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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an 15. 2019

딸에게쓰는편지30-스페인 여행①넌이름이 뭐니?


사랑하는 딸!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집은 익숙하고 안락한, 그래서 걱정이나 긴장이 필요 없는 편안한 공간이라는 뜻이겠지. 여행 역시 집을 떠나는 것이고 고생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해봐야 하는' 고생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말하지만, 여행이야 말로 사서 하는 고생 아닌가? 그만큼 가치가 있고 또 얻는 것도 많다.


여행은 집을 떠나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나를 떠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나의 틀을 벗어나 낯선 질서에 적응하는 시간인 것이다. 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일(직업)을 들 수 있는데, 일과 여행의 다른 점은 일이 나의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여행은 나의 질서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세상, 내가 모르던 세상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이것,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제 너도 성인이 되었으므로 아빠도 네게 숨김없이 아빠의 생각을 얘기해 볼게. 혹시 아빠의 생각이 낯설게 느껴져도 '아! 아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넘어가면 돼.


얘기를 짧게 끝내기 위해서 결론부터 말하자. 아빠는 '나와 세상이 다르지 않다.' 혹은 '나와 세상은 하나다'라는 말을 믿는다. 다시 말해 세상은 나의 확장된 표현이고, 내 안에 세상의 모든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거지. 흔히 말하는 '물아일체'라는 게 그런 뜻이지.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나와 세상이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지. '자아' '아상' '집착' '에고' 그런 것들이 나를 '몸'이라는 틀 안에 구속시키고, 세상과 나를 분리하도록 착각을 유도해. 세상에 내 것이 없는데도, 우리는 내가 느끼고 만지고 손에 쥐는 것들만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불교에서 안거를 끝낸 스님들이 '만행'이라는 것을 한다는데, 안거를 통해 얼마나 '나'를 내려놓았는지 시험을 하는 시간이라고 해. 아빠식으로 말하면 '얼마나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시간인 거지.


여행도 그런 시간이라고 봐. 여행이 중요한 것은 멋지고 새로운 뭔가를 봐서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잊고 있던 '내 세상 밖의 나'를 경험하기 때문이야. 물리적 시간적 한계 때문에 경험할 수 없었던 '또 다른 내 세상'을 체험하는 기회인 거지. 네가 좋아하는 판타지의 세계도 마찬가지. 우리가 실제로 체험할 수 없는 가상세계 역시 '내 세상'의 일부분이니까. 과거와 현재 미래, 물질계 아스트랄계 멘탈계, 그 밖에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나'이고 '내 세계'이니까. 예술이 우리가 실제로 체험할 수 없는 우리의 세계를 경험하는 방법이라면, 여행은 그 세계를 실제로 체험하는 시간이 되는 셈이지.


그렇게 떠난 스페인 여행. 아빠는 과연 얼마나 세상과 하나가 되었을까? 

당연히 시작부터 고생길이야. 고생이란 세상과 내가 얼마나 유리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 고생이 심할수록 그 격차가 심하다는 뜻이고, 그 고생이 가치 있는 것은 그 고생만큼 나와 세상의 이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지.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친구와 동료가 갈등을 통해 가까워지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행을 자주 하지 못하므로, 당연히 공항의 출국 절차부터 문제가 발생했어. 당연히 항공사 직원이 있는 줄 알았는데, 비행기 티켓을 발권하는 과정이 무인 자동화되어 있는 거야. 우리는(엄마, 아빠, 큰 이모, 막내 이모 부부) 개별여행이었고, 여행사 도움 없이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어. 그럴 때면 '너를 데리고 올걸' 하고 후회하곤 하지.

다행히 '어르신! 아무 걱정 마세요! 다 제가 해 처리해 드릴게요.' 하는 시원시원한 공항 직원 덕분에 출국을 별 탈 없이 할 수 있었어.


문제는 경유지인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발생했지. 우리의 목적지는 스페인 마드리드였지만, 네덜란드 항공을 탔던 관계로 잠깐 동안 암스테르담 공항을 경유하는 코스였어. 그래서 그곳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게 되었지. '어르신 여행'이니만큼 막내가 주문을 받는 건 당연한 일, 막내 이모가 커피를 시키러 갔어. 간단한 일이니까 무슨 일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 못했지.

그런데 뭔가 이상해. 카운터의 직원이 'your name...' 어쩌고 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자기 명찰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당황한 막내 이모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급히 큰 이모가 달려갔지. 큰 이모는 영어 전문가이고, 이번 여행의 공식 통역사.

큰 이모의 개입으로 문제는 해결되었고, 우리는 자세한 경위를 알게 되었어. 주문을 받은 종업원은 당연한 과정의 하나로 '이름이 뭐냐'라고 물었는데, 우리는 커피 주문하면서 이름을 댄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막내 이모가 당황하기 시작한 거야. 이모가 이름을 대지 않자 종업원은 좀 더 크게 '이름이 뭐냐고?'라고 물었고, 막내 이모는 내가 뭘 잘못했나?라고 생각을 했겠지? 그러자 종업원은 자기 명찰을 보여주며, '내 이름은 이거야. 네 이름이 뭐냐니까?' 하고 또박또박 다시 물었고, 그걸 보고 큰 이모가 달려가게 된 거지.

상황은 아주 단순했어. 네덜란드에서는, 적어도 네덜란드 공항의 스타벅스에서는 주문을 받으면 주문자의 컵에 이름을 적게 되어 있었던 거야. 우리나라에서 번호표를 주듯이, 거기에서는 이름으로 주문자를 확인하는 거지. 아주 사소한 차이이고 아무것도 아닌 차이지만, 그 차이를 모르고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함을 실감한 거지. 너도 나중에 유럽여행을 하다가 네덜란드 공항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거든, 그래서 '넌 이름이 뭐니?'라고 카운터가 묻거든 당황하지 말고 네 식대로 대답을 하기를. '이름은 왜 물어?'라든가 '송혜교'라든가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했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피카소의 조국, 플라멩코와 투우, 그리고 건축가 가우디와 축구천재 메시의 나라... 아빠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

하지만 모르면 어때? 여행은 체험이고, 내가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는 게 중요하니까!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스페인 여행을 시작해 보자!


    ---새로운 세상에 오니 네 생각을 할 겨를도 없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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