 감각을 느낀 사람 있으면 손 들어라. 

만약 있다면 당신은 전문적인 영화교육을 받은 사람이거나 영화적 감각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좋은 영화는 일반적인 대중 관객도 만족시키지만, 이렇게 전문적인 관객의 눈과 귀도 즐겁게 한다.   

  

얘기 나온 김에 내가 생각하는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에 대해 말해보자. 

나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라고 생각한다. 이때 젊고 싱싱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고, 패기 있는 성취들이 이루어졌다. 우연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산업적 환경이 그걸 뒷받침했다고 본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영화들, <플란다스의 개> <해피엔드> <사마리아> 등이 모두 그때 나온 작품들이다.


흔히 박찬욱의 영화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영화로 <박쥐>를 들고, 나도 일정 부분 거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나 왠지 박수를 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박찬욱의 최고이고, 한국영화 사상 최고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복수는 나의 것>의 마지막 장면이다. 솔직히 <복수는 나의 것> 영화 자체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이 에필로그의 장면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다. 정말, 갑자기, 홀연히 나타난, 한국영화 최고의 축복의 순간이다!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 다음 작품인데, <올드보이>에서 보이는 그 화려하고 신나는 과잉의 축제가 사실상 <복수는 나의 것> 에필로그에서 경험한 완전함에 대한 뒤풀이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예술작품의 감상은 어차피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 내가 여기서 그 장면을 꼼꼼하게 재현한다고 해서 내가 받은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건 경험의 부분이다. 직접 느껴야 한다. 그 감흥은 말로 옮기는 순간 휘발해서 사라진다. 

<복수는 나의 것>의 이 에필로그는 극 중 아나키스트 집단이 송강호를 응징하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히치콕의 재림!’ ‘신이 내렸다!’는 생각을 하는데, 모든 여러분이 나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다. 차라리 이렇게 변명을 하고 싶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나름대로 영화를 볼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올드보이>는 모든 면에서 화려한 볼거리와 기교를 구사하는 ‘과잉의 축제’ 같은 영화지만, 특히 시간과 공간의 사용에 관해서는 따로 책을 한 권 써도 될 만큼 다양한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공간적으로 상승과 하강, 시간적인 축약과 의도적 늘임, 뒤집음, 생략 등 일일이 예를 들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야말로 테크닉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는 그런 영화적 기법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이제는 간단하게나마 <올드보이>의 스토리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얘기하고 마무리하도록 하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iuard, 1895 ~ 1952년)가 쓴 <커브>라는 시의 전문이다. 제목과 함께 생각해봤을 때 화자인 ‘나’가 소망하는 것이 커브인지 직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금지된 것, 금기를 행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올드보이>에서 다루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금기에 대한 위반’의 문제이다. 


<올드보이>에서 보이는 위반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가볍게 주취난동에서부터 폭력, 감금, 패싸움, 산 채로 먹기, 엿보기, 신체절단, 살인, 자살... 그리고 그 극단에 근친상간이 자리한다.


근친상간의 모티브는 뿌리 깊은 것이다. 

스토리 예술의 시원이 되는 그리스 시대부터 다루어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의 기원이 된, 그리하여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라는 이름도 바로 그 ‘오이디푸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 전통 깊은 소재라는 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혹은 근친상간에 대해서만 해도 책 한 권은 써야 할 정도로 복잡한 얘기이고, 이것이 <올드보이>의 주제와 직접 연관되는 것도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자.

사실 <올드보이>가 근친상간을 다루는 방식은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다. 많은 작품들이 근친상간의 가치 전복적 의미에 집중하여 그것의 위반 과정과 죄책감, 극복 혹은 좌절의 과정을 다루는데 반해, <올드보이>는 근친상간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놓고, 다시 말해서 그것의 가치적 복적 의미를 무시해버리고, ‘근친상간이 일어난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특이한 시점이다. 

일단 영화 속의 과정을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올드보이>에는 두 개의 근친상간이 보인다. 먼저 보이는 대수와 미도의 섹스는 당사자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먼저 이루어지고, 우진과 수아의 (유사) 섹스는  숨 막히는 몰입감을 제공하며 (실제로, 그 결정적 순간에는 배경음악마저도 숨을 죽인다) 아무런 사전 예고나 망설임 없이 보이다가 중지된다.



죄책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수의 목격담이 퍼진 이후 수아가 겪은 과정이 내레이션으로 간단히 설명될 뿐, 바로 수아의 자살 장면으로 넘어간다. 

대수의 경우도 죄책감을 표현하는 대목은 없다. 미도가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 대수가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분노의 폭발이고, 이어 정신이 돌아와 내뱉은 첫마디가 “미도는 모르지?”라는 말이다. 

미도가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대수는 자신의 혀를 자른다.


죽지 않는다! 대수는 스스로 혀를 자르고 살아서 미도와의 관계를 유지해간다. 

우진-수아 커플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에 주목하라.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이라는 소재를 통해 죄의식을 견디고 살아남는 것, 도덕적 중압감을 떨치고 나의 선택을 완성해내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히치콕의 <현기증> 얘기를 했으니 비교해서 말하자면, <현기증>이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올드보이>는 ‘죄의식(더 폭넓게 말하면 원죄)을 껴안고 살아가는 용기’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만하다.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은 커다란 죄’라고 하는 기존 질서의 도덕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근친상간처럼 사회적 비난을 받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면 책임을 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나하고 난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라고 물으면서.


흔히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올드보이>는 복수를 다룬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장사꾼의 말을 100% 믿는 건  바보가 하는 일 아닌가?  

복수가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일종의 ‘맥거핀’이다. 복수극인 것처럼 관객을 유혹할 뿐이라는 얘기다.   

  

<올드보이>에서 복수라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오대수의 복수와 이우진의 복수.

먼저 오대수의 복수를 살펴보자. 

대수는 자신을 가둔 자를 찾아내서 ‘머리털 끝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 먹으려고’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러나 그 결과 그가 얻은 것은 복수가 아니라 미도라는 여자와,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어떤 사연의 진실이다. 다시 말해서 대수의 과정은 복수의 길이 아니라, 술주정이나 하면서 그날그날 대충 수습하면서 살던 무지한 자가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사소한 죄의 전모를 알아가는 자아성찰의 길이었던 것이다. 

대수는 감금방에서 자신의 ‘옥중일기이자 악행의 자서전’을 쓰면서 “그런대로 무난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았다”라고 탄식한다. 그 ‘너무 많았던’ 악행 중에서 너무나 사소해서 기억에서조차 지워졌던 우진-수아의 일은 단지 그 성찰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우진의 복수는 또 어떤가? 

우진이 대수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우진이 대수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5년 동안의 감금이 하나의 복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진의 말대로 그건 그의 초점이 아니다. 우진은 자신의 입으로 ‘왜 가뒀을까가 아니라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딱 15년 만에 풀어줬을까?’ 하는 질문이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굉장히 중요한 관점인 것처럼 우진의 입을 통해 말해지던 이 말에 대해, 영화는 사실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재미 삼아, 멋있자고 해본 얘기였어요’라든가, ‘일종의 맥거핀이지요. 얘기를 끌어가기 위한.’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은근슬쩍 끝내버린다.

그러나 용의자의 진술은 아무리 사소한 농담이라도 놓치면 안 되는 것처럼, 감독이 슬쩍 흘려버렸다고 해서 우리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 이 말이야말로 <올드보이>의 스토리가 갖는 핵심적인 주제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딱 15년 만에 풀어줬을까? 

먼저 팩트 체크.


= 이우진은 오대수를 15년 동안 감금했다가 풀어준다. 

= 대수와 미도에게 최면을 걸어서 서로 가까워지도록 유도한다. 

= 대수는 감금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 우진의 존재를 알게 된다. 

= 대수와 미도가 섹스를 하는데, 나중에 두 사람은 부녀 사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 우진과 누나 수아 사이에 근친상간이 있었고, 그걸 목격한 대수의 발설로 결국 수아가 자살했다. 

= 미도가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 대수가 스스로 혀를 자르고 우진에게 용서를 빈다. 

= 우진은 자살하고, 대수는 최면으로 과거를 지운 후 미도와 재회한다.


일단 15년이라는 시간은 쉽게 설명이 된다. 대수와 미도의 근친상간이 애당초 우진이 계획한 바라면 미도가 성인이 되는 시점이 필요했을 것이다. 미도가 미성년자라면 관계를 만들기가 다소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우진이 대수를 15년 만에 풀어준 이유는 대수와 미도의 근친상간을 유도해내기 위해서인 셈이다.

지금 우리는 우진의 복수에 대해서, 정확히 말하면 우진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 우진이 대수를 풀어준 이후 대수가 얻은 것을 살펴보면 우진이 뭘 원하고 계획했던가를 알 수 있다. 

대수는 딸 미도와 사랑하게 되고 섹스를 하고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까맣게 잊고 있던 우연한 목격과 사소한 발설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 알게 된다. 근친상간을 발설한 죄로 자신이 근친상간의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대수의 입장에서는 분명 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진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다. 물론 우진도 복수심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기는 하다. (“그동안 잘 지내왔어요. 심심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고...  상처받은 자에게 복수심만큼 잘 듣는 처방도 없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외롭다. (“잠도 안 와요, 고독해서.” )


우진에게 복수심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자신이 의도한 바를 완성하기 위해 복수심을 일으켜 에너지로 삼은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진이 원하는 바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처음 영화에 등장했을 때 우진은 당당하고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다. 그러나 대수가 자신의 계획대로 올가미에 걸리면서 점점 우진은 감정적이 되고 흔들린다.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에 의문을 표하고 (“실장님, 미도는 진짜로 오대수를 사랑하게 된 걸까요? 벌써?”), 심지어는 눈물을 보이기까지 한다. 절대적 존재에서 고통받고 번민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우진의 변화는 우진이 목적지에 가까이 왔음을, 그동안 그가 고통스럽게  마지막 순간을 기다려왔음을 증명한다. 우진은 대수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대수가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을 찾아와 이 지옥 같은 세상살이를 끝내주기를,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근친상간의 형벌을 계속 살아주기를 고대했다는 말이다. 


우진에게 있어서 대수는 자신의 후계자이다. 근친상간이라는, 삶의 정수이자 아름다움의 원천이자 원죄를 이어받을 후계자. 

그 후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우진은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사랑하는 누나 수아에게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억누르고, ‘고독해서 잠도 안 오는’ 더 넓은 감옥에서의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근친상간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 진실의 촛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고 우진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대수에게 공을 들였던 것이다. 복수를 한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가꾸어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대수는 이우진의 분신이자 아들이다. 여호와가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냈듯이 우진은 대수를 세상에 보낸 것이다.


펜트 하우스에서 대수와 우진이 만나던 장면을 떠올려보라. 우진이 옷을 갈아입으며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15년 만에 풀어줬을까... 요?’하고 물을 때 옷장의 십자가 모양이 닫혀 사라진다. 

구원의 시간은 사라졌고, 보라색 상자가 열리며 대수의 근친상간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원죄가 되었다. 후계가 완성이 된 것이다. 

    

처음 오대수와 이우진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감금방에서 나온 대수가 미도의 횟집에 갔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은 대수는 “누구냐 넌?”이라고 묻고, 전화 속의 우진은 “옷은... 마음에 들어요?” 하고 역으로 묻는다. 이런 뜻이다.   

  

누구냐 넌?(대수) ; 나를 이렇게 괴물로 만든 (나를 창조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옷은 마음에 들어요?(우진) ; 나와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너는 나의 분신이고 나의 후계자다.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하지 말라. 정확히 말하면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올드보이>의 감독 박찬욱의 말이다. 

펜트 하우스에서 대수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면서(“들어봐요. 내 얘긴 되게 재밌어.”) 앞의 대사가 또 한 번 나온다. 그때 갑자기 화면 분할이 되면서 대수와 우진의 얼굴이 절반씩 보인다. 

‘누구냐 넌?’에서 두 얼굴이 합쳐지기 시작하더니 ‘옷은 마음에 들어요?’가 끝나면 하나로 완성이 된다. 

오대수와 이우진은 하나라는 말이다.


이 화면 분할 장면은 사실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페르소나(Persona)>에서 사용된 기법을 그대로 재사용한 것이다. 베리만 감독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장면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이 뜻, 다 아시죠?’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이 대목에서 갑자기 제시된 것은 아니다. 

우진이 “미도는 진짜루 오대수를 사랑하게 된 걸까요? 벌써?”라고 말하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 말을 하기 바로 전 실장이 “오늘은 이만 주무시죠”라고 말하자 우진은 “잠도 안 와요. 고독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대화의 중간에 맥락 없이 감금방에 홀로 앉아있는 대수의 모습이 보인다. 이 때는 대수가 감금방에 있던 때도 아니고, 대수가 언급되던 때도 아니다. 미도 얘기가 초점이다. 그런데 왜 감금방의 대수가 보이는 걸까? 감금방의 고독하던 대수 모습과 지금의 우진 자신이 똑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직후 우진이 대수와 미도가 잠자는 모텔로 찾아온 장면을 보자. 

수면가스로 두 사람을 잠재운 후 방독면을 쓴 우진이 들어온다. 호흡소리가 크게 강조된 가운데 우진은 벌거벗고 누운 두 사람을 보다가 미도 옆에 앉는다. 음미하듯 손가락으로 미도의 벗은 살결을 더듬는 우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미도에 대한 성적 욕망은 아니라고 볼 때, 이 행동의 의미는 분명히 수아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우진은 지금 수아를 그리워하고, 대수와 미도의 근친상간을 부러워하고 있다! 대수와 자신의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정리하면, <올드보이>는 우진이 대수에게 복수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평범한 삶의 이면에 숨겨진 가혹한 진실을 직시하고 껴안도록 대수를 견인해내는 드라마이다. <올드보이>에는 하루하루 건성으로 살아가던 보통사람 오대수가 그 껍데기 삶의 이면에 처절한 피의 냄새가 배어있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참혹한 진실을 외면하지 말도록 권고하면서, 각자의 선택에 따른 진실한 삶을 살아가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용기의 반대말이 비겁이라고 할 때, 우리의 ‘친절한 찬욱 씨’는 비겁해지지 않는 방법도 꼼꼼히 챙겨준다. 

극 중에서 태웅은 대수의 이를 뽑으면서 자상하게 충고를 한다.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하지를 말아봐. 존나 용감해질 수 있어.”


혹시 깡패가 하는 말이라 흘려들을까 염려스러웠는지 친절한 찬욱 씨는 비슷한 언급을 다시 들려준다. 대수와 미도가 처음 섹스를 나누는 장면 마지막 부분(그리고 이어서 대수가 미도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이 순간에 대수가 하는 말이므로 더욱 중요하게 들린다)에 뜬금없이 들어가는 대수의 내레이션.     


“앞날을 걱정하지 말라... 상상하지 말라.”     


이건 사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충고 아닌가? 

지금 대수와 미도는 섹스를 나누는 중이고, 두 사람은 부녀관계이다. 근친상간의 현장을 보여주면서 걱정하지 말고 상상하지도 말라고 한다. 현재의 선택에 충실하고 그것을 맘껏 누리라고 말한다. 친절해도 이건 너무 친절하다. 

이 당시는 대수가 미도가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올드보이>의 내레이션은 시점이 그 당시가 아니다. 대수의 말처럼 보이지만 정교하게 꾸며진, 작가의 것이다. 대수의 말이 아니라, 대수의 말인 척하면서 관객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는 뜻이다.    

 

이런 식의 반복적 언급- 보통 이런 걸 ‘모티브’라고 부른다. 소품이나 이미지, 소리나 의미어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주제를 부각시킨다-은 또 있다. 고독(엘라 윌콕스의 시, 개미, 우진의 대사 “잠도 안 와요 고독해서”),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언급, ‘모래알이든 바위 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말 등... 

상승과 하강 등의 위치에 대한 모티브로 있는데, 이런 다양한 레이어의 사용은 <올드보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제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자.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대수는 최면술사에게 다시 최면을 걸어줄 것을 부탁하고, 최면술사는 최면으로 ‘진실을 아는 대수’를 없애준다. 

진실의 기억을 지운 대수만 남아서 눈밭에 쓰러져 있다가 빨간 옷을 입고 찾아은 미도를 만난다. 대수의 초췌한 몰골에 미도가 약간 속상한 내색을 하지만 이내 마음을 풀고 대수를 껴안으며 말한다. 

“사랑해요... 아저씨.”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고 말투도 덤덤하다. 그 말을 듣는 대수는 환하게 웃을 듯 입을 움직여보지만 잘 웃어지지 않는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웃으려고 하는데 시간일 갈수록 웃음기는 점점 사라지고 울음기의 정도가 커져간다. 그러는 동안에 암전.     


순진하게 이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말하지 말자. 

정말 최면으로 대수가 ‘진실의 기억’을 죽여버렸다고 생각하는가? 진실이라는 것이 정말 최면 따위로 없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아무리 없애려고 발버둥 쳐도 기억 저편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떠올라서 우리의 비겁함을 응징한다. 그 진실의 크기가 모래알이던 바윗덩어리이던 우리의 삶에 균열을 내기에는 충분히 강력하다. 

그러니까, 만약에 당신이 비 오는 날 공중전화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보라색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를 만나게 된다면, 혹은 어느 골목길 7,8층 빌딩에서 벽돌 한 장이 떨어지는 것을 본다면, 눈 쌓인 숲 속 어디를 거니는 중에 딸랑딸랑 최면을 유도하는 방울소리를 듣게 된다면, 아! 또 하나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하고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진실은 항상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직면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상상하지 말라. 상상하는 순간 진실은 흐려지고 현재는 미래로 도망간다. “앞날을 걱정하지 말라. 상상하지 말라”는 대수의 내레이션은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만 집중하기를 권하고 있다.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할 때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근친상간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소재를 통해 <올드보이>는 바로 이런 ‘행동하는 용기’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은 두렵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사랑해요... 아저씨.”라는 말을 듣고 우는 듯 웃는, 혹은 웃는 듯 우는 대수의 얼굴은 바로 그러한 삶의 양면성을 그대로 표현해준다. 

‘더 넓은 감옥에서의 삶은 안녕하냐?’는 우진의 물음은 ‘우리는 안녕할 수가 없다’는 대답을 포함하고 있다. 

어떻게 안녕할 수가 있겠는가?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기억하는 사람이, 518 광주의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이, 4월 어느 우울한 봄날 세월호의 악몽을 기억하는 우리가 안녕하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면서, 현재에 최대한 매진하면서 나의 선택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수가 ‘진실을 기억하는 몬스터’를 없애지 못했다면 최면은 성공하지 못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면은 성공했다. 애초부터 대수를 위한 최면이 아니었으니까 대수가 기억을 잃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진실의 기억은 잃어버릴 수도 없고 잃어버려서도 안된다. 

최면은 <올드보이>의 감독, 우리의 ‘친절한 찬욱 씨’가 관객들에게 주는 마지막 서비스이다. 최면의 대상은 대수가 아니라 관객이었다는 말이다.


감독 박찬욱은 예의 바른 사람이다. 유머도 있고, 다재다능하고, 박학다식하고, 교양 있고, 사려도 깊다. 혹시 일부 관객이 근친상간이라는 소재에 부담감을 가지고 있을까봐, 혹시라도 영화가 끝나고 나서 까지 괴로워할까 봐, 그런 관객을 위해 최면을 건다. 이제까지 본 것을 다 잊어버리라고. 나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재미있었던 것만 기억하라고. 

최면을 경험한 관객은 내심 가졌을지도 모를 도덕적 거부감을 지워버린다. 하얀 눈밭을 보면서 우리는 말끔하게 세탁이 된다. 

엔딩 크레디트. 대수와 미도가 설산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보는 설산을 보면서 우리도 휴식과 위안을 얻는다. 자극적인 코스요리를 먹고 나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디저트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듯이 그렇게 우리는 <올드보이>라는 과잉의 축제를 끝내게 되는 것이다.    

      


*** 결정적 장면 *** 

    

과잉의 축제답게 <올드보이>에는 좋은 장면들이 많다. 앞에 언급한 길거리 불량배 장면을 비롯해서 이빨 뽑는 장면(대수가 철웅의 이를 뽑는 클로스 쇼트에서 장도리를 혀로 애무하는 그 섬세함이란!), 과거 상록고등학교에서의 히치콕식 추적 장면과 훔쳐보기 장면 등...


물론 제일 유명한 것은 대수가 산낙지를 먹는 장면과 장도리 격투 장면이다. 나무 위키에 의하면, 낙지 먹는 장면은 외국관객이 뽑은 가장 잔인한 장면이면서 ‘가장 역겨운 식품 관련 장면’에서도 1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산낙지 장면은 극적 전개상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된 좋은 장면이다. “산 것이 먹고 싶다고 했다”는 대수의 말과 함께 등장한 산낙지는 감금방에서 나온 대수가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증거이기도 하고, 15년 동안 영문도 모르고 갇혀있던 대수가 가진 증오심의 강력한 표현이기도 하다.

 

“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이 지구 상 동서남북 어디서도 니 시체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왜? 내가 잘근잘근 씹어먹을 테니까.” 


대수가 감금방에서, 또 우진의 면전에서 하는 이 말은 실제로 낙지를 잘근잘근 씹어먹는 모습과 대응하며 강한 울림을 준다. 자유를 얻은 기쁨과 쌓인 증오심을 한꺼번에 표출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장도리 격투신은 시작부터 박찬욱적이다. 

철웅의 이를 뽑고 녹음테이프를 챙긴 후 느닷없이 시작되는 이 장면은 대수가 “AB형 손들어라”라는 말로 문을 연다. 그다음 복도를 가득 채운 깡패들이 보이고, 하나둘 주춤거리며 손을 든다.


서두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사실 나는 이 장면도 외국사람이 과연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의심하는 쪽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뉘앙스, 권위적인 담임선생님이 ‘쏼라쏼라~ 나쁜 짓 한 사람 손들어’ 하자 눈치 보며 슬금슬금 손드는 학생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전형적인 박찬욱식 조크이다.

“어서 가라. 피 많이 흘렸다.”라고 하면서 인질 삼았던 깡패를 보내주고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는 대수. 

그걸 신호삼아 그 유명한 장도리 격투가 시작된다.


커트 없이 하나의 테이크로 완성이 이 격투 장면은 사실 대단히 잘 찍은 액션씬은 아니다. 정교하게 합을 맞췄다고 하나 사실적 긴박감과는 거리가 있고, 무슨 새로운 필살기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이 장면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액션 자체라기보다 적당히 합을 맞춘 그 액션을 돋보이게 만드는 분위기이다. 

그 분위기는 느리게 움직이는 카메라와 그 움직임에 조응하는 음악에서 온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뒷받침하는 카메라는 빠르지 않고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고, 음악은 마치 피곤에 지친 샐러리맨이 퇴근할 때 느끼는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너희들, 참 피곤하게 산다!’고 하는 코멘트. 

때로는 내레이션으로, 때로는 편집으로, 때로는 이미지로, <올드보이>에는 이런 식의 화법이 아주 많다.

그리고 끝났다 싶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또 나타나는 깡패들.  박찬욱식의, ‘요럴 줄 몰랐지?’ 하는 마무리이다.     


하지만 정작 나의 마음을 흔드는 장면은 다른 것이다.

대수가 우진을 찾아 펜트하우스로 가고, 그 장면과 병치되어 미도가 보인다. 

‘오늘도 무사히’를 빌고(박찬욱식 조크), 빨간 캐리어를 열어 옷을 입는다. 

그리고 바로 그 장면, 천사의 날개를 입고 어깨를 펄럭거리는 미도의 모습이 보인다. 아주 오랜 옛날 15년도 더 전에, 대충 살던 대수가 어린 딸 미도의 생일선물로 샀던 바로 그 천사의 날개가 지각 배달되어 이제야 미도에게 왔다!


사실 처음 이 장면을 볼 때는 그냥 박찬욱식 조크일 뿐이었다. 조금 전 ‘오늘도 무사히’ 그림 앞에 기도하는 미도를 보여줄 때, ‘웃어주세요’ 하고 그림의 클로즈업까지 보여줬으나 나는 웃지 못했다. 

날갯짓을 하는 미도를 보면서 ‘감독, 참 악취미야’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대목은 드마라상으로 가장 극적인 사실이 밝혀진 긴박한 상황이어서 그렇게 한가하게 농담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복해서 영화를 보면서 장면에 눈에 익게 되자 다른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슬픔이, 그야말로 비극의 페이소스가, 볼 때마다 조금씩 커지는 것을 느꼈다. 대수와 미도가 부녀관계임이 밝혀지고, 경악하는 대수의 얼굴과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라는 글귀가 보인 바로 다음 보이는 장면. 


미도가 천사의 날개를 둘러메고, ‘이게 뭐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깻짓을 한다. 

그리고 미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미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세상에서 가장 천진난만한, 순진무구한, 무심 평온한 표정을 하고서. 

그렇게 쳐다보는 미도와 눈이 마주치면 나의 가슴에는 슈욱-! 슬픔이 가득 차오른다. 

    


도대체 왜 우리의 인생은 늘 박자가 어긋나는 걸까? 

그날 미도의 생일 밤 대수가 산 생일선물이 제대로 전달되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술에 취한 대수가 공중전화를 걸다가 납치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도가 엄마를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대수가 절친 주환을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대수와 미도가 근친상간의 형벌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멀리, 대수가 우연히 우진과 수아의 은밀한 장면을 보지만 못했어도, 이유 없는 호기심으로 우진의 뒤를 쫓아가지만 않았어도, 대수가 그때 본 것을 주환에게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진실은 항상 말해짐을 전제로 한다. 말해짐을 전제하지 않는 사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말해짐을 전제할 때 그 사실이 사회적 의미를 띠게 되고, 따라서 우리는 그 사실을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애초에 우진과 수아가 사랑을 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사랑은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샘이 솟듯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걸 막으려고 할 때 왜곡이 일어나고 갖가지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지금 보이는 미도의 날갯짓은 그 비극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처음 볼 때는 우습다가 차츰 슬퍼진다. 날갯짓하는 미도의 모습이 진지하고 천연덕스러워서 더욱 그렇다. 

그러다가, 잠시 화면을 멈추고 보고 있자니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천사의 날개... 그러나 천사는 새가 아니다. 천사는 날개가 필요 없다!


미도에게는 날개가 필요 없다! 그날 생일날에도 필요 없었다. 

그러나 그날 천사의 날개를 선물 받았다면 그게 필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즐거웠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대수가 자신의 혀를 자르는 형벌을 치러야 하는 이 순간 미도는 그 날개가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낀다. 

새로운 슬픔은 거기에서 온다. 선물이 늦게 도착해서가 아니라, 필요 없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이토록 험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것 때문에 슬프다. 

그리고 미도의 클로즈업 쇼트가 보여주는 그 눈빛,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당하겠다는 듯한 그 눈빛 때문에 더욱 슬프다. 


이러한 슬픔은 이어지는 대수의 절규와 싸움 장면에서 유지 배가된다. 음악 때문이다. 격렬한 싸움이 보이지만 음악은 느리고 슬프다. 앞 장면 미도의 정조를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총소리와 함께 음악이 멈추며 대수가 하는 대사도 미도에 대한 것이다. 


“미도는 모르지?”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올드보이>는 남성 중심 영화이면서도 여성친화적인 시각이 있다. 후반으로 가면서 여성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관심의 초점도 여성에 맞춰진다. 우진은 수아 때문에 죽고, 대수는 미도를 지키기 위해 살아남는다. 

개구쟁이들이 하루종인 놀다가 엄마 품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개구쟁이 감독도 실컷 놀다가 여성의 품으로 돌아가는 건가? 영화 <올드보이>가 끝나면서 대자연 설산의 품으로 돌아가듯이...  <끝>

               


이전 08화 지금도 그놈은 살아있다! -- 영화 <살인의 추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