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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18. 2018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영화 <한공주>

       

 영화 <한공주> (감독 이 수진. 2013년. 한국)  


이제껏 내가 본 한국영화 데뷔작 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을 꼽으라면 <플란다스의 개>(봉준호 감독. 2000년)와 <해피엔드>(정지우 감독. 1999년), 그리고 <질투는 나의 힘>(박찬옥 감독. 2003년)과 <한공주>이다. 

<플란다스의 개>는 데뷔작의 참신성과 발랄함이 돋보이는 상쾌한 영화였고, <해피엔드>는 잘빠진 대중영화, <질투는 나의 힘>은 극 중 인물에 대한 감독의 미세한 심리적 관찰이 돋보이는 현미경 같은 영화였으며, <한공주>는 신인답지 않은 능숙한 솜씨가 일품인 영화였다. 

이번에 책을 준비하면서 이 네 작품을 모두 다루고 싶었지만, 오래되고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들을 너무 많이 다루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플란다스의 개>와 <질투는 나의 힘>은 부득이 포기하게 되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두 작품도 꼭 찾아서 보기를 권한다. 

이번에 얘기할 <한공주>는 신인감독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면 장악력이 뛰어난, 기존 감독들을 통틀어도 최상위급에 속하는 뛰어난 장인적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공주(천우희가 연기)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니는, 음악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공주는 전화옥(김소영이 연기)과 친구이고, 화옥의 남자 친구 동윤(김최용준이 연기)은 공주가 알바를 하는 편의점 사장의 아들이자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이다.

화옥은 동윤이 왕따 당하지 않게 하려고 ‘개또라이’ 민호(김현준이 연기)를 비롯한 일진 패거리들을 공주의 집에 불러들인다. 

공주는 부모가 이혼 후 아빠와 살고 있는데, 아빠가 건설노동자 일을 해서 늦게 들어오고, 몇 달씩 안 들어오는 때도 많은 듯하다.


공주는 민호 일당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화옥을 생각해서 참고 지낸다. 그러나 공주의 집을 아지트로 삼은 민호 등은 결국 공주와 화옥을 집단 윤간하게 되고, 상습적인 성폭행 끝에 화옥은 임신까지 하게 된다. 

공주도 화옥의 임신 사실을 알았으나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였고, 화옥은 고민하다가 결국 자살을 한다.     

화옥의 자살로 집단 성폭행 사건이 알려지긴 했으나, 학교에서는 일체를 비밀에 부치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한다. 

피해자인 공주를 유배 보내듯 대도시의 다른 학교로 전학을 보내고, 공주는 담임선생님의 어머니 집에서 임시로 기거하게 된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유부남인 파출소장과 연애 중인데, 공주가 무슨 사고라도 친 것 아니냐며 마뜩지 않아 하지만 하숙비를 준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체 공주를 맡아준다.


새로운 학교에서 공주는 매사에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교내 아카펠라 그룹 활동을 하는 이은희(정은선이 연기)가 공주에게 호감을 보이고 가까이하려 하지만 공주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직 공주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수영뿐. 수영을 전혀 못하는 공주는 수영 강습을 들으며 열심히 수영을 배운다. 

25미터 풀장을 완주하는 것이 목표다.   

  


성폭행 사건은 정상적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학교는 가해자 학생들의 처벌을 최소화하고, 가해자 부모들은 가난한 공주 아빠를 회유해 합의를 유도한다. 

공주를 둘러싼 환경은 공주를 점점 힘들게 한다. 엄마는 재혼하여 공주를 멀리하고, 아빠는 돈을 받고 피해자와 합의를 한다. 음악에 소질이 있는 공주를 위해 아카펠라 동아리의 친구들이 동영상을 만들어 기획사에 보내는데, 공주는 크게 화내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친구들은 공주가 왜 그렇게 민감하게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후반부 결정적 순간에 인터넷에 올라온 공주 성폭행 동영상을 보게 된다. 

그 순간 공주가 은희에게 전화를 거는데, 동영상에 충격을 받은 은희는 공주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공주 아빠가 일부 합의를 해준 사실을 알게 된 다른 학부모들이 공주의 학교로 몰려와 탄원서를 써달라며 행패를 부린다. 

이제는 새 학교에서도 쫓겨나게 된 공주. 엄마는 공주를 멀리하고, 아빠는 공주를 이용해 돈을 벌고, 학교는 어떻게든 빨리 문제를 덮으려고 할 뿐이고, 친구들은 이제 공주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공주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 결국 공주는, 화옥이 그랬던 것처럼,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한다. 열심히 수영을 배운 보람도 없이...  

   

이상이 간략하게 살펴본 영화 <한공주>의 연대기적 줄거리이다. 집단 성폭행과 그 사건이 다루어지는 과정 모두 울분을 자아내는데, 영화의 실제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훨씬 더 충격적이다. 현실은 항상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대한민국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수사과정과 그 후의 과정을 보면 ‘씨발’이라는 단어밖에 생각이 안 나는 사건”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 위키’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항목의 개요 첫 줄 문장인데, 이것만 보더라도 이 사건의 내용이 얼마나 끔찍하고 충격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성폭행은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한동안 뜨겁게 달아올랐던 미투 운동 덕분에 성폭행에 대한 경종이 울리긴 했지만 아직도 성폭행을 단순한 폭행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다시 한번 환기 삼아 얘기하자면, 성폭행은 육체적인 상처보다 훨씬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긴다. 그 정신적 상처 자체도 감당하기 힘들거니와, 상처 입은 당사자를 케어하는 사람들의 부주의한 태도 때문에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지고 심각해진다. 성폭행은 그 사람의 영혼에 가해지는 잔인한 폭행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性)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성, 좀 더 단순히 말해서 섹스는 우리가 얼핏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행위다. 단순히 쾌락이나 본능적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바탕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타인과 소통하려는 욕구, 타인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이 섹스라는 구체적 형태로 표현된다. 개인을 넘어 사회를 형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에 섹스라는 행위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섹스는 상호 간의 원활한 소통을 전제로 한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몸이 가까워져서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이 섹스의 종착점이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인식이 확장됨을 경험한다. ‘나’가 ‘우리’가 되고, ‘우리’가 ‘사회’가 되는 그 기본 토대를 섹스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쾌락적 섹스가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쾌락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쾌락이  ‘나’라는 인식을 넘어서 확장되지 못하고 ‘나’를 더욱 강고하게 만드는 악순환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쾌락 중심적 섹스 개념이 성폭행을 부추기는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나의 쾌락’을 위해 ‘남의 몸’을 훼손해도 된다고 쉽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섹스란, 넓게 말해서 사랑이란, 한 사람과의 단순한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세상과 만나는 접점이 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후략)   ---<방문객>(정현종 시) 

    

정말 그렇다. 

사랑을 한다는 것, 섹스를 한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서로 만나는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들의 미래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그들의 일생이 모여서 다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확장된 개인의 경험은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고, 그 사회는 다시 보다 나은 개인을 육성하는 토대가 된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실의 성, 섹스, 사랑은 불량식품으로 마구 팔리면서 원래의 뜻을 상실해 버렸다. 화합과 소통을 전제로 하는 ‘성’이라는 단어에 단절적이고 강압적인 ‘폭행’이라는 단어가 합해진 ‘성폭행’은 사실 존재할 수 없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단어다. 


미투 운동이 막 시작되던 때 그런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2-30여 년 전의 일을 지금에서 다시 끄집어내서 무엇하는가? 옛날 일은 그냥 덮고 앞으로 잘하자.’는 식의 얘기. 그때 피해자가 하던 말은 성폭행의 핵심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당신한테는 2-30년 전의 일일 뿐이지만, 나는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순간도 그때를 잊은 적이 없다. 나에게 그 날의 성폭행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다! 성폭행의 상처는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암세포가 다른 건강한 세포를 먹어치우듯이, 성폭행의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영혼의 건강한 세포마저 감염시킨다. 자신을 파괴시키고, 자신의 주변을 단절시키고, 결국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성폭행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고, 불행하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이 다시 건강한 정신상태로 회복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성폭행은 사람이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나쁜 형태의 범죄이다.

     

영화 <한공주>가 시작하는 시점은 주인공 한공주가 당한 집단 성폭행 사건이 아주 나쁘게 처리되는 마무리 단계이다. 학교는 어떻게든 사건을 빠르고 조용하게 수습하려 하고, 가해자와 부모들은 피해자에 대한 사죄보다는 가해자 학생들이 최소한의 처벌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는 공주의 아빠는 무력하고, 유일하게 공주의 곁을 지켜주는 담임선생님도 실제 공주 편은 아닌 것 같다.  

   

공주;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교장을 비롯해 사건 관계 학부모들로 보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외롭게 앉아있던 공주가 내뱉는 첫 대사다. 이어 짐을 싸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막 전학 통보를 받은 모양이다. 전학을 가야 한다면 가해자들이 가야지 왜 피해자인 내가 전학을 가야 하느냐는 항의임이 분명하지만 공주의 말을 귀담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의 처리과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이제껏 그랬듯, 앞으로도 공주는 그 엄청난 상처를 혼자 껴안고 견뎌야 한다. 

    

담임; 공주야. 너 잘못 안 한 거 다 알아. 

         근데 그게 아냐. 잘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거고...

         사람 사는 세상에 뭐, 

         잘못했다고 죄인이고 그렇지 않았다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잖아. 

         지금 다 조용히 일 처리하고 있어. 기자들도 모르고.     


전학이 확정된 후 담임이 중국집에서 공주에게 하는 말이다. 담임은 저녁을 사주면서 아빠의 전화도 받지 말라고, 마치 자신이 공주를 위해 전적으로 책임질 것처럼 얘기한다. 

<한공주> 영화 자체가 가슴 아프고 답답하고 짜증 나는 내용이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제일 울화통이 터진다. 

사건을 해결해나갈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가장 공주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공주의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할 사람이 비겁한 관리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정말 앞에 있다면 먹고 있는 짬뽕 그릇을 얼굴에 확! 덮어버리고 싶은, 공감지수 0%의 인간이다.     


이런 담임의 태도와 대비되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맷 데이먼과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굿 윌 헌팅>(구스 반 산트 감독. 1998년. 미국)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윌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어린 시절 양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한 상처로 인해 세상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반항아이다. 심리학 교수인 숀(로빈 윌리엄스가 연기)은 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심리상담을 진행하는데, 윌이 마음을 닫음으로써 실패에 직면한다.


그러나 숀은 서두르지 않는다. 윌 스스로가 마음을 열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기다린다. 

시시껄렁한 농담과 과거의 사소한 기억들을 공유하면서 숀과 윌은 차츰 가까워진다. 숀의 아내가 방귀를 뀌는 얘기로 시작된 서로의 소통은 드디어 두 사람 모두 아버지에게 폭행당한 공통의 기억까지 공유함으로써 심리적으로 매우 친밀해진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같이 샌프란시스코로 가자는 여자 친구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윌은 여전한 마음의 장벽을 드러내 보인다. 관계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미리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숀이 “진짜 하고 싶은 게 뭐냐?”라고 윌에게 묻는 것은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지 말라는 충고다. 

윌같이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딱딱한 껍질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거짓된 자아를 가지고 산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죄의식을 감추는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그 상처가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게 아닌데도,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싫어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마음을 닫는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상처를 직면하지 않으면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사랑과 추억>(The Prince of Tides,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감독. 1991년. 미국)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년의 남자가 주인공이지만, 자신을 위장하는 모습은 윌과 다르지 않다. 상처받은 영혼은 성장하지 못한다.  

   

숀; 네 잘못이 아니야! 

    

이제 막 자신의 상처를 다시 직면하려는 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말 한마디였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피해자들, 특히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도 바로 이 말,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피해자들의 경우 처음에는 공포감과 분노가 엄습하지만, 점차 그 바닥을 죄의식과 자기비하(‘바보처럼 그런 일을 당했다. 내 잘못이다.’라고 하는 자책감)가 차지해 버린다. 심리학자인 숀은 정확하게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네 잘못이 아냐’라고 말을 시작한다. 

그러나 윌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알아요.’라고 말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숀은 다시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이건 핵심 자체이므로 다른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다. 이건 승부다. 윌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두드려야 한다.  

   

베토벤은 <운명>을 작곡하면서 ‘운명은 네 번 문을 두드린다’고 했다던가? 그러나 숀은 무려 열 번, 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알아요’ ‘안다구요’ 하면서 받아들이는 척하는 윌을 마음으로 껴안으면서 숀은 윌이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고 다시 받아들이라고 진심으로 권하고 있는 것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윌은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연다. 

문 앞을 지키던 세상에 대한 적의와 조롱이 사라지고, 단단한 자물쇠 역할을 하던 열등감과 죄의식이 녹아내린다. 녹아내린 죄의식은 윌의 눈동자에서 눈물로 솟아 나와 세상 밖으로 떨어진다. 

이제 비로소 윌의 악몽이 끝났다. 눈물은 항상 과거가 끝났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물론 이건 영화 이야기다. 

<굿 윌 헌팅>의 숀 교수처럼 정곡을 찌르는 말을 열 번씩 반복해서 말해줄 사람이 현실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사실 숀이 ‘네 잘못이 아냐’라는 말을 세 번 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려고 영화를 보면서 내 기억이 틀린 것을 알고 조금 당황했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번인지 세기 시작했고, 열 번이나 되는 걸 알고 더 마음이 움직였다. 그만큼 숀의 마음이 진실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윌의 닫힌 마음이 강고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충실해 있었다는 뜻이다.

이건 윌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숀이라는 유능한 상담사를 만난 것은 분명히 행운이다. 

열 번의 도끼질을 확신 있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베토벤도 운명의 문을 네 번 두드리고,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세 번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그러나 <한공주>를 생각하면서, 공주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것은, 

열 번이 아니라, 

네 번이 아니라, 

세 번이 아니라 단 한 번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사건 담당자들, 엄마 아빠를 비롯한 보호자들, 주위의 친구들, 그들 중 누구 하나만 진심으로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줬다면, 한번 만이라도 그렇게 말해 줬다면, 그래도 공주가 스스로 세상을 외면하고 말았을까? 

음악을 좋아하고, 혹시라도 빠져 죽으려 할까 봐 미리 수영도 배우던 그 연약한 영혼의 아이가 그렇게 쓸쓸히 다리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았을까?     


공주; 조용히 머릿속으로 음계를 그리면 눈앞의 모든 게 음표로 바뀌어. 

         그리고 노래가 시작돼. 

         숨소리, 발자국 소리, 바람소리. 철 긁는 소리까지도.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그땐 외로움도 슬픔도 두려움도 잠시 잊어.

친구; 노래가 종교 같은 거네? 공주에겐.

공주; 응. 힘은 되는데, 현실에 나타나진 않아.     


영화가 시작되면서 처음 들리는 내레이션이다. 

불행하게도, 힘이 되는 노래는 현실에 나타나지 않고, 숀 교수처럼 진심으로 도와주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배우던 수영은 끝내 공주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한다. 

<굿 윌 헌팅>의 윌은 새 삶을 시작했지만, <한공주>의 공주는 차가운 강물에 빠져 죽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하자. 나는 <한공주>가 ‘나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공주>가 잘 만들어진, 완성도 높은 영화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한공주>는 더 위험하고 나쁜 영화이다. 서투른 솜씨로 휘두르는 칼은 크게 위험하지 않지만, 높은 공력으로 깊이 찌르는 칼은 치명상을 입히기 쉽다. 

더구나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면서 편안히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게 복잡한 문제이긴 하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의 질문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간단히 말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만큼 <한공주>라는 영화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나로 하여금 예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주었다는 뜻이고, 그건 <한공주>의 감독이 나름 확고한 예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관을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해냈다는 뜻인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예술이나 인생 등의 단어를 언급하는 게 쑥스러울 정도로 표피적인 오락에 그치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이런 영화를 만난다는 것도 하나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식으로 말하면, <한공주>의 감독처럼 ‘나 나쁜 놈이야’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영화도 드물다는 말이다.  

   

<한공주>는 성폭행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성폭행이라는 소재 자체는 어떤 가치판단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가치관이 드러난다. 어떤 소재냐가 아니라, 그 소재를 그려낸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작품의 주제요 작가의 관점이라는 말이다. 

얼핏 <한공주>가 성폭행을 비판하고, 그것을 은폐하는 사회조직을 비판하고, 피해 당사자인 한공주를 옹호하고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감독의 시선이 한공주의 편에 서 있지 않다는 말이다. 

한공주가 정말 불쌍한 이유는 극 중 인물 누구도 공주를 격려하고 위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만든 감독의 시선이 공주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사건의 과정에서 전학을 간 공주의 현재 생활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 화옥의 환상과 과거의 사실이 편집되어 드러난다. 공주가 조금씩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에 맞춰 과거는 점점 핵심 사건에 다가간다. 

물론 이건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드라마 전개 방식이다. 현재와 과거가 서로 교차하면서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과거의 문제가 극복되거나 혹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흔히 보는 이야기 형태이다.


처음에는 공주의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는 회상처럼 보이다가, 차츰 감독이 극적 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병치시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후반부 공주가 은희의 도움으로 학교생활에 적응해 감에 따라, 성폭행 사건의 실체도 점점 강도를 더해 간다. 

이럴 경우 갈등과 긴장이 점점 고조되어 결국 파국 내지는 해결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한공주>의 경우는 특이하게 과거 사실의 밝혀짐이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드라마 상으로 악화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어차피 이 영화는 공주에게 ‘출구 없음’의 드라마이다. 아무도 공주 편에서 문제를 풀어주지 않는다. 

학교 당국은 조용히 덮기에 급급하고, 사건 후 처음 찾아간 엄마는 새 남편이 공주를 보고 누구냐고 묻자 ‘아무도 아니야’ 라면서 멀리 하고, 아빠는 돈을 받고 가해자와 합의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은희가 적극적으로 공주를 좋아해 주는 것인데, 그것도 가혹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은희의 노력과 음악 덕분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공주가 은희의 집에 놀러 갔을 때를 보자.  

    

공주; 안 궁금해?(공주는 자신을 열어 보일 준비가 돼 있다.)

은희; 뭐가?

공주; 왜 엄마랑 떨어져 살구, 어디서 왔구. 

         부모님은 뭐 하는지, 뭐 이런 거.

(다시 말하면 자신이 왜 전학을 왔는지,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겠다는 말이다.)

은희; 음... 솔직히, 난 다른 게 궁금한데? 

무조건 얘기해 주기! 키스... 해봤어?

공주; (실망하는 공주. 고백하려고 했는데...)...

은희; 해 봤구나! 누구랑? 

첫사랑이랑? 몇 명이랑?

공주; (마음이 닫혔다) 말해줘?

은희; 어! 완전 부러워.

공주; 마흔 셋...

은희; 오...! 날라리!

공주; 근데 사람은 아니야.

은희; 에? 그럼?

공주; 고릴라.

은희;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뽀뽀하며)마흔네 번째! 

         44는 재수 없으니까 한 번 더! 

이렇게 매일 해서 천 번을 채워 주리라!

(애써 국면을 즐거운 것으로 마무리하지만 이미 비극적 상황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 가는 중이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이다. 

공주가 자기 얘기를 하려다 중지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3년 만에 엄마를 만났을 때도 공주는 자신이 당한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막 털어놓으려 할 때 엄마는 공주의 말을 막으며 ‘당분간 오지 마. 엄마도 요즘 힘들어’라고 말한다. 

자신의 고통을 덜어보려는 공주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다.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한공주> 속의 어른들은 전혀 젊은이들의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일자리가 중요하고, 자신들의 연애가 중요하고, 자신들의 술값을 버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공주의 단 하나 희망인 은희가 하는 행동은 정말 받아들일 수 없다. 

가장 공주를 편들어왔고 힘이 되어준 또래 친구 은희는 그러면 안 된다. 

성폭행을 당해서, 그것도 집단으로 윤간을 당해서 쫓겨온 공주가 처음 자신의 마음을 열고 그 아픈 고백을 하려고 한다. 

늘 자살을 머리에 두고 살면서, 혹시 마음이 바뀌어 다시 시작하고 싶을까봐 수영을 열심히 배우는 공주가 이렇게 그 첫 걸음을 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은희는 그런 공주를 외면한다. 공주가 내미는 손을 거절할 뿐 아니라, 아주 잔인하게 공격하기까지 한다.


“(키스)해봤구나! 누구랑? 

첫 사랑이랑? 

몇 명이랑?” 

    

이건 공주더러 죽으라는 얘기다. 

한 번도 아니고, 연타석으로 강력한 펀치 네 방을 때려 맞는 공주의 심정이 어떨 것 같은가? 

가장 여린 마음의 상태를 가장 치욕적이고 끔찍한 기억으로 도배시키는 저 잔인함을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백 번 만 번 양보해서 은희가 이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끔찍한 대사를 할 수는 없다. 

꼭 해야만 했다면 ‘해 봤구나! 누구랑?’ 정도에서 멈췄어야 했다. 나는 그게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믿는다. 

    

이쯤 되면 감독의 태도에 대한 얘기를 안 할 도리가 없다. 

나는 이것이 정확하게 <한공주>를 만든 감독 이수진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 이수진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다.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영화가 필요하고, 이야기가 필요하고, 배우가 필요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펼쳐 보이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수진은 그 도구들을 능숙한 솜씨로 설득력 있게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전달되는 이수진의 생각, 사상이 나쁘다는 점이다. 나쁜 생각을 훌륭한 솜씨로 그려내는 <한공주>는, 그러므로, ‘나쁜 영화’이다. 

    

<한공주>는 성폭행에 관한 영화이고, 그것에 대한 입장은 단순 명확하다. 피해자 공주에게는 잘못이 없고 

가해자와 학교 담당자들, 책임 있는 어른들, 사회 당국자들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다루는 방법이 묘하다. 피해자 공주의 심리적 묘사에 중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에 방점이 있지도 않다. 

공주와 주변 사람들은 서로 교통 하지 못하고 겉돈다. 겉도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겉돌게 만드는 방법이 문제라는 말이다. 서로가 자신을 드러내는 가운데 마찰이 생기는 게 아니라, 감독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어긋난다. 

앞에 예로 든 공주와 은희의 에피소드가 그런 경우이다. 

공주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어 극복해보려고 하면 눙치거나 비틀어서 무력화하면서, 영화는 점점 그날 성폭행의 핵심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영화의 하이라이트 순간에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과거 성폭행이 있었던 날의 광경이다. 마치 미스터리 영화처럼, <한공주>는 그날의 성폭행 사건을 핵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다시 말해서, 그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감독의 관심사라는 말이다.     


그 날 그 장면을 통해서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피해자 공주를 그렇게 버림받게 하고, 주변 사람들과 사회 전체를 무책임한 죄인으로 만들었을까? 

사실, 감독의 실제 의도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영화 속에 드러난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이는 그날의 그 상황... 


많은 남학생들이 있었다. 

술과 담배가 넘쳐나고, 불량한 기운과 난잡한 집안 풍경.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공주를 강간하는 상황이었고, 다른 구석에서는 남학생들의 동성 섹스가 벌어지고 있었다. 

날은 더웠으나 선풍기는 고장이 났고, 공주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탈한 청소년 패거리들이 풍기는 무질서의 분위기는, 공포스럽다.    

 

<한공주>는 내가 본 가장 무서운 영화 중에 하나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한공주> 말고는 <링>과 <곡성> 정도다. 일탈한 청소년들이 떼로 몰려서 악행을 저지르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정말 무섭다. 

그리하여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선명하게 남는 생각도 ‘일탈한 남학생 패거리에 대한 공포감’ ‘성폭행에 대한 공포감’이다. 

이렇게 공포감이 자극적으로 남는 이유는, 영화의 구성 자체가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한공주>는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과거의 성폭행 사건이 차츰 밝혀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공주가 겪어가는 후일담이다. 두 축이 간헐적으로 병치되다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성폭행의 전모가 밝혀짐으로써 공포감의 극대화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길이다. 성폭행에 대한 공포감을 환기시키는 것은 성폭행을 없애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또 성폭행 피해자에게 심리적 위로나 치료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만 심어줄 뿐이다. 

영화의 결말부 은희가 공주를 대하는 마음은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사실이 모두 밝혀지고 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후, 공주는 버려지듯 지하철을 탄다. 

그 때 은희로부터 ‘어디니 공주야? 우리 모두 걱정하고 있어. 네 잘못 아니야! 그러니까 꼭 전화 줘... 보고 싶어.’라는 문자가 온다. 

절체절명의 상황, 우리는 공주가 막다른 길에 도달했음을 안다.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은희에게 전화하는 공주. 그러나 은희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니, 받을 수가 없다. 은희는 때마침 인터넷에 올라온, 공주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희는 공주가 성폭행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성폭행 동영상을 본 은희는 왜 공주의 전화를 받지 못했을까? 

만약 그 전화를 받았다면, 그리고 공주에게 ‘네 잘못 아니야.’라고 말해주기만 했다면 죽지 않았을텐데 왜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 

    

왜 감독 이수진은 은희가 공주의 전화를 받지 않도록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나는 그게 감독의 솔직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작품의 핵심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 ‘성폭행에 대한 공포감’을 은희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사고방식이다. 분명히 성폭행에 반대하고, 그 얘기를 하기 위해 한 시간 반 넘게 공들여 영화를 끌어온 사람이 왜 결정적인 순간에 ‘성폭행은 무서워요’라는 생각을 심어주려 했을까? 그것이 성폭행에 반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수많은 말이 제각각 먼저 얘기를 하겠다고 쏟아져 나와서 정리가 안된다. 

은희가 전화를 받지 않도록 만든 감독 이수진의 선택에 대해 나는 하루 종일이라고 반대하는 의견을 얘기할 수 있다. 이건 나쁜 선택이다. 보는 사람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준다.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각자의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따라서 사람을 얘기한다는 것은 곧 관계를 얘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말이다. 

신영복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라고 말한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걷는 사람에게 내 우산을 씌워주는 것보단 그 사람과 같이 비를 맞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주인공 공주에 대해서 <한공주>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관찰-애정-실천적 연대-입장의 동일함’이라는 신영복의 분류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가? 나는 관찰의 단계에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감독 이수진은 전혀 성폭행 피해자 한공주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 자신의 의도, 자신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주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를 통해 드러난 감독의 가장 큰 의도는, 감독 이수진의 실제 의도는 그렇지 않더라도, ‘성폭행은 공포스럽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은희는 공주의 전화를 받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공주가 죽음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적지 않게 흥분된 상태다. 가뜩이나 주관에 치우친 글인데 더욱 감정적이 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비난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선명하게 틀린 생각을 정확한 솜씨로 그려내는 작품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그 ‘틀린 생각’이 매우 중요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흥분을 억제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하려 한다. 

나는 지금 ‘나쁜 생각들’과 전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전쟁은 공포스럽다.’라고 한다면 문제가 없다. ‘폭행은 공포스럽다.’라고 말해도 문제가 없다. 전쟁이나 폭행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멀리하고 조심해서 일어나지 않게 할수록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폭행’이라고 하면 경우가 다르다. ‘성(Sex)은 멀리하고 조심할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인간의 근본 행위이다. 이 글의 초반에 얘기했던 것처럼 타인과 소통하는 출발점이고 사회적 관계의 토대가 된다. 

’ 성폭행은 공포스럽다‘는 생각은 ’성은 공포스럽다‘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 성폭행을 피하려면 성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게 피하려 한다고 피해지는 문제인가? 

성폭행 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피하지 않아서, 피하지 못해서 당했다고 생각하는가? 

실제 성폭행의 많은 수가 가족이나 친척 등 가까운 사람이거나 친분이 있는 경우인데, 그 모든 경우를 피하려면 차라리 사람을 떠나서 혼자 살아야 한다. 

’성폭행은 공포스럽다‘는 생각은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경계를 전제로 한다. 그런 생각으로 보는 세상이 끔찍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역시 당연한 결말이다.    

 

더 큰 문제는 감독이 주인공의 입장에 서 있지 않으면서 그런 체 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간간히 언급했듯이, 영화는 늘 공주가 손을 내밀 때 외면하도록 만든다. 은희만이 유일하게 공주를 도와주는데, 그런 은희마저도 결정적 순간에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운전을 할 때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는 것과 같다. 공주의 편에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공주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공주의 입장을 이해했다면 그렇게 잔인하게 공주를 몰아붙일 수가 없다. 그렇게 성폭행 장면을 핵심부에 배치해서 공포감을 극대화시킬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공주가 강물 속을 유영하는 장면 위로 ‘한공주! 한공주!’ 연호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이미 공주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수진 감독이 일부러 한공주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을 ‘한공주’로 정하고, 한공주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만들었을 때는 분명히 한공주에 대한 선의가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선의의 결과가 한공주에게 우호적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부지기수로 겪는다. 

나는 호감의 표시로 농담을 했는데 상대는 비꼰다고 기분 나빠한다. 애교 삼아 약간 칭얼거렸더니 가뜩이나 피곤한데 짜증내지 말라고 화내며 가버리기도 한다. 선의로 베푼 호의에 ‘약 올리냐’ ‘그래, 너 잘났다’는 등의 당황스러운 반응을 받았던 적도 많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게 인생이고,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가야 한다.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 솔직함이 가져오는 결과를 또 다른 발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항상 자신에게 솔직할 것!   

  

예술작품은 창작자의 마음을 담는다. 좋은 작품일수록 그 순도가 높다. 

나는 감독의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한공주>를 높이 평가한다. 감독 이수진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도 크다. 

예술가에게 가장 큰 행운은, 사회적 성공으로 명예를 얻는 것보다 작품을 겪어가면서 자기성장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한계와 결함을 보고, 그것을 교정하고 완성시켜 궁극적으로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다. 

그러자면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좌회전 깜빡이를 끄고, 자신의 속도를 다해 자신의 방향으로 달려볼 일이다. 

전설의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는 홈런의 방향까지 예고하고 쳤다고 하지만, 대체로 홈런이란 작정한다고 쳐지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스윙을 할 때 홈런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나는 이수진 감독이 충분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에 갇혀서 이야기를 종속시키지 말고 맘껏 자신의 기분대로 이야기를 펼쳐보는 것이다.   


       

*** 결정적 장면 *** 

    

그날, 17마리의 고릴라들의 시간. 

그 장면이 왜 나에게 공포스러웠는지, 왜 영화를 볼 때뿐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난 한참 후까지도 그 공포감이 계속되었던 것인지 생각해 본다. 

영화는 주인공 한공주를 따라 진행되면서 치밀하게 그날의 사건을 조금씩 재배치한다. 

그 사건에 대한 공주의 공포감과 피해의식을 계속 강조해왔으므로, 결정적 순간에 보이는 그 장면이 강력한 공포를 유발한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게 감독의 의도였으니까. 

그 의도가 관객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는 앞에서 여러 번 얘기를 했으므로 또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가 그렇다는 말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름 오랫동안 영화를 직업으로 삼아 일 해왔고 또 영화보기에 관한 한 산전수전을 다 겪었기 때문에 웬만한 자극에는 단련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본 영화 중에서 제일 무서워했던 장면은 <링>의 하이라이트, 산발한 귀신이 TV 모니터에서 (실제로!) 기어 나오는 장면이었다. 정말, 그 장면을 볼 때 나는 너무 놀라고 소름이 끼쳐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한공주>의 공포감은 조금 달랐다. 

<링>은 그렇게 무서웠지만 그때뿐이었다. 무서웠다는 기억은 있지만 그 공포감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공주>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공포감이 계속되었다. <한공주>가 개봉한 것이 2014년이고 이 글을 쓰는 시점은 2018년이다. 2014년 이후 가끔 나는 <한공주>를 다시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보지 못했다. 무서웠던 그 장면의 기억이 살아있어서 다시 보기가 겁이 났다. 

이번에 <한공주>에 대해 써야겠다고 작정하고 나름 용기를 내어 다시 보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 무서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한공주>의 그 날 그 장면은 나에게 공포스럽다. 

이상한 일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영화 전문가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몇 번 반복해서 보았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공포감의 근원지를 찾아내긴 했다. 내게 지워지지 않는 공포감을 심어준 결정적 장면, 그것은 바로 그날 방구석에서 열심히 벌거벗은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고릴라 한 마리였다! 

잠시 그 상황을 복기해 보자. 

    

공주의 집 안에 17명의 남자애들과 공주가 있다. 

공주는 화옥의 남자 친구인 동윤이 건네준 약 탄 맥주를 마시고 안방에 누워있다. 고릴라 가면을 쓴 민호가 공주를 강간하고 나와 벗은 가면을 동윤에게 씌워준다. 다른 아이는 자기 차례라고 투덜대고, 동윤은 겁을 낸다. 

동윤을 방으로 들여보낸 민호는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땀에 젖은 얼굴을 들이민다. 그곳에는 회전되지 않는 고장 난 선풍기가 있다. 

민호가 소파의 아이들 속으로 몸을 던지면 카메라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거실의 구석을 보여준다. 

그 쪽은 조금 전 또 한 마리의 고릴라 가면이 간 곳인데, 하체를 벌거벗은 누군가가 열심히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때 공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동윤의 아빠가 들어온다. 모두 놀라 얼어붙는 남자애들.


장면이 바뀌면 전학 간 학교의 교장이 공주에게 근신하라고 집으로 보내고, 공주는 선생님 엄마의 집에서도 쫓겨난다. 허겁지겁 쫓아 나온 파출소장은 동윤의 탄원서에 사인해달라고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더라고 한다. 


“왜요? (제가) 사과를 받는데요... 저는 왜 도망가야 돼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공주.     

그리고 쇼트가 바뀌면 다시 그날 공주의 집. 

고장 난 선풍기가 돌아가고, 서있는 아이들 사이로 공주와 동윤 아빠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공주를 부축한 동윤 아빠가 슬쩍 곁눈질을 하고, 이어 구석에서 항문성교를 하고 있는 남자애가 보인다. 

그리고 장면은 찜질방의 공주로 넘어가지만 핵심은 여기까지다. 이후 상황 전개는 정해진대로 흘러간다. 


바로 이 장면, 공주가 떠난 후 마지막으로 보이는 남자애의 항문성교 쇼트... 

이게 바로 내 공포심의 근원지였다!  

   

이 쇼트는 사실 이상한 쇼트다. 상황 전개와 무관한,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쇼트다. 

이야기는 공주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공주와 동윤 아빠는 이미 집을 거의 나간 상태다. 

이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도 정상적이지 않다. 분명히 가해자는 남자애들이고 그 현장에서 물러나야 할 대상도 남자애들인데, 정작 ‘도망가듯’ 집을 빠져나가는 것은, 공주가 의아해하는 바 그대로, 집주인이고 피해자인 공주이다. 

상황을 정리해야 할 동윤 아빠는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남자애들을 지나 집을 나간다. 

피해자와 목격자는 도망치듯 사라지고, 가해자는 집을 차지하며 남아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벌거벗은 엉덩이를 움직여대고 있다.    

 

나는 솔직히 이 쇼트가 이해되지 않는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했을 때, 남자애들은 아직 ‘남자 어른’을 무서워한다. 동윤 아빠가 집에 들어왔을 때 남자애들 모두 놀라 일어나 얼어버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주와 동윤 아빠가 집을 나갈 때까지도 그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냥 서 있었다. 

그런데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성교에 열심인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동윤 아빠는 왜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그 남자애는 동윤 아빠가 온 것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고 하던 행동을 계속한 걸까?   

  

이해가 안 되어서 이리저리 궁리해보던 나는 혹시 남자애 아래 있는 아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 즉 공주의 친구 화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그건 너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화옥이라면 동윤 아빠가 화옥을 그렇게 두고 그냥 가는 것이 전혀 타당성이 없다. 공주 역시 화옥이 집에 있다면 그냥 나갈 리가 없다. 

아무런 설명이 없긴 하지만 그 상황은 남자애들끼리의 성관계라고 봐야 한다. 

그러면 왜 이 동성애 쇼트가 나에게 그렇게 공포스럽게 보였을까?     


먼저 나의 잠재의식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동성애 공포증(호모포비아)’을 자극했을 가능성. 

그러나 그게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다. 또 <한공주>에서도 민호가 동윤과 성관계를 한다고 공주에게 얘기했고, 실제로 이 장면 이전에도 내가 공포감을 느꼈다는 그 상황이 보인 바 있다. 

만약 동성애 공포증이 포인트라면 두 번째 볼 때보다 처음 볼 때 더 무서웠어야 하는데, 내가 정작 공포감을 느끼는 장면은 두 번째 장면이다. 동성애가 나에게 공포감을 준 게 아니라는 말이다.  

   

민호가 한 말을 유추해보면 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때그때 기분과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성관계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 섹스에 대해 가진 일반적인 선입관념(적당히 독립된 장소와 두 세 사람의 상대, 남과 차단된 상황, 어울리는 분위기 등..)에 상관없이, 이들은 어느 일방의 욕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섹스가 가능한 동물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남자애들은 일탈 청소년들이다. 제도권 사회의 자장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동물의 세계처럼 본능에 충실한 즉흥적인 행동만 일삼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공주가 경찰에 신고를 하자 얼른 수습하는 전화를 하는 것을 보면, 교활할 정도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이다. 필요한 경우 아닌 척 멈출 줄도 아는 아이들인 것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사회가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서 악행과 타락과 일탈을 즐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마지막 쇼트 속의 남자애는, 그 고릴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질주한다. 

그가 열심히 엉덩이를 움직여대고 있을 때 동윤 아빠가 들어왔고, 나중에 동윤 아빠가 공주를 부축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갈 때에도 그 고릴라는 여전히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사실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동윤 아빠가 들어오자 모든 아이들이 얼어붙은 듯 일어섰고, 나갈 때까지 그렇게 멈춰서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멈추지 않았을까?     


나는 그 ‘멈추지 않음’ 혹은 ‘멈출 수 없음’이 내 공포심의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동성애 행위 자체가 공포스러웠던 게 아니라, 그 행위를 멈출 수 없음이 나를 공포스럽게 했다.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파국을 향해 돌진하는 그 마음이 나를 공포스럽게 했던 것이다.


나는 앞에서 이 쇼트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실적 리얼리티로도 안 맞고, 극적 맥락으로 봐도 맞지 않는다. 

이 쇼트가 감독의 실전적 감각이었는지 원래부터 의도했던 바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돌출한 장면이 나를 공포스럽게 했고 작품 전체에 묘한 균형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성공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때로는 균형과 맥락을 깨트리는 것이 오히려 작품의 효과를 살리는 경우도 있다.

     

이 멈추지 않는 고릴라의 질주 반대편에는 절대 무너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회제도가 있다. 

집단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도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인생을 포기할만한 엄청난 사건이지만, 바다에는 그저 백사장에 부서지는 하나의 파도일 뿐이다. 

고릴라의 질주는 이 완고한 질서에 대한 저항, 혹은 몸부림의 표현이다. 이 마음, ‘공주처럼 자살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미쳐야 겨우 세상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이렇게 비현실적, 비논리적 상황으로라도 세상에 대한 적의를 표시하려고 하는 이수진 감독의 그 내면이 나는 무섭다.   

  

세상이 나쁘다고 말하는 영화는 많다. 

중요한 것은 ‘그 세상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고 중심이라는 것을 포기할 때 이미 그 인생은 끈 끊어진 풍선이고, 수프를 넣지 않은 라면이다. 가짜이고 기망이고 사기다. 믿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끈만 잡아당기면 쓸려 내려가는 수세식 변기의 똥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예술작품들이 많지만, 

그 바탕에는 확고한 주인의식이 있다. 세상이란 별게 없으니 괘념치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지, 세상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나밖에 없다는 고립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온통 세상이 나에게 적대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젊을 때에는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젊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 고립감, 적대감을 동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게 나를 살게 하는 에너지이고,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니까. 죽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서 조금씩 조금씩 내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작은 모임 혹은 가족이 되고, 서로 연대가 되고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점점 하나 됨을 경험해가야 한다. 

사람(人)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生) 것, 그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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