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에 대해 무수한 질문과 해답이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두 개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왜 사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은 아직 분명하게 나와있지 않은 듯하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답안이 나와있고 그 내용도 유사해 보인다. ‘욜로’ ‘렛잇비’ ‘카르페 디엠’ 등은 우리가 쉽게 떠올리게 되는 대표적인 대답이다.
모두 알다시피 ‘욜로’는 영어 ‘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이고, ‘Let It Be’는 비틀스의 노래로 유명해진 ‘있는 그대로 두라’는 말, ‘Carpe Diem’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왔던 말로 ‘Seize the day(현재를 잡아라)’라는 뜻이다. 어차피 인생은 한번뿐이니 아등바등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인데, 막상 따지고 들면 이 또한 간단치 않다.
현재에 충실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있는 그대로 두라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인가? 짧게 얘기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하는 게 편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장 1절-31절)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The Bible)>의 시작 부분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이 나오고, 그 중간중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구체적 행위(창조)와 그것의 주관적 평가(보시기에 좋았더라)가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판단기준이 ‘스스로 보기에 좋은가’ 하는 점이라는 걸 얘기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행동이 ‘스스로 보기에’ 좋기도 쉽지 않거니와, 막상 ‘스스로 보기에 좋은’ 행동을 하려고 해도 남의 이목이나 주변 상황 등이 신경 쓰여서 실제로 해내기가 쉽지 않다.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갖고 두려움을 이겨 행동에 옮길 때 그는 사회의 전위가 되고 역사의 선구자가 된다.
‘퍼스트 펭귄’은 그렇게 탄생한다. 펭귄의 역사에 남기 위해서 혹은 남보기 좋으라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기에 좋아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천지창조는 이루어진다.
예술품의 창조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근사한 작품의도나 주제의식을 얘기하더라도 그 모든 것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스스로 보기에 좋았더라’, 작가의 주관적 만족감이다.
그러나 그 만족감을 드러내는 정도는 작가마다 모두 달라서, 어떤 작가는 완전한 주관성으로 자신을 몽땅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남의 눈치를 살펴 거의 자신의 입장을 숨기고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려고 한다.
영화에 국한해 말하자면 앞의 경우를 예술영화, 혹은 작가 영화라고 하고 뒤의 경우를 대중영화라고 부르곤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 영화감독으로는 <하녀>(1960) <화녀>(1971) <화녀 82>(1982) 등을 만든 김기영 감독이 있고, 현재 활동 중인 감독 중에는 홍상수, 김기덕 감독을 들 수 있다.
세 사람이 각자 독특한 작품 스타일을 갖고 있지만, 스스로 보기에 좋은 ‘자뻑 영화’를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김기덕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거칠고 투박하고 생경하고 미성숙하고 조잡하다. 겉보기만 그런 게 아니라 내용도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예술작품이라고 하기에도 주저하게 된다. <수취인 불명>(2001)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그리고 이제 얘기할 <사마리아>가 없었다면 나는 그를 ‘얼치기 예술가’라고 무시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몇 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홈런을 한 개밖에 못 쳤다고 해서 그가 홈런타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타율이 아니라 홈런을 쳤느냐 못 쳤느냐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예술도 그렇다. 하나라도 예술품을 만들어냈다면 그는 예술가이다. 좋고 싫고를 떠나서, 김기덕은 분명히 예술영화감독이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21세기 문턱을 넘어선 지금, 예술을 직업으로 한다고 말하기는 영 쑥스럽고 멋쩍은 일이 되었습니다. 예술은 더 이상 그 효용성을 잃었고,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굴복했듯이) 세속적 가치에 대항하는 두 축, 종교와 예술은 이제 돈(Money)이라는 유일한 가치에 흡수돼버렸지요. 그래도 예술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다 가끔, 정말 기적처럼 예술적 체험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은 너무 희귀한 것이어서, 말 그대로 꿈인가 생시인가, 혹시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입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영화 <화양연화>가 그랬습니다.
사실 저는 왕가위 감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감각적이어서 미처 본질에 도달하기도 전에 휘발되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화양연화> 역시 다르지 않았지요.
늘 ‘혹시나’ 하고 봤다가 ‘역시나’하고 실망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똥이었던 시간들이 금으로 변하는 예술적 체험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화는 다 끝난 시간이었습니다.
감상적인 연애담이 끝나고,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앙코르와트에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랑의 시간을 앙코르와트의 유적 안에 봉인시켜버리는 순간, 나는 갑자기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걸 느꼈습니다.
화면 속에 오랫동안 보여지는 앙코르와트를 보면서, 현재에 대한 감각적 집착이 사실은 영원에 대한 갈구였다는 것을, 지루했던 영화 속 지난 시간들이 사실은 금이었음을 실감했습니다.
주인공이 사랑의 불멸을 꿈꾸듯이, 앙코르와트가 시간을 이기고 영생하려 하듯이, 왕가위는 사소함 속에서 변치 않는 진실을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파도의 잔물결을 통해 바다의 광대함과 짠맛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예술은 체험입니다. 아무리 멋진 바다를 그렸어도 짠맛이 나지 않으면 바다가 아닙니다. 맹물이지요.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는 점점 맹물이 줄어들고 있다는데, 예술작품은 왜 온통 맹탕이 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 <너는 될애> (이하영. 희망소리. 2017년) 중에서
부득이하게 길게 인용한 것은 위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는 기적처럼, 똥이었던 시간들이 금으로 변하는 예술적 체험을 하게 해 주었다!
무릇 예술가들이란 연금술사이다. 똥 같은 시간을 금으로 만드는 시간의 연금술사.
처음에는 그저 그런, 말 그대로 똥 같은 영화인 줄 알았다. 소재는 청소년 성매매. 시나리오는 조잡하고 기술은 서툴렀으며, 연기는 미숙하고 연출은 엉성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유럽 여행을 갈 돈을 모으기 위해 성인 남자들과 성매매를 하는 여고생 여진과 재영. 여진이 재영인 척 남자들과 약속을 잡으면, 재영이 모텔에서 남자들을 만나 성매매를 한다. 여진은 재영이 남자들을 만나기 전 화장을 해주고, 그녀가 남자들을 만나고 있는 동안 밖에서 기다린다.
모르는 남자들과 만나 섹스를 하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재영. 남자들과의 만남과 섹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재영을 여진은 이해할 수가 없다. 여진에게 어린 여고생의 몸을 돈을 주고 사는 남자들은 모두 더럽고 불결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텔에서 남자와 만나던 재영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결국 여진의 눈앞에서 죽게 된다.
여기까지가 ‘바수밀다’라는 부제로 진행되는 1부 이야기의 끝이고, 이어 ‘사마리아’라는 부제로 2부 이야기가 진행된다.
30분 정도 되는 ‘바수밀다’ 부분을 볼 때는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재영이 항상 웃는다는 게 특이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특이한 설정만으로 영화를 좋게 보아주기에는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너무 낮았다.
2부 ‘사마리아’는 여진이 재영과 함께 모은 돈과 수첩을 태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마음을 바꿔 수돗물을 틀어 -뒤에 얘기하겠지만, <사마리아>에서 물은 속죄의 의미로 종종 쓰인다- 불을 끈 여진은 “이 돈, 내가 다시 돌려줄게. 그래야 덜 미안할 거 같아”라고 말하고는 지난날 재영이 만났던 남자들을 다시 만나러 나선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영화는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질적 승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지의 영역, 금지된 장소, 재영의 세계였던 곳에 여진이 들어선다. 재영의 마음으로, ‘아! 이랬었구나!’ 하는 심정이 되어 음습한 골목을 보고 방 안을 둘러보며 다소곳이 거울을 보며 치장을 한다.
그리고 남자를 불러 성매매를 한다.
이 성매매는 조금 복잡하다. 원래 재영이 팔고 남자가 샀던 매매지만 이번에는 여진이 돈을 돌려준다. 돌려준다고 말을 하지만 끝난 거래에서 돈을 돌려준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 남자는 사러 왔으나 결과적으로 판 것이 되었고, 여진은 돈을 돌려준 것이 아니라 남자를 산 것이다.
상황은 전도되고, 세상 사람들은 점점 미쳐간다.
사실 여진이 첫 남자와 잠을 자는 대목이 나는 제일 불쾌했다.
1부에서 재영이 성매매를 하지만 구체적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여진의 시각에서 보여질 뿐이다. 따라서 청소년 섬매매에 대한 세속적 남자들의 시각도 설명된 바 없다.
지나가던 행인이 여진에게 수작 거는 대목에서 잠깐 소개되긴 하지만, 침대에 누워 여진의 손을 잡고 하는 중년 남자의 대사는 생생하다 못해 비린내가 난다. 너무 노골적으로 청소년 성 매매하는 심리를 얘기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이다.
“복이야 복. 나한테 이런 복덩어리가... 10년은 더 젊어진 것 같애. 도덕이고 지랄이고, 이런 게 행복 아냐?”
청소년 성매매, 더 나아가 아동 성도착 심리에는 젊음에 대한 동경, 영생에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데없이 10년은 더 젊어진 것 같다는 말은 그런 심리가 표출된 것이지만, <사마리아>가 그런 쪽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이렇게 불균질하고 거칠게 다양한 양상들이 혼재해 있는 것이 <사마리아>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말을 들은 여진은 “재영이 죽었어요. 저기 저 창문으로 뛰어내려서 머리가 빈 병처럼 깨졌어요.” 라고 말하고는 지갑에서 손을 꺼내 남자에게 준다. ‘내가 줘야지’하며 의아해하는 남자에게 “돌려주는 거예요. 이젠 필요 없어요.”라고 하고, 먼저 방을 나가면서 “고마웠어요 “라고 인사한다.
혼자된 남자는 갑자기 학원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외식을 하자고 다정한 아빠 흉내를 낸다.
흉내라고 얘기한 것은 남자의 이런 변화가 진실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1부에서 재영은 자신이 상대 남자를 구원하는 바수밀다라고 했고 지금 2부에서 여진이 재영 대신 바수밀다 역을 하고 있으므로, 그 덕분에 남자가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고 볼 수도 있다. 일차원적이고 피상적인, 조잡한 설정이다.
변화가 그렇게 쉽게 일어난다면 세상이 이렇게 험하고 살기가 힘들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이것은 거짓 변화, 허황된 판타지인 것이다.
그런 허황된 판타지를 그리는 영화라고 생각하던 나를 긴장시킨 것은 그다음 남자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이다.
처음 남자를 만난 후 여진은 수첩에서 그 사람의 기록을 지운다.
모든 이름이 지워질 때까지 여진은 계속 남자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재영에 대한 속죄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바로 다음 남자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고, 침대에 누운 여진이 이불속에서 속옷을 벗어 바닥에 던진다.
목욕을 마친 남자가 다가오더니 정성스럽게 여진의 옷을 개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여진은 미소 지으며 그걸 바라본다.
앞에서 시작된 전도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은, 성행위가 있을 때 남자는 침대에 있고 여자가 씻는다. 옷을 개거나 정리를 한다면 그것 역시 여자 몫이다.
그러나 지금은 역전된 상황이어서, 남자는 주고 여자는 받는다. 그리고 남자의 대사.
“고마워. 행복하게 해 줘서.”
여진도 ‘내가 고맙다’고 대답하고, 고맙다는 말을 다시 주고받고 나서 남자는 정말 엉뚱한 대사를 내뱉는다.
남자; 다 걱정 없이 잘 살아야지. 서로 이해하고, 상처 주지 말고.
여진; 돈 안 받을 게요. 지난번 돈도 돌려줄 게요. 그럼 이제 편해지죠?
남자: (여진에게 팔베개를 하며) 죽을 때까지 널 위해 기도할게.
기본적으로 예술은 세련됨의 영역이고, 예술가는 대체로 미식가에 가깝다. 있는 그대로의 생경한 원재료를 가공 없이 쓰지 않는다. “나는 택배기사가 아닙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건 내 일이 아니에요”라는 건 대부분 예술 창작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가 너무 드러나는 표현을 꺼리게 되고, 그런 유형의 작품들을 낮추어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진심’이라는 것이고, 그 ‘진심’이 작품 속에 시종일관 녹아있다고 보이면 경우가 다르다. 그 태도를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나름대로의 완결성을 갖는 예술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사마리아>가 나에게 예술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한 대목이 여기쯤이었던 것 같다.
‘너무 단세포적이다’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그 정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포함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남자의 대사 때문이다.
처음 옷을 개는 남자의 행동과 ‘고마워. 행복하게 해 줘서’라는 말 까지는 앞의 남자와 비슷한 상황이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설정의 표현. 그런데 그다음 대사 “다 걱정 없이 잘 살아야지. 서로 이해하고, 상처 주지 말고.”가 너무 뜬금없었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 보편적 발원을 말하고 있다. ‘아무리 막가는 스타일이지만 너무 심하게 나가는군!’ 하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 말을 받는 여진의 대사 또한 맥락에 안 맞는다. “돈 안 받을 게요. 지난번 돈도 돌려줄 게요. 그럼 이제 편해지죠? "
남자는 돈 얘기를 한 적이 없고 전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진은 남자가 돈거래(성매매) 때문에 불편해한다고 생각하고, 그 문제에서 벗어나면 행복해질 거라고 짐작한다. ‘청소년 성매매’라는 사실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의 대사 ‘죽을 때까지 널 위해 기도할게.’
자, 지금의 상황을 다시 돌이켜 보자. 현재 여고생과 중년의 남자가 성매매를 하고 있다. 남자는 서로 상처 주지 말고 다 잘살기를 기원하고, 여고생은 성매매를 무효화시켜서 남자의 죄를 사하여 준다.
그리고 남자는 평생을 상대, 즉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무시해 버리거나,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무시하기에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분명했다. 아무리 막돼먹은 사람이라도, 진심이 없이는 이렇게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다. 나는 ‘왜 이렇게 드러내 놓고 막 나가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남자는 여진이 계속 웃자 자신을 비웃는다고 화를 내다가 결국 감화된다. 이때는 이미 여진이 여러 명의 남자를 겪은 후인데, 남자보다는 여진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바수밀다가 되기를 꿈꿨던 재영이 항상 웃는 얼굴이었듯이, 여진은 남자의 구박에도 꿋꿋이 웃음을 유지하고 남자의 마음을 얻기에 성공한다. 그러나 성공한다는 것은 표면적인 흐름이고, 사실은 미쳐가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여진의 웃음은 매우 어색하고, 일정 부분 부족한 연기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쳐간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 연기는 더 이상 흠이 아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의 체계에 대해 말해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마리아>에는 두 개의 상징체계가 혼재한다. ‘성스러운 것- 세속적인 것’과 ‘판타지- 현실’의 짝이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도구로 ‘기적’과 ‘속죄’가 사용되고 있다. 다소간 오해의 소지를 무릅쓰고 구분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성스러운 것; 재영, 여진
세속적인 것; 영기(여진 아빠), 성 매매하는 남자들
판타지; 재영, 성 매매하는 남자들
현실; 여진, 영기
재영은 성스러운 것을 대변하는 판타지 속의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세속적인 규율이나 도덕에 관심이 없다. 그와 관계되는 사람들, 특히 여진의 상태만이 중요하다.
여진이 없으면 재영은 허깨비이다. 재영 스스로 “미안해. 네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해.”라고 말하는 것이 한 증거. 여진은 성스러운 것-재영-의 안받침이다.
성 매매하는 남자들 역시 판타지 속에 있다. 판타지 속에서 세속적인 것들을 대변한다.
그들에게 청소년 성매매는 성스러움 -이상, 혹은 현실 너머의 무엇-에 대한 갈망이지만 건강하지 못한 욕망일 뿐이어서 오히려 성스러운 것을 더럽히고 세속화시키고 파멸시킨다. 그들이 구체적 성행위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현실성보다 그들의 판타지를 더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진과 성관계를 맺은 후 남자들이 하는 행동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스러워졌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모텔방을 나서는 순간 세속화된 인물로 돌아갈 게 틀림없다.
현실 속의 성스러움을 대변하는 여진은 판타지나 기적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거기에는 구체적 현실성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진은 아빠가 해외토픽의 기적을 얘기해도 듣지 않고, 재영이 성매매 남자들의 구체적 모습에 관심을 보이면 짜증을 낸다.
그러나 재영이 죽자 여진은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속죄를 위해 자발적으로 판타지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 속에 언급되는 바수밀다나 테레사 수녀처럼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얼핏 문제가 없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여진은 아직 미성년이고 미완성이고, 따라서 미숙하고 훼손되기 쉽고 오염되기 쉽고 망가지기 쉽다. 여진은 재영을 모방할 뿐이고, 미쳐서 웃기만 할 뿐이고, 예상되는 것은 재영과 같은 종말, 파멸뿐이다.
여진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서 남자를 화나게 하지만 결국 남자를 감화시키는 데 성공한 장면 직후, 다시 말해 여진의 현실적 성스러움이 판타지 화한 직후 보여지는 것은 모텔 침대 위에 살해당해 누워있는 여진(처럼 보이는)의 모습이다.
미친 세계에서는 미친 -예상치 못한 비정상성. 기적을 포함하여- 일들이 늘상 일어난다.
이 장면 전환은 과감하고 충격적이고 신선하다. 이제까지 판타지가 지배하던 의미체계가 현실 쪽으로 급 반전되어 현실의 세속성을 대변하는 영기 쪽으로 시점이 넘어온다.
영화를 두 파트로 나눈다면, 여기를 기준점을 하여 앞부분을 ‘죄’ 뒷부분을 ‘벌’로 나눌 만하다. 이제는 현실을 무시한 사람들이 벌을 받을 시간이다.
처음 침대 위에 죽어있는 여자가 ‘여진 아닌가?’ 싶지만 현장조사 중인 영기가 보여지면서 다른 여자임이 밝혀진다.
이 장면 전환은 단순히 서프라이즈 효과만을 노린 게 아니다. ‘여진이 죽은 게 아니다’라는 생각은 ‘여진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고, 여진이 죽을만한 죄를 지었다는 심판을 함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앞으로 그에 준하는 벌이 따를 것임을 암시한다.
무슨 죄냐고? 성스러움을 오염시킨 죄, 그리고 현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죄... 현실세계의 형사인 영기는 ‘여진 아빠의 이름으로’ 죄지은 자들을 벌하기 시작한다.
전반부 ‘죄’의 파트가 다소간 허황되고 엉성한 전개가 많았던 반면, 후반부 ‘벌’의 파트는 제법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판타지가 사라지고 현실의 부분만 중점적으로 다루어진 때문이고, 현실의 세속적인 의미를 담당하는 영기를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모텔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진을 보게 된 영기는 즉시 모든 일상생활을 중지하고 여진에게 집중한다. 여진의 성매매 사실을 알고 영기가 맨 처음 하는 행동은 상대 남자를 응징하는 것이다.
남자의 차를 가로막고, 항의하는 남자에게 영기는 다짜고짜 얘기한다.
“우리 지금부터 거짓말하면 한 대씩 맞기로 합시다.”
기적의 시간은 현실을 뛰어넘어 존재하지만 판타지의 세계는 항상 현실에 굴복당한다.
판타지가 현실에 지지 않으려면 재영처럼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 남자는 굴복하여 성매매 사실을 고백하고, 영기는 계속해서 남자를 다그친다.]
“여자 나이가 몇 살입니까? 일초 이초...”
죄의식을 느낀 남자가 대답을 못 하자 영기는 사정없이 남자의 따귀를 때려댄다. 몇 번 반복하여 따귀를 때린 후 “꺼져 이 새끼야. 죽여 버리기 전에.”라고 하고는 남자를 보내는 영기. 남자는 다소곳이, 심판받은 죄인이 복종하듯이, 조용히 사라진다.
나는 사실 이 장면이 <사마리아> 영화 전체 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는데, 그건 영기가 남자의 따귀를 때리는 묘사의 생생함 때문이다.
오랜 기간 꽤 많은 영화를 보았고 나름 영화 전문가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렇게 실감 나는 구타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맞고 때리는 동작의 생생한 현실감과, 때리는 사람의 분노와 맞는 사람의 복잡한 심리를 절묘하게 그려낸 훌륭한 장면이다. 특히 때리고 맞을 때 ‘짝!’ 하고 울리던 그 소리는 지금 생각만 해도 내 마음에 찬바람이 분다.
여진의 성매매 사실을 알게 된 영기는 잠든 여진을 살펴본다. 불을 켜고, 곰곰 생각하며 여진의 몸을 살핀다. 성적인 궁금증이 아니다. 성스러운 것에 대한 의문이다.
‘이 성스러운 몸이 더럽혀질 수 있는가?’ ‘이 성스러운 몸을 감히 더럽힐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과, ‘이 아이의 성스러움이 더럽혀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영기를 괴롭힌다.
그래서 영기는 기적을 꿈꾼다. “아빠는 사는 게 불안해? 이빠는 기적을 믿어?”라고 묻는 여진에게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어.”라고 영기는 말한다.
“너무나 끔찍하고 처참한 지구의 종말”에 대한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 예언을 얘기한 직후지만, 영기에게는 지금이 너무나 끔찍하고 처참한 지구의 종말이다. 기적 밖에는 구원의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현실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
영기는 일단 여진의 성매매를 중지시키기 위해 남자를 차단한다. 술병을 깨 들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정중한 부탁을 한다.
남자의 휴대폰으로 들리는 여진의 목소리에 영기가 흐느껴 울자, 그 소리를 남자의 목소리인 줄로 오해한 여진은 “빨리 와요. 제가 위로해 줄게요.”라고 하여 영기를 통곡하게 만든다.
이 미친, 철없는 아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문제는 미친 아이가 아니다. 아이를 미치게 한 미친 세상이 문제인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지만, 그 친구 역시 어린 청소년 여학생들을 희롱하여 소란을 일으킨다.
화난 영기가 친구를 때리자 친구는 놀란 얼굴로 “너, 이 새끼. 왜 나 때렸어? 왜 이래?”라고 묻는다. ‘너 미쳤냐’ 하는 물음이지만 영기는 울음이 난다. 친구까지 이런다는 것은 청소년 성매매가, 여진을 미치게 한 원인이 멀리 떨어진 데 있지 않다는 얘기다. 내 친구, 어쩌면 나도 포함하는 이 세상 전부가 이미 미쳐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영기는 그 세상의 본모습 속으로 들어가 본다.
여진을 성 매매하려던 남자의 차 유리창을 박살내고, 남자를 따라 집까지 쫓아간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깍듯이 사과를 하지만 영기는 그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무례하게 쳐들어간 남자의 집 안.
남자의 가정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중산층의 모습이다.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서민의 집안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에서 중년의 부부와 고등학생 딸, 중학생 아들, 그리고 건강한 할머니까지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다.
난데없는 침입자의 등장에 놀라는 가족들.
영기는 남자의 딸에게 나이를 물어보고는 “해도 너무하지 않아?” 하며 여러 차례 남자의 뺨을 때린다. 남자는 다소곳이 맞고만 있고, 놀란 가족들이 말로 대들지만 영기는 멈출 생각이 없다.
“더러운 새끼.” 하면서 차마 글로 옮기기에도 민망한 욕설로 남자를 비난하고 “너 같은 놈 때문에 세상이 미쳐가는 거야.”라는 말을 끝으로 집을 나간다.
이 장면들은 겉으로는 멀쩡한 우리 사회가 사실은 그 이면에서 미쳐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화목한 가정으로 보이는 그 밑바닥에서는 허황된 판타지와 지저분한 세속적 욕망이 세상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 점이 이 영화 <사마리아>의 가장 큰 약점이다. 지나치게 편협한 관점을 당위로 놓고, 그 당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나 변화 가능성을 두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보수적 관점에 서 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영기의 변화이다. 나름대로 현실적 시각을 가지고 사태를 수습하려 하던 영기가 점점 이성을 잃고 미쳐가고 있다! 자신의 현재적 필요성 때문에 남의 가정에 무단 침입해서 가정의 평화를 박살내고, 결국은 가장이 자살하는 상황을 유인함으로써 평범한 한 가정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딸 여진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적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아직은 현실이 무너지고 있는 시간이고, 더 큰 파국이 와야 할 시간이다.
파국은 빠르게 오고 간명하게 처리된다. 영화의 초점이 현실의 지옥도에 있지 않고, 그 이후의 구원에 있기 때문이다.
영기는 성매매 남성의 차를 쫓아가다가 앞을 가로막는 차에 발작적인 행패를 부린다. 이 장면은 군더더기 없이 하나의 커트로 잘 처리되어 있다.
겨우 남자의 차를 찾기는 했으나 이미 여진과 남자의 성관계는 끝난 다음이다. 이성을 잃은 영기는 화장실로 남자를 뒤쫓아가서 오줌 세례를 퍼붓고 구타하는데, 그것으로 부족해서 보도블록으로 남자를 때려죽여 버린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나오는 영기 옆으로 보이는 화장실 입구의 구호 ‘당신의 미소는 보는 이의 행복입니다’. 그 구호처럼, <사마리아>가 얘기하는 현실은 허망하고 무력하고 무의미하다.
정말 현실 속의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기적밖에 없는 것일까?
영기의 자기 파멸적 노력으로 딸 여진 -현실의 성스러움-이 훼손되는 것은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남자의 피살을 확인한 여진은 현장을 떠나며 수첩을 버린다. 수첩 속에는 재영의 과거 남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수첩 속 남자들의 명단을 모두 지운 것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는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여진이 재영의 유령에 시달리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허황된 판타지에 무너지는 것은 막았지만, 그렇다고 이미 훼손된 현실까지 복원되지는 않는다. 아빠 영기는 그것이 슬프다. 너무 슬프고 가슴 아파서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 아래에서 흐느껴 운다. 미안하다 딸아, 정말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3부 ‘소나타’가 시작된다. 물론 ‘소나타’는 영기의 자동차가 현대자동차의 소나타인 것에서 인용되었다고 보이나, 그에 덧붙여 ‘독주’를 뜻하는 음악적 의미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에 이어지는 ‘속죄’의 과정은 홀로, 스스로, 각자의 책임 하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소제목 ‘바수밀다’나 ‘사마리아’가 과거의 것인데 반해, 자동차 이름인 ‘소나타’가 구체적인 현실의 물건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다. 지금은 판타지가 제거된 현실 그 자체를 봐야 할 시간인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의식절차가 필요하다. 그 의식의 하나로 영기는 여진을 데리고 여진 엄마의 산소에 간다.
한밤중이지만 그에게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출발하면 이내 깊은 터널에 들어서고, 그 터널을 지나니 새벽이 나온다.
모처럼 한가하게 손잡고 산을 오르는 영기와 여진. 산소에 나란히 앉아 김밥을 먹다가 영기는 토해버리고 만다. 괜찮은 척하지만 현실이 복원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여진의 죄를 용서하는 것에 대해 죽은 아내의 동의를 원했으나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영기에게 죽은 아내의 존재는 중요하다. 영화에서 영기는 여진을 보살피고 음식을 준비하는 등 엄마의 역할도 대신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는 혼자 모든 역할을 맡아하면서도, 영기는 엄마의 제사를 언급하며 여진에게 엄마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실재하지는 않지만 판타지로 존재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엄마는 영화에서 언급되는 바수밀다나 성모 마리아, 테레사 수녀 등과 동일한 판타지 선상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런 엄마의 산소 앞에서 음식을 먹는 등의 일상적 행위가 실패했다는 것은 죄가 용서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직 바라는 기적이 일어날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영기가 원하는 구원의 길은 허락되지 않았고, 산을 내려오던 영기의 차 소나타는 자갈 구덩이에 빠져 버렸다.
잠시 자갈을 치우려고 시도하던 영기는 금세 포기하고 자동차로 들어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전 같으면 이렇게 쉽게 포기할 영기가 아니지만 지금은 다르다. 희망이 없는 현실은 쉽게 현재의 삶을 포기한다.
아빠에게서 이상한 기색을 느낀 여진이 차에서 내려 바퀴를 살펴보지만 별 관심이 없다. 차 앞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는 여진. 산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여진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듯 영기 쪽을 바라보는데, 영기는 잠을 청하는지 눈을 감고 있다.
‘아빠, 비구름이 몰려와. 빨리 내려가자.’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퀴를 본 여진이 하나 둘 자갈을 꺼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여진의 얼굴은 땀투성이가 되고, 그 결과 바퀴는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내적 의미상 굉장히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는데, 여진이 비로소 현실 속의 구체적 인물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진은 땀을 흘리는 구체적 노동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현실 속의 성스러움’을 담보하는 상징계의 인물이었지 실제 생활과는 상관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여진이 실제적인 노동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성스러운 것’이 ‘세속적인 것’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중요한 시간이 만들어졌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기적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여진과 영기는 산을 내려와 민박집에서 고구마를 먹는 중이다. 익히 보아왔던 대로 하면 영기가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 가만히 있는 여진에게 먹으라고 주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두 사람이 각자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여진이 먼저 손을 내밀어 영기의 입에 넣어준다.
이제 막 과거의 현실이 미래의 현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기적이 아닌가?
하지만 영기는 이 기적을 믿지 않는다. 미래의 현실이 상처를 딛고 건강한 현재를 살아가려고 하는데도 과거의 현실은 여전히 지난 과오에 집착하고 있다.
젊은이는 앞을 보고 가려하는데, 왜 나이 든 아빠는 자꾸 뒤를 돌아보는 걸까?
여진은 그게 슬프다.
잠자리에 누운 여진에게 영기는 테레사 수녀 이야기를 한다. 늘 하던 해외토픽의 기적 이야기지만 어떤 때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그동안 기적 이야기는 여진에게 그냥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자신이 성스러움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여진의 성스러움은 훼손되었고 세속적 현실의 세계로 떨어져 있다.
세속의 자리에서 들으면 기적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그럴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어렵다.
이제 현실 속으로 들어온 여진은 그걸 안다.
기적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슬퍼할 생각은 없다.
지금 여진이 슬픈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더럽혀짐 때문이 아니다. 자신을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는 아빠가, 훼손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줄 기적을 꿈꾸는 아빠의 소망이 여진을 슬프게 한다.
지금 이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줄 수 없는 아빠의 마음이 슬프고, 그래서 여진은 한밤중에 집 마당으로 나가 소리 죽여 운다.
잠을 깬 영기가 창문 너머에서 울고 있는 여진을 묵묵히 바라본다.
여진의 울음을 영기는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참회의 눈물이고 죄 씻김의 시간이 되고 있다고 생각할까? 여진에게 들려준 테레사 수녀의 기적처럼, 여진에게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아빠와 딸의 밤은 지나가고 새벽이 온다. 이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시간이다.
자, 이제 이 영화 <사마리아>의 라스트 씬에 대해서 말할 시간이 왔다.
민박에서 하룻밤을 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기는 차를 어느 작은 개울가에, 정확히는 개울가 물 위에 차를 세운다.
여기서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의 시간은 영화 <사마리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고, 내가 본 모든 영화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아름답고 시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이 말을,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수 있어서 나는 아주 즐겁고 행복하다.
마지막 장면을 말하기 전에, 바로 앞의 장면에 대해 말해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민박집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영기는 담배를 사기 위해 한적한 가게 앞에 차를 세운다. 영기가 담배를 사는 동안 여진은 자동차의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그걸 본 영기가 ‘운전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권한다.
여진은 “싫어. 무서워.” 하며 거절하고, 영기는 “바보.”라고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얼핏 보면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이미 영기와 여진 사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 기적처럼 화해가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여진이 핸들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운전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여진은 지금 아빠의 노동이 안쓰러운 것이다. 힘든 아빠의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공감하고, 그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여진은 완전히 현실 속의 인물이 되어 있다. 지난밤의 통곡을 겪으며 판타지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것이다.
영기는 여진이 운전을 하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무섭다’고 하자 “바보”라고 웃으며 말한다.
이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이다. 정상적인 아빠와 딸 사이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영기와 여진은 이제껏 한 번도 정상적인 보통 부녀 사이였던 적이 없었고, 그게 지금 보여지는 상황의 놀라운 점이다.
영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여진에게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 학교에서 시험 보는 날 ‘시험 보기 싫다’면서 일어나지 않아도 비난하는 법이 없으며, 심지어는 성매매를 하러 여러 남자를 만나러 다녀도 그것에 대해 여진에게 어떤 눈치도 보인 적이 없다.
그런 영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바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변화다. 영기의 마음에서 이제 비로소 부담 없는 보통 딸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난밤 여진의 통곡을 보면서 뭔가 내적 변화가 일어난 게 틀림없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시작되면 개울이 보이고, 흐르는 물속으로 자동차가 천천히 들어온다.
물속에 자동차를 세우는 영기. 여진은 영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영기도 잠을 청하듯 눈을 감는다.
나는 사실, 처음 자동차가 물속으로 들어갈 때 두 사람이 동반자살을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사마리아>에서 물의 이미지는 ‘속죄’를 뜻하고 있었으므로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완벽한 속죄의식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 비가 내려서 자동차가 물에 잠기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영기가 눈을 뜨더니 자동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첨벙! 과장되어 들리는 물소리.
물 밖으로 나간 영기는 동료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자신의 위치를 알려준다.
커트가 바뀌면 잠에서 깨어나는 여진을 보여주는데, 푸른색으로 필터링 처리를 함으로써 환상 혹은 꿈 장면임을 노골적으로 알려준다.
나는 이 장면의 시작, 물속으로 자동차가 들어오는 쇼트에서 이미 환상 장면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착오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인 혼란을 유도했다고 본다.
여진이 차에서 나와 ‘아빠’를 부르며 찾아다니고, 여진의 뒤에 불쑥 나타난 영기는 여진을 목 졸라 살해한다.
숨진 여진을 자갈 모래밭에 묻고 마지막 의식으로 노래를 틀어준다. 학교 다닐 때 여진을 깨우는 의식으로 노래를 들려주던 그대로, 마지막으로 여진을 재우며 역시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다.
다시 잠에서 깨어나는 여진. 이번에는 필터링되지 않은 정상 색조의 화면이다.
악몽에서 깬 듯 밖으로 나오면 영기가 여진에게 자동차 운전 연습을 시키기 위해 자갈에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그리고 보여지는 운전 교습 장면. 여진이 어느 정도 운전을 익히자 영기는 ‘이제부턴 너 혼자서 가는 거야. 아빠는 안 따라가.’라고 말한다.
멀리서 동료 형사들의 차가 다가오고, 여진은 운전 배우기에 몰두해 있다. 그런 여진을 두고 동료 형사들과 함께 떠나가는 영기.
이제 아빠 영기의 시간은 끝이 났다. 이제부터는 딸 여진의 시간이 시작된다. 과거는 치유되었고, 새로운 현실이 열리는 중이다.
이것은 참 이상한, 김기덕의 영화 세계에서 이례적인 순간이다.
대체로 김기덕의 세계는 상처로 얼룩지고 감정은 뒤틀리고 증오로 펄떡이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한다. 구원을 원하지만, 구원이 오기에는 험한 현실의 벽이 너무 두껍다. 잠깐 영화 평론가 허문영의 얘기를 인용해 보자.
<악어>는 리얼리즘(현실)과 판타지(상상)가 부정 교합한 영화다. 또한 멜로드라마와 구원의 서사가 부정 교합한 영화다. - 허문영. <세속적 영화와 세속적 비평> p,199
이건 김기덕의 데뷔작 <악어>에 대한 언급이지만 <사마리아>에도 똑같이 해당하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악어>가 1996년 작품이고 <사마리아>가 2004년 작품이니까 발전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언급이 김기덕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서로 다른 것들의 부정교합이 빚어내는 그로테스크한 세계, 그것이 김기덕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영화 속에서 환상, 혹은 꿈으로 처리된 부분이 사실은 김기덕의 맺음말에 더 잘 어울린다. 영기가 여진을 죽여 개울가에 묻고 살아있을 때 했던 것처럼 노래를 들려주면서 끝내는 것이 훨씬 김기덕다운 엔딩 아닌가?
그렇게 보면 <사마리아>는 가능한 두 개의 엔딩을 같이 붙여놓은 셈이다.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김기 덕적인 엔딩과, 새로운 출발로 마무리되는 새로운 김기덕의 엔딩.
사실상 이야기 전개만 보았을 때는 단순한 상황이다.
앞의 담배가게 장면에서 영기와 여진 사이의 심리적 화해가 이루어졌음이 보인다고 얘기했으므로, 다음의 줄거리는 명약관화하다. 오는 길에 영기는 적당한 공터를 발견했고, 여진에게 자동차 운전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진에게 새로운 출발이므로, 자신도 죗값을 치르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고 행각하고 동료 형사에게 자수를 한다...
이 줄거리만 보면 죽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런데도 굳이 영기가 여진을 죽이는 장면이 들어가게 된 것은 왜일까? 필요했을까, 필요치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영화의 후반부를 계속 지배해온 정서는 영기의 분노다. 훼손된 성스러움에 대한 분노가 영화를 이끌어왔고, 여진의 통곡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치유되기는 했지만 확실한 모멘텀이 보여진 적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제의처럼, 환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영기의 분노를 정화시켜줄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환상 속의 의식을 통해, 여진의 죄는 씻김을 받고 영기는 분노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빠가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고 나서 “이제부턴 너 혼자서 가는 거야. 아빠는 안 따라가.”라고 말하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는가?
딸을 보호하기 위해 만사를 팽개치고 심지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던 아빠가 이제 모든 보호막을 거둬들인다.
이제 더 이상의 번민과 갈등은 없다. 지금부터 여진의 인생은 여진의 것이다. 어떤 고난과 좌절의 시간이 와도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
물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울 일도 있을 것이고,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아빠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딸의, 새로운 세대의 시간이다.
나는 이 순간이 영화감독 김기덕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어떤 특정한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인류 역사도 상승과 하강의 사이클이 있고 각각의 개인들도 나름의 부침을 겪게 마련이지만, 특히 예술가들은 왕성한 창의력과 번뜩이는 영감으로 자신의 시기를 꽃피우는 그런 시기가 있다. 나무가 봄을 지나 여름에 이르러 힘차게 가지를 뻗고 무수한 잎을 만들어내듯이, 놀라운 활기로 자신의 세계를 내보이는 황금의 시기.
나는 김기덕의 가장 좋은 시기가 <수취인 불명>(2001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년), <사마리아>(2004년), <빈 집>(2004년) 등의 작품을 만들어내던 시기라고 본다. 전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회화적 아름다움으로 인생의 깊이를 탐색하던 끝에 다음 작품 <사마리아>에서 드디어 그 싹을 틔운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감동스러운 마지막 장면을 절정으로 해서 다음 작품 <빈 집>이 그의 작품 중 가장 완성도는 높지만 완벽하게 공허한 영화로 탄생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사마리아>의 이 마지막 장면은 화해와 조화와 성숙을 보여주는, 김기덕의 영화 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희귀한 순간이다. 늘 흐리고 궂은 날인 그의 세상에서 잠깐 파랗게 하늘이 열리고 눈부신 햇빛이 내리쬐는 축복의 순간. 그 찰나.
영기가 동료 형사들에게 연행되고, 여진은 서툰 운전으로 비틀거리며 뒤를 쫓아간다. 그러나 마주오는 차를 피하려다가 수렁에 박히고, 여진은 차에서 내려 어쩔 줄 모른다. 아빠는 사라졌고, 딸 여진은 혼자 낯선 곳에 팽개쳐져 있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이것은 해피 엔딩인가? 아니면 새드 엔딩인가?
자동차의 엑셀을 최대한 밟아보지만 요란한 소리와 뒷바퀴에서 뿜어내는 하얀 물보라뿐이다. 그 위에 더해지는 느리고 슬픈 멜로디의 음악.
분명히 해피한 상황은 아닌데, 왜 나에게는 이 장면이 그렇게 아름답고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것으로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영화에서 놀랍도록 훌륭한 카 체이스 장면을 많이 보았지만, 여기 <사마리아>의 마지막 장면보다 더 가슴 뭉클한 카 체이스 장면을 나는 알지 못한다.
영화란, 모름지기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화려한 수사와 엄청난 기술이 감동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아무리 작고 서툴고 초라해 보여도, 그게 우리 마음의 종을 울려서 감동을 주는 순간 그것은 빛나는 황금이 된다.
이 사소하고 단순한 자동차 추격 장면이 어떻게 내 마음을 움직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건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마술이니까. 예술가는 단순한 고철덩어리를 금으로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니까.
그렇게 영화는 지루하고 괴로운 삶의 시간을 가슴 뭉클한 감동의 시간으로 바꾸어놓는다. 말하자면 기적의 체험이다. 영화 <사마리아>가 그렇게 바라던 기적의 시간이 지금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게 예술이고, 이게 영화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김기덕 같은 유형의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김기덕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으며 여기저기 대중매체를 통해 보았을 뿐이다. 거칠고 마구잡이이고 자기중심적인 스타일. 낯설고 불편하다.
그런 이유로 <사마리아>를 이야기하는 것이 망설여졌던 게 사실이다. 논란이 많은 소재이고, 완성도도 높지 않다. 차라리 <빈 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한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빈 집>은 나름대로 완성도도 높은 편이고, 그 주제의식은 또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 <사마리아>는 진짜고, <빈 집>은 가짜다.
나도 영화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므로 <사마리아>를 리메이크하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완성도를 높여서 제대로 만들면 걸작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러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포기했다. <사마리아>의 부족한 시나리오를 보완하고 어색한 연기를 살려내고 밋밋한 촬영에 멋진 리듬감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의 무엇, 소위 ‘아우라’라고 부르는 그 예술품의 정수는 복제될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리메이크 작품이 겉보기에 그럴듯한 빈 집이 될 뿐, 진짜 영혼을 담지 못하는 것이다.
김기덕은 대표적인 저예산 영화감독이다. 적은 제작비로 빠르게 찍는다. 이 작품 <사마리아> 역시 11일 만에 찍었다고 한다.
100일 동안 정성껏 많은 돈을 들여 찍은 보기 좋은 가짜들보다, 때로는 눈살 찌푸려지고 듣기 불편하고 내용도 허술한 11일짜리 진짜배기 영화를 나는 지지한다.
<사마리아>에는 불필요한 쇼트가 거의 없다. 선택에 의한 완벽함이라기보다 열악한 환경에 따른 불가피함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여유 있게 다양한 쇼트를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최소한의 꼭 필요한 쇼트만 남았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분명한 NG쇼트도 그대로 영화 속에 들어가 있다.
길거리 장면에서 영화 촬영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마리아>는 54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는데, 감독이 ‘NG 장면이 있는데도 상을 준단 말이야?’ 하고 놀랐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절박함이 오히려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결핍의 느낌. 갈구하는, 구원과 기적을 염원하는 간절함이 영화의 쇼트들 사이에 배어있다.
영화 전체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주 이질적인 쇼트가 하나 있다.
필요치 않은 쇼트. 그건 바로 시골 노인이 멀어지는 영기의 차를 바라보는 쇼트이다.
영기와 여진이 시골의 민박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나온다. 노인은 빗자루질을 하고 있고, 영기는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오른다. 노인은 중요한 인물이 아니므로 자동차가 그곳을 떠나면 그걸로 끝이다. 더 보여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롱 쇼트로 떠나가는 영기의 차를 보여준 다음 다시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빗자루질을 멈추고 물끄러미 자동차를 바라보는 노인의 미디엄 쇼트와 그 시야로 본 자동차.
분명히 이 두 쇼트는 없는 게 정상이다. 영화는 한 번도 상황과 상관없이 제3자의 시선으로 진행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의 단독 쇼트를 보여주고, 그의 시선으로 멀어지는 자동차를 보여주는 걸까? 왜 감독은 굳이 노인의 모습을 넣으려고 했던 것일까?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감독이지만, 일단 영화가 완성되어 관객에게 보여지면 그때부터는 영화는 감독을 떠난다.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몫이 된다.
그러므로, 감독이 무슨 이유로 노인의 모습을 넣었던지 간에 우리는 상관할 필요가 없다. 그게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주었는가만 생각하면 된다.
처음에는 ‘없어도 되는 쇼트를 넣었군!’ 하고 간단히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없어야 하는 쇼트’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흐름을 깨는, 흔히 말하는 ‘튀는’ 쇼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만든 당사자는 그게 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결과를 보고 인정할 수는 있어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흔히 이런 걸 ‘실전 심리’라고 말한다.
나는 종합격투기인 UFC 보기를 좋아하는데, 경기의 KO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면 희한한 경우가 많이 나온다. 때리는 상대의 펀치 방향으로 맞는 사람이 머리를 갖다 대는 것이다. 피하다가 맞는 게 아니라 미리 맞을 자리로 가는 것 같다.
나중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해봐야 소용없다. 그 당시 실전 심리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KO패가 된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왜 주먹이 오는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 왜 민박집 노인이 바라보는 쇼트를 넣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건 사실 무의식의 영역이다. 결과를 보고 따지는 수밖에 없다. KO를 당하려고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의 쇼트가 들어간 결과는 무엇일까?
그 쇼트가 없다고 보면 그냥 평범한 진행이다. 영기와 여진이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인사하고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큰길에 들어서는 영기의 차. 자연스럽다.
노인의 쇼트를 넣어보자.
출발한 자동차가 롱 쇼트로 보이고, 이어 빗자루질을 하던 노인이 동작을 멈추고 쳐다본다. 그리고 작은 배 너머로 멀어지는 영기의 차.
여기 배의 이미지는 속죄의 상징이므로 그게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냥 이 쇼트만 넣으면 된다. 노인의 쇼트까지 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노인은 누구인가?
처음 노인이 보이는 것은 영기의 차가 산을 내려올 때 삽으로 길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머물 곳을 찾는 영기에게 집을 제공해 주고, 모녀가 함께 다정한 시간을 갖도록 고구마를 갖다주며, 다음날 새벽 영기와 여진이 떠날 길을 쓸던 사람이 노인이다.
그날 밤은 영기와 여진에게 중요한 시간이었다. 화해와 속죄가 있었던 시간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제공한 것이 바로 노인이다. 영기와 여진에게 길을 열어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정성껏 배웅까지 해 준 사람이 노인인 것이다.
혹시, 그럴 리는 없지만, 이 노인이 파티마 성모 마리아의 재현은 아니었을까? 전날 밤 영기가 말하던 테레사 수녀의 재현은 아니었을까? 영기와 여진에게 화해와 속죄의 시간을 주기 위한 기적의 사람은 아니었을까?
이 모든 가정이 틀렸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떠나가는 영기와 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게 노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노인인 무심한 사람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 남에게 잘하지만 집착하지 않는다. 물어보면 대답하고, 그냥 자신이 할 일을 한다. 그런데 그런 노인이 빗자루질을 멈추고(이례적인 일이다!) 멀어지는 자동차를 쳐다본다. 약간 걱정스러워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이런 시선,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 남을 걱정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시선, 그 기도의 마음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노인이 필요했던 이유이다. 노인의 쇼트가 ‘실전 심리’에 의해서 무의식의 명령으로 들어갔다고 했지만, 나는 여기 노인의 모습에서 감독 김기덕의 본심을 본다.
김기덕의 영화는 부도덕하고 지저분하고 불쾌하고 허황되고 조잡하고 허술하다. 가끔 번뜩이는 진실의 시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체로 상투적인 자기 과시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바람직하냐 아니냐를 떠나, 나는 그것이 인간 김기덕의 발버둥이라고 본다. 좋게 얘기하면 진실에의 탐구이고, 보통은 ‘자뻑’이다. 청소년 성매매를 하면서 “도덕이구 지랄이구, 이런 게 행복 아냐?”라고 말하는 영화 속 인물의 대사는 김기덕식 인물들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위악이 아니라, 그런 체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게 현실이고 어쩌면 실제 그런 식으로 살지도 모른다.
그 뒤틀린 현실의식 너머에는 어떤 바람이 있다. 막연한 구원이나 기적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리고 그런 동경이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영화 <사마리아> 속의 노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인은 김기덕의 이상이다. 김기덕의 희망이다. 김기덕의 꿈이고 되고 싶은 무엇이다.
전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실제로 김기덕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 갈구가, 그 불완전한 고행이 <사마리아>에서 불쑥 완전한 모습으로 나왔다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지 않는다. 끝까지 우리를 ‘지켜본다.’ 그 ‘지켜봄’은 영화의 마지막 쇼트까지 계속된다.
여진이 영기를 따라가다가 실패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멀리 하늘 위에서 누군가 지켜본다. 분명히 비극적인 위기의 상황인데도 마음이 놓이는 것은 그 시선, 그 ‘지켜봄’ 때문이다.
나는 감독 김기덕이 <사마리아> 이후 이런 순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그런 영화적 순간을 바라는 게 아니다. 영화야 사실 별 거 아니다. 영화가 없다고 우리 삶이 나빠질 것도 없다.
나는 김기덕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기를, 구원받기를 바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사마리아>의 고행을 통해 어떤 화해의 순간에 도달한 것처럼, 그의 삶이 실제로 화해의 기적을 체험하기를 기도한다.
노인이 영기와 여진의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것처럼, 나와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의 삶을 지켜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