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해피엔드>는 한국영화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렇게 얘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해피엔드>가 ‘제일 좋은’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단한 주제의식을 보이는 작품도 아니고, 눈에 띄게 영화적인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 포스터의 선전 문구처럼 ‘세기말 치정극’으로 단순히 보아 넘겨도 되는, 무난하고 깔끔한 통속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킨 문제작도 아니고 놀라운 영화적 재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일부라도 열혈 지지층의 절대적 응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전 세계 영화 역사를 통틀어 선별한 몇 편의 영화만 이야기하는 이 자리에 <해피엔드>를 올리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일찌감치 후보작 리스트에 올려놓기는 했지만 막상 써야 할 차례가 되자 나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해피엔드>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인가? 나의 개인적 취향을 앞세워서 너무 객관적 기준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옛날 같으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문제지만, 나이가 들면 겁이 많아진다.
나는 선입견 없이 다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부디 이번에는 영화가 내 마음을 끌지 못해서,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기를 내심 바라면서 다시 보았다.
그 결과, 나는 이렇게 <해피엔드>에 대해 쓰고 있는 중이다. 수많은 영화를 보아왔지만, 다시 본다고 해서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나 생각이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하고 무난한, 깔끔한 소품이었다. 몇몇 장면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특히 최보라와 김일범이 정사를 벌이는 오피스텔 장면과 서민기가 책을 보는 헌책방의 장면- 그게 글을 써야 할 이유가 될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럼 쓰지 말아야 하나?
그런데, 그냥 포기하기에는 뭔가 미련이 남았다. 영화의 내용과 별개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게 분명했다.
그게 뭘까? 영화의 어느 지점이, 어느 대목이 나의 심금을 울린 것일까?
대체로 이런 경우는 영화 스스로가 말을 거는 것이다. 만든 제작자나 감독이 아니라, 작품 스스로가 살아서 내밀한 언어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과의 소통을, 누군가의 창작물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는 ‘유기체인 <해피엔드>’와 소통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이럴 때는, 이유를 잘 모를 때는, 기다려야 한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따져보지 말고, 상대가 스스로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마음은 고양이와 같다. 기다리면 다가오고, 관심을 보이면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든다고 할 때 꼬치꼬치 이유를 따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속는 것이다. 그건 대충의 핑계에 불과하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내가 정말로 그 사람이 ‘말을 잘하고, 유머러스하고, 능력도 있고, 배려심도 있어서’ 좋아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뭐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을 끄는 무엇 때문인 경우가 많다.
‘급히 나오느라고 머리를 제대로 못 말렸나 봐. 살짝 젖은 머리가 삐쳤는데, 그게 갑자기 사랑스러워 보이는 거야.’ 라거나,
‘분명히 재미있어하는데, 잘 못 웃어. 활짝, 환하게 웃지를 못하는 거야. 불쌍해.’라는 말들은 그런 이유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 통하고 있는 부분이 엉뚱한 때에 사소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통해 있음, 그런 마음의 소통을 ‘교감(交感)’이라고 하자. 감정이 통해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는 따로 떨어져 있지만 이미 마음으로는 하나가 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좋다 나쁘다는 식의 객관적 기준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해피엔드>의 어느 부분이 내 마음을 움직였는지 굳이 살피지 않기로 했다. 그냥 마음을 열고 <해피엔드>의 정서가 내게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숨은 고양이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렇게 기다리자 두 개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외로움’과 ‘슬픔’.
두 개가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일본 애니 <캔디> 주제가에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가 있는 걸 보면 외로움과 슬픔은 한 쌍을 이루는 말인가 보다.
그러나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다. <해피엔드>는 불륜을 소재로 한 치정극이다. 일반적으로 스릴러로 분류되는 것을 생각할 때 얼핏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이럴 때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상대가 움직이는 대로 나를 맡겨야 한다. <해피엔드>의 불륜이나 스릴이 아니라 외로움과 슬픔이 내 심금을 울렸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해피엔드>의 어느 대목에 외로움과 슬픔이 담겨 있었나? 마지막 부분, 모든 것이 끝나고 화장실에 주저앉아 흐느껴 우는 서민기(최민식이 연기) 말고는 특별히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
그러나 그 장면은 당연한 시점에 당연한 반응이었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던 장면이다.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의 파도가 출렁거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나는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불쑥, 아파트 단지의 전경이 보였다. 영화를 볼 때 둥그런 모양의 아파트 단지 주차장이 인상적이었는데, 구체적으로 그때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 혹은 감옥 같다’고 잠깐 생각했던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그리고 몇 개의 아파트 이미지와 첫 장면의 아파트 복도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외로움의 정체를 깨달았다.
외로움은 아파트에서 시작되었다!
아파트가 상징하는 의미, 현대인의 삶, 갇힌 존재, 개인은 사라지고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무생물적인 생활, 타인과의 단절...
아!
현대사회의 삶이 주는 외로움과 소외, 불안과 슬픔 그런 것들이 <해피엔드>의 배면에 스민 기본 정서였구나!
이슬비에 옷을 적시듯 나는 그 은밀한 냄새에 중독되었고, 영화에서 무엇이 등장하건 그 정서 안에서 반응하고 움직였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해피엔드>가 통째로, 한 번에 이해되었다.
좋은 대중예술 작품은 평범한 이야기 속에 자신만의 독특한 뉘앙스를 담아낸다.
우리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오만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상황을 맞게 되지만 그 바탕에는 어떤 일관된 정서가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 그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정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면서 다양한 사건을 겪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 일관된 정서, 나를 지배하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만하다.
나의 경우는 ‘적개심’과 ‘부끄러움’이 그것이었다. 어릴 때는 물론이고 성인이 된 이후 오랫동안 그걸 몰랐다가,
서른 넘어 어느 시점에선가 어렴풋이 그걸 알게 됐다. 학생 시절 농담처럼 ‘내가 여자이거나 전라도 사람이었으면 아마 혁명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의 적개심이 사회적 불의에서 비롯된 걸로 오해한 셈이다.
적개심 혹은 분노가 고착화되면 소외 혹은 고독에 빠진다. 부끄러움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열등감으로 변질된다.
불행히도 나는 내 기본 정서를 좋은 방향으로 살리지 못했고, 그 결과 오랫동안 소외와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기본 정서는 각자의 중심핵이다. 강력한 중력으로 그 정서에 맞는 상황을 끌어들인다. 우리는 각자의 에너지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서, 그 에너지가 부정적인 것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정적 에너지는 부정적 상황을 불러온다, <해피엔드>처럼.
똑같이 부정적인 에너지지만 예술작품과 현실은 정 반대의 작용을 한다. 예술 속에서 다루어지는 부정적 에너지는 우리의 마음에 다가와 작동을 하는 순간 긍정적 에너지로 변화한다. (-) 극과 (-) 극이 만나면 (+) 극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소위 말하는 예술작품의 정화작용, 카타르시스가 바로 그것이다.
<해피엔드>는 외로움이라는 나의 정서를 건드렸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마음을 정화시켰던 것이다.
치료가 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최소한 위로는 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고 난 후 느껴지던,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 좋은 쌉쌀함’은 내가 받은 그 위로의 뒷맛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가 시작하면 텅 빈 아파트(오피스텔) 복도가 보인다.
흰색 계열의 색감이 가볍게 비쳐 드는 햇살과 어울려 나른한 봄날의 권태 내지는 외로움의 느낌을 준다.
그 위로 크레디트 타이틀이 연기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복도 끝에서 오피스 정장을 입은 최보라(전도연이 연기)가 불쑥 들어와 걸어온다.
문소리가 나고, 카메라 뒤 쪽에서 한 여자가 나타나 최보라와 비껴 멀어진다. 보라를 따라 뒤로 물러서는 카메라.
아파트 문 앞에서 여자 쪽을 보고 잠시 생각하던 보라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며 김일범(주진모가 연기)이 나타난다.
일범; 어, 왔어?
보라; 누구 왔었어?
일범; 아니.
단순한 대화 후에 문이 닫히고 장면이 아파트 안으로 바뀌면 느닷없이 섹스신이 보인다.
보라와 일범의 다급하고 열정적인 섹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불쑥 보이는 섹스 장면인 데다가, 한국영화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찍혔다고 할 만큼 활기차서 보는 사람의 기분을 급상승시킨다. 매우 자극적이라는 말이다.
두 사람의 정사가 미처 마무리되지 않은 채, 정확히 말하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순간 장면은 헌 책방으로 바뀌고 구석에 앉아 낡은 소설을 읽는 서민기(최민식이 연기)가 보인다.
헌 책방 주인의 구박을 받으면서 책을 읽는 민기는 연애소설을 좋아한다. 알고 보니, 그건 민기가 책을 고르는 방법이다. 그는 책을 미리 읽어보고 살까 말까를 결정한다.
“애절하고,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연애소설”을 읽고 싶어 하지만, 막상 보이는 것들은 추리소설에 가까운 소설들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바로 이어지는 이 두 장면은 그 내용상 매우 중요하다.
먼저 보라가 일범과 벌이는 섹스. 그것은 보라가 원하는 꿈이다.
꿈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알아야 한다.
보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녀는 지금 영어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남편과 함께 유아기의 딸을 키우며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남편 민기가 실직상태라 자신이 전적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지만 경제적 압박감은 별로 없어 보인다.
대도시 서울 중산층의 안정된 생활... 그게 현재 보라의 상태다.
사람이 안정된 상태에 있을 때 취하는 태도는 대충 두 가지이다. 뭔가 변화를 시도하거나, 그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거나.
변화를 택하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현재의 안정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안정을 택하면 덜 위험하기는 하지만 심심하고 권태로울 수 있다. 게다가 그 안정이 고착화되면 의무감만 남아서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
보라는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현재의 안정도 중요하고, 새로운 변화도 필요하다. 그래서 보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꿈은 현실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욕망을 채워주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깨어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보라는 그 꿈을 현실 속에서 만들어낸다. 옛사랑의 남자와의 재회, 그게 보라의 꿈이다.
지금 보라는 그 꿈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젊은 시절 사랑하다가 헤어진,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버린 일범을 다시 만났고 그와의 밀회를 즐기고 있으니까.
일범이 새로 칫솔을 사놓은 것을 본 보라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오피스텔 온 첫날 그랬지. 여기 내 물건이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다구.
그냥 니 물건 같이 쓰고. 그냥 스쳐가듯이 왔다 가면 좋겠다구.........
자신을 없는 존재처럼 생각해달라는 말이다. 일범 혼자 사는데 자신은 그냥 덤처럼 왔다 갔다 하겠다는 말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도 일범이 그런 존재라는 말이다. 보라가 필요할 때만 있어주면 되는,
항상 내가 원할 때 꿀 수 있는 꿈이면 되는 것이다. 냉정하다고 할 정도로 계산이 분명한, 현실적인 여자다.
그런 보라의 생각이 확실히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 보라가 두 번째로 일범을 만나러 가면서 체크무늬 남방을 사서 입는다.
일범과의 만남 장소에 갔을 때, 일범도 자신과 비슷한 남방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보라는 만남을 포기하고 집으로 온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라면 오히려 좋아해야 한다. 서로 그만큼 비슷하다는 것이고 가깝다는 것이고, 그만큼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므로 즐거워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보라는 그게 두렵다. 일범이, 꿈이 자신의 현실에 간섭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꿈은 꿈일 때 달콤하고 아름답다. “친절하기 때문에” 일범과의 섹스가 좋다고 보라는 말하지만,
그건 꿈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꿈이 현실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부담스럽고 위험해진다. 보라는 본능적으로 그걸 경계하는 것이다.
보라의 꿈이 현실적이라면 민기의 꿈은 비현실적이다. 그는 허구의 세계에서 꿈을 해소한다. 낡은 책방에서 연애소설을 사 읽고, 텔레비전에서 통속 연애극과 스포츠를 본다. 그 세계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현실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헌 책이나 사 모으고 파고다 공원이나 간다’고 보라가 힐난을 해도 ‘남의 취미생활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리고 파고다 공원이 아니라 탑골공원’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현실을 위협하지 않는 꿈이라는 자부심.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안전하고 무력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던 민기의 꿈이 보라의 꿈을 제압하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게 될 줄을.
연애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추리소설로 취미를 바꾼 민기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보라의 헛된 꿈을 박살 내 버린다. 꿈에 오염된 보라까지도 처참하게 부셔버린다.
민기는 보수주의자이다. 보수주의자는 자신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평소 꼼꼼하고 소극적이던 민기가 급변하여 보라의 탈선을 응징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난 우리 연이한테 당신이, 좋은 엄마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한 그 마지노선, 민기의 기준선이 깨진 순간 이미 비극은 예정된 것이었다.
이 부분은 메인 테마와 별도로 서브테마 해석을 가능케 하는 부분이다. <해피엔드>는 ‘역할의 전도‘가 하나의 모티브를 형성한다.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뒤집혀 있다.
전통적으로 아빠는 밖에서 일하고 바람피운다. 엄마는 집에서 아이들 키우고 이런저런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그런 통속적 역할극이 <해피엔드>에서는 역전되어 보인다. 보라는 유능한 자영 사업가이고 바람을 피우며,
민기는 실업자이면서 집안일을 하고 육아를 맡아한다. 얼핏 생각하면 진보적인 페미니즘적 설정 같지만 전혀 아니다.
그 뒤집힌 상황에 대한 짜증과 불안감이 영화를 지배한다. 히스테리칼한 살해 장면은 그 짜증과 불안감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과정이다. 남성 우월 사회가 무너져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폭발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영화 초반 민기는 매사에 현실 순응적이고 자기만족적이다. 주어진 상황에 별다른 불만이 없어 보인다. 보라가 자신을 태워다 주는 민기에게 “택시기사 해도 되겠다”라고 빈정대도 민기는 별 반응이 없다. 브레이크 라이닝 바꾸라고 하면서 값을 말해줄 때 “누가 은행원 아니랄까 봐”라고 비웃어도 민기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잠자코 있다고 해서 그의 마음까지 순종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너, 이 백조 있지. 이 백조가 물 위에서 엄청 폼 나고 우아하게 떠있지?
너 근데 물 속은 어떤 줄 알아? 졸라리 헤엄치고 있어!
산다는 게 그런 거다. 장난 아니야 인마.”
영화 <넘버 3>에서 태주(한석규가 연기)가 하던 말은 여기에도 해당된다. 잠잠한 듯 보이던 민기의 마음은 사실은 ‘졸라리’ 파도치고 있었던 거고, ‘파고다 공원이 아니라 탑골 공원’이라는 민기의 작은 반항(?)은 그 파도가 잠시 후 거대한 해일로 덮쳐올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디 명심할 것은, 절대 약한 상대라고 함부로 대하지 말기를. 더욱이 내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택시기사 해도 되겠다”든지 “누가 은행원 아니랄까 봐” 같은 식의 모욕적인 언사를 써서 칼침 맞는 일이 부디 없기를...
이것은 또한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상대를 존중하고 예의 바르다.
확고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꿈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적당한 꿈은 현실에 활력이 되지만, 현실이 취약할 때 꿈은 그 현실에 영향을 주고 침범하기 시작한다.
나의 삶, 나의 현실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자존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보라가 남편 민기를 무시하는 것은 그녀가 자존심이 없다는 증거이다. 갑작스러운 신분의 상승(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에서)과 강력한 꿈의 현실화는 보라의 자존심을 흔들었고, 그런 변화에서 오는 불안감이 영화의 기본 정조로 깔리게 된다.
보라; 난 여기 오피스텔 오면, 정말 아무 부담 없어서 너무 좋았어.
당연하다. 그 공간은 보라의 꿈의 공간이니까.
현실은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는 곳이고, 일범의 오피스텔은 보라가 그런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는 공간이다.
해방감 가득한 보라와 일범의 침대나 천정 가득 비추는 자연 속의 야생동물들은 그런 보라의 기분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러나 꿈은 항상 현실을 배반한다. 보라의 기대와 반대로 ‘나보다 내 사진을 더 많이 갖고 있는 남자’ 일범은 보라의 현실에 끼어들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상황은 급격하게 변해간다.
민기; 최보라 씨. 최보라 씬 사는 게 재밌어?
보라의 외도를 알게 된 민기가 처음 보라에게 한 말이다.
퇴근해 집에 온 보라는 혼자 저녁을 먹고 있고, 민기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민기가 불쑥 ‘최보라 씬 사는 게 재밌어?’ 묻고,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보라는 말을 돌려 ‘콩나물국이 시원하다. 배 안 고프냐. 콩나물국 줄까?’ 되묻는다.
혼자 중얼거리듯 ‘시원해?’라는 말을 반복하는 민기.
민기는 사려 깊은 남자다. 그의 현재 삶은 변화를 겪고 있고, 민기는 그 변화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는 중이다.
보라는 민기 삶의 한 축이다. 딸 연이를 중심으로 세 사람은 완성된 삶의 형태를 형성한다. 그 틀을 깨면서 외도를 하는 보라가 민기는 궁금하다. ‘그렇게 사는 게 재미있는지.’
이제까지의 완성 형태를 허무는 것이 정말 좋고 재미있는 일인지 민기는 묻고 있다.만약 보라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민기는 현재 상태를 용인할 작정이다.
고심 끝에 민기가 내린 결론은 ‘보라가 딸 연이에게 좋은 엄마이기만 하다면 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두 개의 키워드를 지금 민기가 꺼내고 있다.
‘재미있니’와 ‘좋니’.
최대한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재미있다’는 것은 개인적 가치 기준이고 ‘좋다’는 것은 보편적 가치 기준이다.
‘취미-일’, ‘꿈-현실’ 등으로 대립 항을 만들어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삶이면 제일 바람직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럴 경우 ‘재미있는 것’ 보다는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다. 취미보다는 일을, 꿈보다는 현실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보라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현재의 가족형태를 깨트릴 생각이 전혀 없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라는 최대한 안전한 선에서 자신의 꿈을 즐기려고 한다.
문제는 실제 삶이란 항상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꿈이 현실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일범이 자신의 현실 지분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보라가 ‘좋은 엄마’의 최소 기준만 지킬 수 있었다면 그렇게 비극적인 상황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보라는 왜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을까?
물론 모든 사람이 꿈을 꾼다. 하지만 그 꿈을 현실에 실현시키는 경우는 많지 않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점점 꿈과 현실이 유리되어 가고, 그럴수록 더 꿈을 갈망하는 이율배반의 시대이다. 고도 산업화 자본주의 시대에 ‘일과 놀이가 하나’라느니,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이라는 말은 공허하다. 그 공허감, 허전함, 상실감, 외로움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보라; 너랑 하면 좋은 게 뭔지 알아? ...친절하다는 거야.
보라가 일범에게 했던 이 말은 단순 솔직하게 보라가 바람피운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일범이 ‘친절하기 때문에’ 보라는 바람을 피웠다. 다시 말해서 보라는 현실의 남편 민기로부터 그 친절함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부담 없이 격정적인 섹스와 해방감 넘치는 침대와 항상 자연의 활기를 만끽시켜주는 친절함이 민기에게는 없다. 대부분의 통속극이 그러하듯이 남편의 부족함이 외도를 유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부족하면 채우려고 노력해야 정상이지, 밖에서 다른 것을 찾으면 안 된다. 그건 반칙이다.
“내가 무슨 자원봉사자냐?”라고 일범이 농담조로 항의하지만, 실제로 친절은 자원봉사자처럼 헌신하는 사람의 것이다. 현실의 파트너는 친절할 수가 없다. 책임져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일범이 보라의 아파트까지 찾아오고, 그 때문에 보라는 결정적으로 ‘좋은 엄마’를 포기해 버린다.
술에 취해 일범의 등에 업힌 보라가 ‘일범아. 이대로 우리, 같이 죽을까?’라고 말하자 일범은 신이 나서 ‘좋지!’ 라며 맞장구친다. 친절한 일범 씨는 책임질 것이 없기 때문에 기꺼이 죽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민기에게 ‘같이 죽자’고 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100% 뻔하다.
“미쳤어? 그럼 연이는 어떡하고?”
딸은 누가 키울 것인가?
현실은 전혀 친절하지 않다! 친절할 수가 없는 것이다.보라가 말하는 ‘친절하다’는 것은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공간, 그 시간, 그 사람이 온전히 나를 위해 있다고 느낄 때, 다시 말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드는 생각이 바로 ‘친절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불가능한 꿈이다.
현대사회로 접어들고, 특히 공동체 생활이 무너지고 핵가족 형태가 정착된 지금 이렇듯 온전한 사랑은 헛된 꿈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글 쓰는 자식이 책이나 팔아먹고(중고책 서점 주인의 말)’ 살아야 하는, 삶의 터전마저 무너진 그런 시대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이 글의 처음에 <해피엔드>의 핵심 이미지로 아파트를 떠올렸던 것도, 현대사회의 아파트가 바로 그런 꿈을 방해하는 원인(이자 결과)이었기 때문이다. <해피엔드>는 ‘아파트로 상징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완전한 사랑이란 불가능하다는 것과, 그로 인한 외로움과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영화는 비극적으로 끝났어도 우리는 계속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악착같이 버텨서 우리의 꿈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이다.
우리의 삶을 해피하게 끝내야 할, ‘해피엔드’라는 권리...
모든 사건이 끝난 후, 민기는 숨겨두었던 보라의 유품을 없애버린다. 손가락을 부러뜨리면서까지 빼앗아야 했던 결혼반지를 변기 물에 쓸려 보내고, 일범과의 행복한 시간을 증명하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태워버린다.
과거가, 악몽이, 히스테리 발작의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그런데 불에 타서 사라지는 보라의 사진과 디졸브 되면서 담배를 피우는 보라의 모습이 보인다.
보라는 지금 아파트 베란다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다. 기침을 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마침 저층의 어느 아파트에 걸려있던 근조등이 끈이 풀려 바람에 날린다.
유심히 쳐다보는 보라.
달이 떠오르듯 둥실 떠오르던 근조등이 베란다에 걸려 멈춘다. 보라가 손을 뻗어 잡으려 하고,
무표정해 보이는 보라의 얼굴 클로즈 업.
이어 낡은 하드커버 책 한 권과 민기와 보라의 환한 얼굴이 있는 사진 액자가 보인다.
그리고 다시 둥실 떠올라 하늘로 올라가버리는 근조등.
멀리 아래에 올려다보는 보라가 보이며 페이드 아웃된다.
이 씬은 여러모로 이상한, 논란거리가 많은 장면이다. 민기가 보라를 죽였고,
보라를 죽인 민기가 오열하며 유품을 태운 것이 바로 전 장면이었다. 그런데 죽은 보라가 다시 아파트에 있는 것이다.
과거 회상인가? 그럴 수도 있다. 다음 장면에 딸 연이와 잠자는 민기가 보이므로 민기의 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상이라면 회상의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 장면에는 민기가 없다. 사진 속에 등장하기는 한다. 또 모든 것을 태워버린 민기의 심리상태에서 다시 보라의 꿈을 꾼다는 것은 뭔가 흐름에 맞지 않는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보라가 살아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껏 보라가 불륜을 저지른 것, 그리고 민기에게 살해당한 것 등을 모두 ‘외롭고 슬픈’ 보라의 판타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불가능한 가정은 아니나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디서부터 판타지인지 구분이 불분명하고, 보라의 판타지라고 하면 다음 민기 장면이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된다.
나는 이 장면이 <해피엔드> 전체에 대한 감독의 코멘트라고 본다.
다소간의 무리를 감수하더라도 작품의 핵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예술적 결단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이 장 면이 이 대목에 보임으로 해서 작품은 하나의 배음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작품의 질을 확인시키는 화룡점정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코멘트의 내용은 무엇인가?
당연히 핵심은 근조등이다. 모두 알다시피 근조등이란 누군가가 죽었을 때 상이 났음을 알리기 위해 다는 등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표시인 것이다.
아파트 단지에 근조등이 있는 것도 드문 경우이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근조등이 떠오르는 광경을 보여주는 쇼트의 비정상성이다. 내려다보는 보라의 얼굴 클로즈업과 보라의 앞까지 올라온 근조등이 보이는 쇼트 중간에,
아파트를 올라가는 근조등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쇼트가 있다.
그런데 이 쇼트의 아파트 집들 모두 불이 꺼져있다. 분명히 여기저기 불이 켜져 있는 저녁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근조등이 올라가는 아파트에는 온통 암흑이다. 죽은 아파트인 것이다.
어쩌면 NG 커트일지도 모르는 이 쇼트는, 그러나, 이상한 느낌을 준다. 마치 현대사회 전체에 대한 조의를 표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길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이렇게 노골적인 코멘트를 해도 되나 싶지만 다음 커트로 가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준다.
보라가 가까이 멈춘 근조등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고, 커트가 바뀌면 보라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그 얼굴의 표정이 애매모호하다. 기쁜 것은 분명 아니고, 그렇다고 슬픈 표정도 아니다. 손을 내어 잡으려 한다면 뭔가 간절함이 있을 수도 있는데, 딱히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표정하다고 해야 할(어쩌면 의도적으로 중립적인 표정을 연기했을 수도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개의 쇼트. 하드커버의 책 한 권과 보라와 민기의 사진 액자...
자, 이쯤 되면 장면의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진다.
아파트 단지와 책과 결혼사진, 그리고 근조등.
<해피엔드>를 단순한 통속 치정극으로 보는 이들에게 환기 작용을 하려고 감독은 이 장면을 일부러 넣었는가 보다. 분명히 흐름을 끊는 장면이지만, 그로 인해 작품은 묘한 긴장감을 획득한다. 감정이 깊어지고 의미가 확장되는 효과를 낸다.
살다 보면 우리는 가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분명히 정상적인 흐름은 아닌데 마음속에서 그렇게 하고 싶은 그런 순간.
그 내면의 소리를 누르고 보편적인 선택을 할 것이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흔히 ‘승부수’라고도 하고, ‘정무적 판단’이라고도 할, 실전에 임한 예술가의 감각이 작동하는 그런 때를 우리는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해피엔드>는 그런 선택을 해서 성공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된다.
페이드인이 되면 민기가 딸 연이와 나란히 누워 잠을 자다가 일어난다. 연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민기의 모습이 처량하다.
우리는 영화 내내 민기가 편하게 잠을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내 보라가 있을 때는 소파에 쪼그려 잤고,
보라가 없는 지금은 딸 연이의 자리 구석에서 쪽잠을 잔다.
이제 보라도 없이 혼자 딸 연이를 키워야 한다. 돈도 벌어야 하는데 실업자 신세다.
커트가 바뀌면 엔딩 자막 ‘Happy End’가 보인다.
‘Happy’가 천천히 사라지고 이어 ‘End’도 사라진다.
해피는 끝났다!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