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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15. 2018

남자들의 ‘멋짐 서바이벌 게임’-영화 <달콤한 인생>

남자들에 의한, 남자들을 위한, 남자들의 ‘멋짐 서바이벌 게임’  - <달콤한 인생> (감독 김지운. 2005년. 한국


살다 보면 우리는 여러 가지 곤란한 경우를 만나게 된다. 분명히 거절해야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남 앞에 나서야 할 때도 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보는 것,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는 것도 괴롭고 곤란하다. 나는 짬뽕을 먹고 싶은데, 높은 사람 포함 앞선 일행들이 모두 짜장을 시키고 ‘뭐 먹을래? 맘대로 시켜.’ 할 때는 또 어떤가? 

그중에서도 우리가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곤란한 상황은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왜 그랬니?’ 하는 질문을 받을 때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대답을 하긴 하지만, 사실 그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늘 뻔하다. ‘그러고 싶어서’이다. 

그럼 왜 그러고 싶었느냐가 다음 질문인데, 여기서 부터가 진짜 곤란한 상황이 된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보라고.’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한 진짜 이유... 글쎄, 거기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할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 <달콤한 인생>은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해서 일어나는 파멸을 그리고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를 ‘최고로 멋진 남자’라고 이름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니까. 

영화는 하나의 게임이고, 게임을 시작할 때는 일단 그 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멋진 남자 게임’... 이게 영화 <달콤한 인생>의 다른 이름이다.

이 최고로 멋진 남자는, 일단 목소리가 좋다. 영화가 시작하면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가 보이고 이 ‘최고로 멋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멋지게 흔들리는 나뭇가지 영상 너머로 그 최고로 멋진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선우;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졌다! 

이제 겨우 땡! 하고 게임을 시작하는 종이 쳤을 뿐인데 우리는 이미 졌다. 심지어 아직 그는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그의 목소리만으로 이미 그의 멋짐에 굴복당하고 말았다. 

이건 불공평한 게임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생이란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우린 그 경사면을 아등바등 기어오르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 씁쓸함 속에서 가끔 희미한 달콤함을 맛보면서. 

그래서 이 영화 <달콤한 인생>의 영어 제목이 ‘A Bittersweet Life’이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네 마음뿐이다’라는 말이 끝나면 움직이는 카메라가 바쁜 발걸음을 보여준다. 

움직이는 카메라는 어느 호텔의 멋진 스카이라운지 바(Bar)로 가더니 바로 그 ‘최고로 멋진 남자’의 모습이 보이자 정지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의 멋짐 퍼포먼스를 보아야만 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자뻑남 중 하나인 ‘이, 병, 헌’이다.


그의 곁에 다가온 남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허리를 숙인다.  

   

“실장님, 내려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말썽이 좀 있습니다.” 

    

우리의 멋진 남자는 지금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있는 중이다. 한밤중에,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술과 유흥에 빠져 희희낙락하고 있을 이 시간에, 멋진 남자는 분위기 좋은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혼자 앉아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다.   

  

“알았어. 가서 일 봐.”   

  

멋진 남자는 마음이 언짢다. ‘세상 것들’   - 편의상 이렇게 이름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이 남자는 ’이 세상 너머의 그 무엇‘을 꿈꾼다. 세속의 더러움을 넘어선 그 무엇의 세계 - 은 대체로 그를 귀찮게 한다. 그의 삶에 불필요하거나, 치워야 하는 쓰레기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가온 종업원을 물리친다.     

하지만 이미 그의 시간은 망가졌다.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다시 한 입 떠 보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떠났고, 초콜릿 케이크는 쓰레기가 된 다음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움직인다. 움직여서 세상 속으로 내려간다. 화려하고 깔끔한 스카이라운지 바에서 점점 내려가서 지하에 도착한다. 하늘에서 지하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문제의 장소에 도착한 남자는 역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멋지게’ 상황을 처리한다.

     

“셋 셀 동안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가 주십시오. 하나, 둘...”     


멋진 남자는 예의 바르지만 단호하다. 세상 것들과는 되도록 말을 섞지 않는 게 좋다. 

쓰레기는 가능한 한 빨리 치워야 냄새가 나지 않는다. 문제는 쓰레기는 꼭 치워주어야 하고, 세상 것들은 뜨거운 맛을 봐야 꼬리를 내린다는 것.    

  

“민기야, 문 걸어라.”     


이젠 멋진 남자의 멋진 싸움실력을 보게 되는 시간이다. 이 남자, 목소리 좋고 세련되고 잘 생긴 남자가 싸움도 잘 한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고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슈트가 잘 어울리는 이 남자, 깔끔하다.     

이 남자의 이름은 김선우. 김 실장으로 불리며, 강 사장이라는 조폭 두목 휘하에서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경영을 맡고 있다. 문 실장이라는 동기와 공동 2인자인 셈으로, 문 실장이 맡고 있는 지하 싸롱에서 문제가 생겨 잠깐 대신 해결한 것이다.


강 사장은 김선우의 미래다. 강 사장을 위해 ‘7년 동안 개같이 일 해온’ 결과 현재의 위치에 올랐다. 강 사장 역시 멋진 남자다. 목소리 좋고 점잖고 안정된, 그러나 단호한 멋진 중년 남자. 

선우도 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선우는 지금 강 사장이 ‘양아치들’이라고 부르는 세속의 세계, 즉 문 실장의 세계에서 강 사장의 세계로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대체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강 사장의 모습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이 선우의 진로를 통째로 흔들어 버렸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멋진 남자’가 치열한 온도로 파멸의 엘리베이터를 내려간다. 돌이킬 수 없다.  

   

강 사장; 내가 실은.., 젊은 애인이 하나 있어. 

    내가 아끼는 여자야. 나 같은 사람이랑은 다르지. 종이 달라. 

    

머뭇거리면서, 계면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강 사장이 말을 꺼낸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것이다. 이건 멋진 남자들의 세계가 아니다.  

   

강 사장; 얘가, 무슨 반응이 없어?

선우; ...네? 축하드립니다.

강 사장; 됐다! 축하는 무슨...     


어색하기는 강 사장이나 선우나 마찬가지이다. 남자들은, 특히 멋진 남자들은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게 서툴다. 

지금이라도 멈추면 좋았겠지만, 일단 솥뚜껑을 연 이상은 밥솥의 밥을 섞어야 한다. 

    

강 사장; 근데 그 애한테 남자가 생긴 것 같애. 젊은 놈이 하나 붙은 거지.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다가... 내가 우리 마누라한텐 말 못해도 너한테는 하잖냐. 

      아무도 몰라 내가 이런 고민 한다는 거. 그래서 말인데, 니가 3일만 그 애를 감시해라.     


이게 비극의 시작이다. 자고로 보스의 여자는 만나면 안 된다. 저승 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멋진 남자는 머뭇거리면 안 된다. 무조건 해내야 한다. 그것도 잘. 

    

강 사장; 너 애인 있어? 사랑해 본 적 있어? 

    없어! 넌 없어. 그래서 너한테 이런 일 맡기는 거야.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야 인마. 가자!     


술 때문일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강 사장은 차에 오르더니 인사하는 선우의 목덜미를 잡고 주정하듯 말을 쏟아낸다. 아주 친한 사이처럼 보이지만 이건 명백한 반칙이다. 보스와 부하 사이, 그것도 1인자와 2인자 사이, 특히 멋진 남자들 사이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 

이 한순간의 반칙으로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국으로 진행되는데, 그건 전적으로 강 사장의 잘못이다. 강 사장은 선우에게 이러면 안 된다!    

 

대부분 남자의 시선은 늘 밖으로 향해 있다. 조금 친하다 싶으면 사우나 가서 벗은 몸과 맨살을 보여주고 술집에서 망가진 행동도 신나서 하지만 그것 역시 밖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집안 얘기 여자 얘기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는 내 영역의 일을 뽐내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결코 속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맨살은 자랑하지만 속살은 감춘다. 예민해서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 사장은 자신의 젊은 애인(희수) 얘기를 하면서 어색해한다. 부끄러워한다. 일반적인 영역의 문제라면 자랑스러워해야 하는데 왜 강 사장은 부끄러워할까?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선우도 그렇게 어색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경우와 똑같이 믿음직스럽게, 멋지게 대답을 했을 것이다. 뭔가 이상한 느낌 때문에 선우도 자신의 리듬을 잃어버린다. 그게 강 사장의 속살을 보여준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미묘한 지점이므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출발선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지점이고, 이 다음부터는 그냥 즐기면 된다. 어떻게 멋지게 파멸해 가는지 구경만 하면 된다.      

강 사장은 왜 선우에게 희수의 뒤를 봐달라고 지시했을까? 더 충성스럽고 우직한 문 실장 말고, 굳이 선우에게 그 얘기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말대로 선우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일까? 

강 사장은 사랑해본 적 있느냐고 묻고는 선우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는다.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없어. 넌 없어!’라고 혼자 대답을 해 버린다. 그리고 그래서 이 일을 맡기는 거고, 그래서 선우를 좋아한다고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왜 강 사장은 이렇게 확신을 하는 걸까?


두 개의 질문이 겹쳤는데, 비교적 단순한 나중 질문부터 해결하자. 

강 사장은 선우가 사랑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선우는 사랑이라는 걸 모른다고, 사랑을 알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강 사장이 말하는 사랑은 시중에 널려있는 흔한 사랑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양아치들의 것이고, 아마 선우도 무수히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강 사장 말하는 사랑은 선우가 해봤을 리가 없는, 해봐서는 안 되는, 해볼 수 없는 금지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서 강 사장은 지금 선우를 무시하고 있는 중이다. 경멸하는 것이다.     


강 사장: 나 같은 사람이랑은 다르지. 종이 달라. 

    

강 사장 희수 얘기를 처음 꺼내며 한 말이다. 겉으로는 ‘나 같은’이라고 했지만, 그 뜻은 ‘우리 같은, 너 같은’이다. 종이 다르다는 말은 차원이 다른,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강 사장은 선우에게 ‘난 너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건 남자들의 본성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선우는 젊은 시절의 강 사장이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만 있을 뿐이지 부자지간처럼 판박이나 마찬가지이다. 선우는 그의 말대로 ‘7년 동안 개같이 일 해온’ 결과 거의 강 사장과 어깨를 겨룰만한 능력치에 이르렀다. 이제 두 사람이 동급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이다. 

수컷의 세계에서 이럴 때 경우의 수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가 떠나서 독자 영역을 확보하거나, 다른 하나를 쓰러트리거나. 영화 <친구>에서도 보듯이, 이건 어떤 관계냐에 상관없다. 친구사이건, 아버지와 아들이건, 둘도 없는 선후배 사이건 다 똑같다. 태양계에는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하면 안 된다.     


앞에서 나는, 지금 강 사장 선우를 무시하고 있고 그건 강 사장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도적인 무시는 견제의 의미이고 ‘너는 아직 어려.’라는 뜻이다. 강 사장의 잘못인 이유는 다 큰 선우를 어리다고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우가 아직 어리다는 게 사실’이라는 점을 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우는 아직 강 사장 견제해야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는데 강 사장은 그걸 착각하고 있었다. 그게 강 사장의 잘못이었고, 그 때문에 두 사람은 공멸의 길을 가고 만다. “나이가 들면 말이야. 점점 인내심이 부족해져.”라고 스스로 고백한 대로, 강 사장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랬었다면 미성숙한 선우가 자신의 인생을 파멸시키면서까지 이렇게 절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우: 말해봐요. 저 진짜 생각 많이 해봤는데, 정말 모르겠거든요. 말해봐요. 우리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된 거죠? 

    말해봐요. 저 진짜로 죽이려고 했습니까? 나 진짜로 죽이려고 했어요? 7년 동안 당신 밑에서 개처럼 일 해온 날!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더욱이 영화의 콘셉트가 ‘멋진 남자가 멋지게 망가지는 것 보여주기’인 만큼,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과정을 지켜보면 된다.


강 사장의 지시대로 그의 젊은 애인 희수를 감시하러 집으로 간 날, 차에서 내린 선우 앞으로 휘익! 돌풍이 불고 지나간다. 멋지게 차려입은 선우의 슈트 깃을 흔드는 이 바람... 

우리는 영화의 시작 지점에서 선우의 목소리로 바람에 대한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제자가 물었을 때, 스승은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라고. 지금 흔들리는 것은 선우의 옷도 하얀 먼지도 아니라 선우의 마음이다.


왜 선우가 흔들렸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분명한 것은 희수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선우는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희수의 집에 들어간 선우는 뭔가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껌을 꺼내 씹는다. 항상 멋지고 당당한 그의 태도와 분명히 다르다. 게다가 막상 희수가 나타나자 그는 말을 더듬기까지 한다.

     

선우; 사장님께서 이거 직접... 이거 직접 전해드리랍니다.

     

선우에게 강 사장은 중요하고, 따라서 그의 선물도 중요하다. 그런데 희수는 그 선물을 가볍게 무시한다.

     

희수; 우와! 진짜 유치하게 생겼다!

     

이건 강 사장 유치하다는 말이고, 아울러 선우도 유치하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어린애 다루듯 어르기까지 한다.

     

희수; 아저씨답다. ...귀엽네요. 귀엽죠?     


강 사장 선물한 스탠드를 보고 하는 소리지만 사실은 강 사장에게 하는 말이다. 

강 사장은 선우의 보스이고, 강하고 멋진 남자의 표상이다. 그런 강 사장을 간단히 유치하다 귀엽다고 표현하는 이 여자는, 이 젊은 여자는 도대체 뭔가? 강 사장의 지시를 전하는 선우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명함을 건네주는 선우를 망설임 없이 거절하는 이 여자는 어떤 여자인가?     

막상 뒤를 밟아본 희수는 말 그대로 평범한 젊은이다. 남자 친구의 작은 차를 타고, 저녁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클럽에 가서 신나게 춤을 춘다. “애들이라 그런가 엄청 돌아다니는구만!” 이라고 선우가 투덜댄 것처럼, 잘 노는 발랄한 청춘.  

   

자, 이쯤에서 영화 <달콤한 인생>의 전략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달콤한 인생>은 기본적으로 대비되는 두 개의 세계를 전제로 한다.

     

움직임, 변화, 무질서, 솔직    /      정지, 안정, 질서, 허세

초록, 정상적인 삶     /     빨강, 비정상적인 삶

위, 지상, 높은 곳, 고급, 정돈됨, 깨끗함, 세련됨    /      아래, 지하, 낮은 곳, 저급, 난장판, 더러움, 촌스러움 

여자, 예술, 희수, 자유, 순수함, 아름다움, 당당함 / 남자, 폭력, 문 실장, 백사장, 종속, 오염됨, 추악함, 비굴함     

이 구분에 강 사장과 선우가 들어있지 않은 것에 주목하라. 

일단 강 사장은 이 두 개의 세계를 통합하는, 정확히 말하면 통합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남자의 세계, 주먹과 총칼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순수한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정작 그 세계의 사람(희수)으로부터는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래도 강 사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가 경멸조로 말하는 ‘양아치들’과 달라 보이기 위한 방편이고 자존심이니까.


강 사장 어설프게 두 세계를 껴안고 정지해있는 반면, 선우는 남자의 세계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겉보기에 안정적으로 적응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막 이사해서 짐 정리도 안 된 그의 집 풍경이나, 소파에 누워 스탠드 스위치를 깜박거리는 불면의 모습이 그걸 대변한다. 그는 왜 안정하지 못할까?     


말하자면 그것은 ‘영웅의 길’이다.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은 어느 한 세계에 머물며 타협하고 안주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영웅들은 분열된 세계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위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수한 영웅들은 모두 그 길을 걸었고, 결국 실패했다. 영웅의 실패는 정해진 운명이다.


그런데 <달콤한 인생>은 조금 다르다. 

일단 강 사장은 영웅이 아니고 영웅인 척하는, 다시 말해 ‘겉멋 가득한’ 사이비 영웅이다. 그래서 희수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선우는 분명 영웅적 캐릭터를 갖고 있었다. 모든 멋진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었고, 금상첨화로 고독하고 회의하는 캐릭터였다. 문제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은, 덜 익은 상태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왜 이렇게 된 거지?’ ‘너무 가혹해.’ 하며 혼란스러워한다. 미숙한 영웅의 미숙한 종말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런 영웅담은 이 영화의 포인트가 아니니까. 앞에도 얘기한 것처럼 이 영화 <달콤한 인생>은 콘셉트가 ‘멋진 남자가 멋지게 망가지는 것 보여주기’이기 때문이다.


밥상이 근사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반찬이 맛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인공을 멋지게 하려면 조연 또한 멋져야 한다. 황정민이 연기하는 백사장은 그런 멋진 조연의 대표 격이다. 

오래전 <넘버 3>에서 송강호가 연기했던 전설적인 깡패 조필에서 시작된 막가파 깡패의 전통은 막강하다. 한국영화의 자산 중에서 가장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는 게 이쪽 깡패영화 계보인데, 그 덕분인지 한국영화가 이런 유의 인물을 그려 내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느낌이다. 백사장은 <넘버 3>의 자양분을 먹고 진화한 훌륭한 경우라 할 만하다.

이기영이 연기한 ‘삼선교 오무성’의 경우는 변종 캐릭터이다. 뿔테 안경을 끼고 벙거지를 눌러쓴 어수룩한 모습에 여유 있는 행동거지와 군더더기 없는 말투까지, 백사장과는 다른 독특한 멋짐을 선사한다. 백사장의 청부를 받아 선우에게 온 그는 점잖게 통보를 한다.     


오무성; 사과하라.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잘.못.했.음. 이 네 마디야. 네 마디만 하면 적어도 끔찍한 일은 피할 수 있다. 

   잘,못,했,음. 딱 이 네 마디다.     


아무리 오무성이 멋진 척 얘기한다고 해도 선우를 주눅 들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적어도 멋짐에 관한 한 최고의 자리를 빼앗길 생각이 없다. 그래서 선우는 바로 대답을 한다.

     

선우; 그, 냥, 가, 라!     


선우의 말에 오무성은 그냥 간다.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피의 전쟁이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오무성을 만나기 바로 전 선우는 이미 결정적인 잘못을 했기 때문이다. 강 사장의 지시를 어기고 희수와 남자 친구를 용서해준 것이다.   

   

선우; 좋아. 이렇게 합시다. 기회를 줄게! 잘 들어 두 사람! 두 사람은 절대로 만나는 일 없는 거야. 오늘 일은 날 포함해서 우리들에겐 없던 일이고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지. 전부 지워버려! 기억뿐만 아니라 습관에서도 지워내. 어렵단 말 하지 마. 두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상황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어렵다. 기억뿐만 아니라 습관에서도 지워내라고? 

이런 어려운 말을 이렇게 멋진 문어체로 해내는 선우라는 인간은 어쩌면 태생적으로 멋짐 유전자를 갖고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희수가 그 멋짐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굴복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주장하고 대든다.   

  

희수; 그게 지금부터 지워버려 그러면 지워지는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선우; 아니 나는... 난 최선을 다...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에요.     


희수 앞에서 선우는 자꾸 말을 더듬는다. 늘 이기던 멋진 남자는 자신에게 굴복당하지 않는 상대 앞에서 당황한다. 익숙하지 않다.     


희수; 그만 가 보세요. 아저씨 말대로 그렇게 할 테니까.

     

심지어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더니 잘못을 지적하기까지 한다.

     

희수; 정말 그런 거 아니잖아요. 지워지는 거 아니잖아요.     


선우의 완벽한 패배다. 희수는 선우의 멋짐에, 강 사장의 세계에, 거짓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건 가짜 세계이고, 희수는 그 가짜에 현혹되지 않는다. 현혹되는, 매혹당하는 것은 오히려 가짜들이다. 불나방이 불을 보고 날아들 듯이, 가짜들은 진짜의 달콤 쌉싸름한 맛에 매혹된다. 

희수와의 파국을 예감한 강 사장의 뜬금없는 고백이 그걸 증명한다.

     

강 사장; 내가 널 왜 좋아하는지 아니? 누가 뭐라든 어떻게 하든, 남 신경 안 쓰잖아. 그게 재밌어. 

    어려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봤거든. 근데도 난 널 이렇게 찾아오잖아. 찾아오게 만들잖아. 그런 게 재밌어. ...그게 뭘까? 뭐, 어린 것도 잘난 거지. 나이가 들면 말이야, 점점 인내심이 부족해져.     


아...! 이 말을 들으니 정리가 되는 부분이 있다. 이들, 멋진 남자들의 세계에는 나름 질서가 있다. 그건 힘에 의한 질서다. 위계와 서열로 엄격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희수는 그 힘의 자장에서 벗어나 있다.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자유로움, 그 가둬지지 않는 젊음이 강 사장을 끌어들인다. 그 때묻지 않은 자유로운 젊음이 선우를 당황하게 한다. 그들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신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강 사장의 말 중에서 ‘재밌다’는 말의 의미이다. 

사실 ‘재미있다’는 말은 어린, 젊은 사람들의 용어다. 어릴수록 모든 것을 재미있게 보고, 나이 들수록 가치판단을 하면서 본다. 젊은 사람이 재미있다고 하는 말은 정말 재미있다는 뜻이지만, 나이 든 사람이 재미있다고 하면 그건 다른 뜻이 된다. ‘나와 다르다’ ‘이상하다’ ‘뭔지 모르겠다’ 그런 뜻을 포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강 사장 이런 뜻으로 지금 ‘재밌다’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이미 그 단계를 지나쳤다. 그런 생각은 처음 희수에게 관심을 가질 때 했을 것이다. 

지금 선우가 희수에게서 느끼는 감정,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선우는 지금, 뭔지 모르겠지만 나와 다른 이상한 세계의 사람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 젊은 선우는 흔들리지만 나이 든 강 사장은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강 사장 ‘재밌다’고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세상일이 재미있지 않은 나이 든 사람이 ‘재밌다’고 하면 그건 ‘자극받았다’는 뜻이다. ‘승부욕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거 봐라? 네가 감히 나한테 덤벼?’ 하는 뜻이다. 

그게 계속되면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게 되고, 위험한 놀이를 시작하게 된다. 남자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순간 이성을 잃고 싸움에 몰두한다.      


강 사장; 왜 그랬냐? 왜 전화 안했냐? 너 그런 놈 아니잖아? 도대체 이유가 뭐냐?

선우; 두 사람이,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만 지켜진다면... 모두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강 사장;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 너... 그 애 때문이냐?    

 

어른 싸움이나 애들 싸움이나 유치하기는 마찬가지다. 왜 전화 안 했느냐고 따지고, 적당히 그럴듯한 변명을 해대고, 진짜를 말하라고 다그친다. 싸움이 커지면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강 사장은 싸움을 말리는 업계 사람들에게 ‘멋지게’ 싸움의 이유를 내세운다.      


강 사장; 꽤 똑똑한 친구 하나가 제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 심부름을 하나 시켰는데, 사소하게 생각했던지 실수를 저질렀어요. 뭐,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실수도 아니었어요. 가볍게 야단치고 끝날 일이었죠. 근데,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아닐 수도 있어요. 내 착오일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조직이라는 게 뭡니까? 가족이라는 게 뭡니까? 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되는 거죠.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 친구 손목 하나가 날아갔어요. 잘 나가던 한 친구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났습니다. ...이번 일은 손목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럴듯하게 말을 하지만 이건 억지다. 

그런 억지의 대표적인 예는 송강호가 <넘버 3>에서 연기한 조필이다. 그는 ‘내가 하늘은 빨간색이라고 하면 빨간색’이고, ‘육상 금메달 딴 게 현정화라고 하면 임춘애가 아니라 현정화’라고 강변한다. 그가 마구잡이 깡패라면 지금 강 사장은 멋지게 폼 잡는 기업가형 조폭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명백하게 강 사장은 <넘버 3>의 계승자이다. 

“나가 있어!”라는 대사나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 법이죠.’ 등은 <넘버 3>에 대한 의도적인 오마주로 보이기도 한다. <넘버 3>에서는 송강호가 “나가 있어!”를, 한석규가 “튀어나온 못이 먼저 망치를 맞는 법이죠.”를 말한다.(의도치 않게 <넘버 3> 얘기를 여러 번 하게 되는데, 시나리오만 놓고 봤을 때 <넘버 3>와 <투캅스>는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서 제일 재미있다.)     


어쨌든 이제 싸움은 시작됐다! 영화의 선전 문구처럼, ‘돌이킬 수 없다면, 끝까지 폼 나게 간다!’ 장르영화의 공식에 충실하게, 이제부터 벌어지는 일은 뻔한 것이다. 

액션과 스릴... 우리는 어떤 액션이 얼마나 스릴 있게 벌어지는지 구경만 하면 된다.



만약 아직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일단 <달콤한 인생>을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자고로 싸움은 구경하는 맛이다. 말로는 그 재미를 따라갈 수 없다. 회전초밥처럼 다양한 볼거리가 제공되므로, 직접 느끼기를 바란다. 신체 자르기, 파묻기, 불방망이 액션, 그리고 우리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총싸움까지 나온다. 그 마지막은 처절한 사투와 무수한 죽음, 그리고 달콤 쌉싸름한 엔딩이다.  

   

선우;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끝까지 한번 가 볼라고. 

    

이것은 남자의 선택, 남자의 길이라고 하기보다는 젊음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젊음이란 자고로 무모한 것이다. 일단 어떤 선택을 하면 그것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옳고 그름에 구애되지 않는다. 질주하는 것이다. 

젊음은 어차피 오답이고, 인생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그렇게 자신의 동력으로 전력을 다해 질주한다. 그중 한둘은 답을 얻는 데 성공할 것이고, 대부분은 중간에 좌절하거나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는 나다. 내 식대로 산다.     


어렵게 총을 구한 선우는 희수에게 빨간색 스탠드를 선물하면서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삼선교 오무성을 응징하고,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내가 가르쳐줄게. 똑바로 서 봐.’라고 훈계하는 백사장을 총 쏴 죽이고, 말도 섞지 않은 채 문 실장에게 총을 쏜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강 사장과 선우. <달콤한 인생>에서 가장 유명한,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낸 바로 그 장면이다.     


선우;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강 사장;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선우;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봐요.   

  

복수는 유전된다. 아이는 어른에게 배우고, 자식은 부모에게 배우고, 제자는 스승에게 배우고, 청년은 장년에게 배운다. 선우가 하는 이 질문은 원래 강 사장의 것이고, 선우는 지금 강 사장에게 배운 대로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답을 들은 다음 또 다른 질문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기 위해서. 

그게 선우가 하려던 복수의 하나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하고 이유를 말하라고 하는 건 듣지 않겠다는 얘기다. 싸우자는 얘기다. 


아이러니는 지금 강 사장 한 대답은 진짜라는 것이다. 옛날 강 사장 물었을 때 선우가 한 대답은 거짓말이었지만 지금 강 사장은 솔직하게 진심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선우는 강 사장의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게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하려고 했던 질문을 계속한다. 선우에게는 그때의 강 사장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선우는 지금 멋있게 파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만약 선우가 정말로 강 사장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면 모욕감에 대해서 다시 물었어야 한다. ‘어떤 게 모욕감을 줬느냐’든지 ‘모욕감이 나를 죽일 만큼 중요하냐’든지 물어봤어야 한다. 

그러나 선우는 그럴 생각이 없다. 끝까지 가봐야 하기 때문이다. 젊음의 총알은 한번 당겨지면 멈출 수 없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강 사장은 왜, 무엇 때문에 선우에게 모욕감을 느꼈을까? 일단 단어상의 뜻을 알아보면 국어사전에서는 모욕(侮辱)을 ‘깔보고 욕되게 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넌 나에게 목욕 값을 줬어.’라고 많이 패러디되는데, 정말로 목욕 값을 줬다면 강 사장이 모욕감을 느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귀엽다고 웃어넘겼을지 모른다.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강 사장은 선우를 아직 어리다고 보고 있고, 모욕감을 느낀 것은 어린놈이 감히 어른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처음 강 사장이 희수에 대해 얘기하면서 ‘네가 알아서 처리를 하거나 전화하라’고 말하는데, 나중에 일이 터진 후 선우에게 물어볼 때는 ‘왜 전화 안했냐’라고만 묻는다. 강 사장은 처음부터 희수를 선우가 마음대로 처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냥 형식적으로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 

강 사장에게 있어서 희수는 선우가, 사랑 같은 것 해본 적도 없는 어린 놈이 맘대로 처리할 대상이 아니다. 반드시 자기에게 전화를 해서 처리 방침을 지시받았어야 한다. ‘이번 일은 손목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닌 이유는, 강 사장에게 희수는 선우의 영역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선우가 어른인 자신의 고유영역을 침범하고 훼손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 인내심이 부족해’ 지고 모욕감을 자주 느낀다.     


싸움의 끝이 한바탕 총싸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총싸움은 무릇 남자들의 로망이니까. 치열한 총싸움 끝에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꾸는 아름다운, 그러나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영화는, <달콤한 인생>은 그 꿈을 대신 이루어준다. 그래서 영화는 꿈이고 위로이다.


남자들의 멋짐 서바이벌의 끝은, 천지사방 모든 것을 깨부숴버리는 총싸움의 마무리는 항상 최고 실력자의 몫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다. 아무리 시시하게 시작된 싸움이라고 해도 마무리를 깔끔하게 잘 하면 멋진 싸움이 된다. 

이런 중구난방 싸움에 탁월한 실력의 고수가 등장하는 것은 상황을 매듭짓기 위한 상용 수단이다. 에릭이 연기한 태구의 등장에 대해 뜬금없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이는 게임의 룰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아니, 어쩌면 뜬금없다는 반응이 정확한 건지도 모르겠다. 태구라는 캐릭터는 그동안 <달콤한 인생> 속에 등장하던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형이다. 희수와는 반대쪽 극단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게 바로 태구라는 인물이다. 세속과는 동떨어진, 감정에 흔들리지도 않고 판단에 망설이지도 않는 프로페셔널. 탁월한 총솜씨와 단호한 태도로 일거에 상황을 끝내버리는 터미네이터!


이 멋짐 서바이벌의 종결자가 피에 젖어 쓰러진 선우 앞에 선다. 

죽어가면서도 ‘너무 가혹해...’라고 중얼거리는 미성숙한 아마추어가 애처로웠던 걸까? 무심의 경지에서 총을 쏘아대던 그가 잠시 망설인다. 

선우는 핏방울 떨어지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고, 멀리 희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보이는...     


지금 여기 죽어가는 한 남자가 있다. 

스카이라운지 바 ‘달콤한 인생’에서 홀로 에스프레소 커피와 초콜릿 케이크를 음미하던 멋진 남자. 험한 깡패들을 깔끔한 솜씨로 제압하던 비즈니스 깡패 넘버 2가 이제 낙엽처럼 떨어져 숨이 멎어간다. 요란한 총싸움에 피범벅이 되어 희수에게 전화를 걸고, 희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첼로를 껴안은 희수를 떠올린다.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을 쳐다보는 희수의 얼굴.     


선우; 너무 가혹해…….     


가혹한 것은 총에 맞아 망가진 멋진 육체 때문이 아니다. 이 젊은 몸뚱이야 부서지면 또 추스르면 된다. 나는 아직 젊고, 자신감 넘치고, 무엇보다 넉넉한 시간이 있으니까. 

가혹한 것은 죽어가는 지금의 현실이 아니라 내가 가질 수 없는 미래, 내가 넘볼 수 없는 다른 세계, 내가 이룰 수 없는 아름다운 꿈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나는 지금 가혹함을 느낀다. 그 현실의 가혹함에 눈물을 흘린다.     


유키 구라모토의 <로망스>와 함께 희수의 첼로 연주가 보이고, 그걸 보고 들으며 선우는 처음으로 다른 세계를 본다.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세계, 힘으로 증명이 안 되는 세계, 돈으로 제압이 안 되는 세계... 

그 세계는 ‘아름답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이제껏 선우가 살아온 ‘겉멋’의 세계를 넘어선 ‘진짜 멋짐’의 세계를 처음 맛본 선우는 마음이 열림을 느낀다. 그 열린 마음을 본 희수는 선우에게 살짝 미소를 보내주고, 그 미소에 선우는 활짝 웃어 보인다. 아니,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진심으로 활짝 웃는다. 생전 처음, 온 마음을 열고 환하게 웃는다. 

환하게 웃고 나서 입술을 꾹 다무는 선우의 얼굴에서 어떤 다짐, 어떤 끝맺음을 보는 것 같다. ‘이제 됐다’는 느낌. ‘이거로군요!’ 하는 확신. ‘이걸 위해서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는 결심...


이 지점이 사실 미묘한 부분이다. 얼핏 ‘현실-예술’의 구도에서 예술의 세계를 맛봤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지극히 단편적인 해석이다. ‘현실을 넘어선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하면 좀 더 복합적이고 그럴듯하지만, 그게 과연 질주하는 한 젊은이가 모든 것을 걸만큼 대단하냐 하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름다움의 세계’를 본 것 자체보다 그것을 본 순간의 기쁨, 그 마음 열림의 순간을 함께한 마주침에 나는 주목한다. 즉 그 순간 선우와 희수의 시선이 마주치고 희수가 웃음을 보인 것, 그게 선우가 느낀 진짜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란 세상의 모든 논리를 떠난 순수의 경계이다. 그 경계에서 내가 누군가와 통해 있다는 걸 느낀 순간, 이 세상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걸 느낀 순간 선우는 더할 바 없는 환희를 경험한 것이다.


 

마음이 열렸다는 건 그동안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나’라는 틀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상대와 통했다는 것은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흔히 말하는 ‘무아(無我)의 경지’ 혹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그런 뜻이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순간이다. 꿈꾸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맛보지 못하는 그런 순간... 

    

선우;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스승이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추어 멋진 남자 선우 앞에 선 프로멋짐러 에릭은 그에게 총알 세례를 내린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에, 나를 현혹하는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미친 짓이고 그런 자는 살려줄 가치가 없다. 

멋진 남자들의 세계는 철저히 나의 세계이다. 에릭의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멋진 남자의 표본이다. <달콤한 세상>이라는 ‘남자들의 멋짐 서바이벌 게임’에서 에릭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검은 화면에 선우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총에 맞아 쓰러져있는 선우가 보이고, 이어서 스카이라운지 창가에 서서 차를 마시는 선우가 보인다. 창문 너머 밖을 바라보던 선우의 눈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들어온다. 

휙, 휙 주먹을 내어보는 선우. 누가 보고 있지는 않나 뒤를 돌아보더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섀도복싱을 시작한다. 최대한 멋짐을 유지하면서, 멋진 자신의 모습을 음미하면서 선우는 열심히 두 주먹을 휘두른다. 

지금 그에게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자신만이 가장 멋지고 가장 완벽하다.     


이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에 위치함으로써 영화 내용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혼선이 초래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는 죽어가는 선우가 자신의 아름다웠던 시간을 회상하는 것으로 끝맺음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마지막 장면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 이전까지의 활극을 판타지로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든지 보는 이의 마음에 달린 것이고, 그게 감독의 의도라고 봐야 한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적인 이야기의 흐름만을 놓고 보면 이 마지막 장면은 맨 처음에 있는 게 맞다. 선우의 내레이션 이후 선우의 새도 복싱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새도 복싱이란 ‘자뻑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스카이라운지에서 자뻑 새도 복싱을 하던 남자가 하강과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서, 다시 스카이라운지에 돌아와 총싸움 끝에 죽어가는 이야기... 

그게 일반적인 이야기의 틀이지만, 실전적 감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약간 비틀기를 하고 싶고, 그게 감독이 부리는 나름의 멋이다. 감독은 자기도 멋진 남자라고 뻐기고 싶은 것이다. 프로멋짐러 에릭보다, 멋진 주인공 이병헌보다, 감독 김지운이 더 멋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뭐... 그런다고 전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 멋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왜냐? 

우리의 인생은 각자가 주인이고, 내 뜻대로 살아갈 때만 그 인생의 달콤함을 맛보게 해 줄 것이므로.  


        

*** 결정적 장면 ***  

   

말해 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나이가 들면 말이야. 점점 인내심이 부족해져.

인생은 모르는 거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거지.

아뇨.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봐요.

이젠 이유가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든, 끝은 봐야죠

뭐, 어린것도 잘난 거지.

이 새끼가 끝까지 멋있으려고 하네?

그게 지금부터 지워버려 그럼 지워지는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느냐?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인생>에서 쓰인 대사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개를 열거해 보았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처럼 영화 전체에 절대적 중요성을 차지하는 대사도 있지만 ‘뭐, 어린것도 잘난 거지.’처럼 없어도 상관없는 대사도 있다.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말을 하지만 그 중 우리의 진심을 담은 말은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해야 하는 말을 내뱉은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보다 ‘뭐, 어린것도 잘난 거지.’라는 대사가 더 만든 이(감독이나 작가)의 본심을 내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대사는 극적 진행에 꼭 필요하지만, 불필요한 대사는 창작자의 본심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열쇠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선우가 태웅(김해곤이 연기)을 만나 권총을 사려는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죽음의 사투 끝에 강 사장에게서 벗어난 선우는 ‘어떻게 할 거냐’는 후배 민기(진구가 연기)의 말에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끝까지 한번 가볼라고.’라고 말한다. 강 사장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리고 권총을 사기 위해 태웅에게 온 것인데, 이 대목에서 갑자기 영화의 분위기가 바뀐다. 그동안 누아르 액션 드라마로 짜임새 있게 진행되던 영화는 무기밀매 중개업자 오달수의 뜬금없는 코미디로 흐름을 깨버린다. 주인공 선우가 복수극으로 멋지게 새 출발을 하려는 순간 그 진행방향을 급격히 비틀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런 비틀기가 잘못된 것도 난데없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틀의 진행을 싫어하는 많은 창작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다. 다른 점이라면, 보통 살짝 비틀기를 하더라도 큰 줄기의 흐름으로 돌아가는데 반해 여기서는 이제까지의 극적 흐름을 중지시키고 막바로 클라이맥스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드라마투르기라면 선우의 복수 과정을 촘촘하게 설명해 보여주는 게 맞다. 그러나 <달콤한 인생>에서는 전혀! 그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선우가 희수의 집 앞에 빨간 스탠드를 선물로 놓고 난 이후 연쇄적으로 복수의 장면들이 보인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조선시대 선비 길재의 시조이다. 

알다시피 시조는 초, 중, 종의 3장으로 구성되고 종장의 첫 구절은 3글자로 해야 하는 규칙이 있다. 위 시조는 초중장에 걸쳐 서사가 진행이 되고, 종장에서는 그 서사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논평이 제시된다. 

<달콤한 인생>도 3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초장은 선우가 강 사장의 지시로 희수를 감시하는 과정이고, 중장은 강 사장이 돌아와서 선우를 응징하는 부분이며, 종장은 선우가 총기를 구해 복수극을 펼치는 대목이 된다. 

<달콤한 인생>이 위 시조와 같은 구성이라고 볼 때, 종장인 선우의 복수극은 서사가 아니라 이제까지 서사에 대한 감독의 주관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야기 중인 태웅의 아지트 장면은 어디에 해당할까? 

위 시조로 보면 종장의 첫 부분 ‘어즈버’가 이에 해당한다. ‘어즈버’는 ‘아아!’ 하는 감탄사로 특별한 의미가 없는 말이다. 그동안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한 박자 쉬어가는 역할을 한다. 

태웅의 아지트 장면은 코믹한 처리로 그동안의 흐름에 변화를 주면서 종반의 모티브인 총싸움을 준비하는 기능을 한다. 희수에게 빨간 스탠드를 선물하면서 시작되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 전에, ‘어즈버! 하면서 감독의 깊은 감정을 풀어내는 시간이다.     


먼저 간략하게 이 장면의 내용을 살펴보자. 

현재 선우는 총을 구하기 위해 태웅의 아지트에 와 있다. 아지트라고 표현한 까닭은 그 실내가 마치 산적단의 아지트처럼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으로 필요한 것은 선우가 총을 구하고, 그 과정에서 총격전이 일어나 태웅 일당이 죽고, 그로 인해 그의 동생 태구(에릭이 연기)가 모두를 끝장내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전달되는 과정이 조금 이상하다. 그동안의 누아르 적이고 멋스러운 분위기와 달리 코믹하고 불친절하게 설명된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감독의 어떤 깊은 감정, 본심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태웅; 물건 다뤄본 적 있어? 

선우; 예. 예전에 경호원 생활할 때 조금...

태웅; 초짜 구만! 

선우; 제가 쓸 건 아니니까요.

태웅; 분해조립할 줄 알아? 

선우; 해본 적은 있습니다.

태웅; 자네 이런 물건 본 적 있어? 이게 자네가 쓰던 물건 하고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야. 러시아가 만들어낸 명품 중에 명품이지. 스테이슈킨! 이게 스태이슈킨이라는 건데, KGB 애들이 쓰는 거걸랑...     


무기 밀매상 태웅은 선우에게 물건 자랑을 하고 분해조립을 가르쳐주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초짜’인 선우보다 분해조립을 늦게 해서 죽임을 당한다. 어이없고 황당하고 웃기는 상황이고 장면이다. 

얼핏 선우가 총을 갖게 하려고 억지로 만든 상황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그러나, 가장 정확한 자리에서 이 영화의 본심을 보여주고 있다. 

<달콤한 인생>은 기본적으로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남자들은 겨룸에 민감하다. 주먹으로, 총칼로, 시계, 자동차로 서로 겨룬다.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강하기를 원한다. 

강 사장 말처럼, 일단 시작하면 ‘어쨌든 끝은 봐야’한다. 이기느냐 지느냐는 나중 문제다. 승패는 그저 결과일 따름이다.


총은 대한민국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일상생활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총을 취득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더욱 필요하다. 관객을 총에 익숙하게 만들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익숙해지기’의 실제적 방법이 바로 ‘분해조립’인 것이다. ‘분해조립’은 전적으로 남자들의 시간이다.


태웅은 총을 사랑한다. 엄청난 총들을 갖고 있는 자신은 강하다. 그리고 전문가이다. 

‘초짜구만!’이라는 태웅의 말은 남자들의 수사법이다. ‘내가 고수’라는 자뻑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이 어설픈 남자는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한다. “분해조립할 줄 알아?” 은밀한, 자신만의 특기를 뽐내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한지, 얼마나 멋지고 강한 남자인지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물건에 대해 설명까지 하면서 태웅은 자기 자랑을 한다. 그리고 그 자랑의 끝은, 이미 말했다시피, 사망이다.     


영화 전체의 가장 중요한 시간대에, 이제 막 하이라이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의 장면으로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시무시한 카리스마의 보스가 초짜에게 분해조립에 져서 총 맞아 죽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적당하지도 않고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라는 게 뭔가? 감독이라는 게 뭔가? 궁극적으로 영화는 감독이 만드는 것이고,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만들 권리와 책임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대해 권리와 책임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진심을 들이밀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그렇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결정적인 단어를 해야 할 시간에 ‘어즈버!’라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달콤한 인생>의 감독 김지운은 용기 있게 자신을 드러냈고, 나는 그 드러난 모습에서 감독 김지운의 속마음을 본다. ‘나는 남자다. 나는 잘 노는 남자다. 나는 멋진 남자다.’라고 주장하는...     


흔히 ‘남자는 어린애’라고 말한다. 어린애는 ‘노는 것’에 환장한다. 게임에 미치는 것은 벌이 침을 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노는 것 중에서도 싸움이 제일 재미있다. 싸움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는 것은 총싸움이다. 

영화의 초중반, 근사한 분위기로 드라마를 끌어온 것은 바로 이렇게 종반 총싸움을 하기 위해서이다. 조선의 선비 길재가 ‘어즈버!’라고 본심을 토로하듯이 대한의 감독 김지운은 ‘총싸움 놀이’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낸다. 어린애처럼 단순하게, 가장 순수한 남자의 로망을 펼쳐놓는다. 

‘분해조립’ 놀이와, ‘총싸움’ 놀이와, ‘아련한 사랑’ 놀이와, ‘비극적이고 허망한 죽음’ 놀이를...     



그것은 꿈이다. 달콤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러나 감독 김지운은 그 꿈을 영화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현실화한다. 

그것이 인간 김지운이 ‘달콤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고, 나는 그 방법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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