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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an 17.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31-스페인 여행②

예술작품은 살아있다!


사랑하는 딸!

사실 이번 스페인 여행은 특별한 일이 없을, 뻔한 여행이야. 일주일간의 짧은 일정이고, 마드리드에서는 미술관을 보고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는 것으로 정해진 것이니까.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본다면 기대감에 설렐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 책을 통해 보았던 것이니까 새삼 설렐 것도 없는 거지.

마드리드에서 정해진 날은 이틀, 하루는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과 소피아 미술관을 보고 다음날은 하루 종일 프라도 미술관을 보고 다음날 바르셀로나로 이동하는 거야.


아빠가 그 일정에 불만이 있느냐고? 전혀 없지!

따로 찾아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음악, 미술, 기타 모든 예술분야를 좋아해. 일부러 찾아보지는 못하지만 기회만 된다면 보고 싶어. 그런데 이렇게 집중적으로 볼 기회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아?

물론 큰 기대는 없었어. 보고 싶었던 작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슬쩍 책으로 살펴본 바로도 크게 흥미를 당기는 작품이 없었거든. 다시 말해서, 작품 감상보다는 엄마와 함께 미술관을 간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시작된 첫 일정.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티센 미술관으로 갔어. 내일 볼 프라도 미술관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름 알찬 컬렉션으로 알려진 미술관이야. 짧은 오후 시간에 소피아 미술관(그곳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있지!)도 보아야 하므로 우리는 부랴부랴 1층 전시실로 들어갔어.


그렇게 습관적으로 작품을 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엄마가 오더니 여기는 3층(여기 식으로 하면 2층)부터 봐야 한다는 거야. 3층에는 13,4세기부터 17세기경까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17,8세기 영국 프랑스 회화와 19세기의 유럽 낭만주의 작품이, 그리고 1층에는 미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부터 현대의 팝아트까지 근현대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계단을 올라간 3층. 입구에 들어선 아빠는 전시된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어. 이름도 모르는 작가의 처음 보는 작품들이었는데 아빠는 그만 감동을, 정말 의외의 감동을 받아버리고 말았어.

그 몇 점의 그림들은 나란히 전시된 14세기경의 성화였어. 성화는 대체로 성경을 토대로 한 그림인데, 책을 통해 그것들을 보면서 아빠는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지. 뭔가 양식적이고 약간 유치해 보이는 그림을 보며, '믿음은 참 쓸데없는 노력을 하게 만든다. 이렇게 예술적 가치가 없는 작품을 그리게 하다니.'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실제로 대면한 그 성화는 그렇지 않았어. 책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던 그림이 생생하게 살아서 내게 다가왔어. 그 내용의 간절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걸 그리는 화가의 섬세한 손길, 그 깊은 신앙심과 경건한 자세가 한꺼번에 아빠의 마음에 투사되었지. 갑자기 영문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에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으니, 정말 울기까지 했으면 아마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았을 거야. (유명한 작품을 보고 운다면 수준이 있다고 인정은 받을 텐데 이건 전혀 언급도 안 되는 작품이니... 눈물 쏟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건 참 이상한 경험이지만, 이게 또 예술이 가지는 매력이기도 해. 누군가의 진심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될 때, 그 두 마음은 서로 통해서 크게 진동을 일으키게 돼.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하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아주 어렵지. 내 진심을 다 드러내는 기회도 쉽지 않고, 설령 그런다고 해도 그게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지지는 더 어려워.

그런데 예술은, 예술작품은 가끔 그런 기회를 갖게 해 주지. 작가가 진심으로 자기 마음을 드러내고, 수용자가 그 마음을 온전히 받게 되는 그런 희귀한 순간을.(예술체험에 대해서는 앞에서- '딸에게 쓰는 편지 15 예술은 백일몽, 불멸을 염원하는'- 얘기한 적 있으니 또 하지는 않을게.)


그런데 그 감동이나 통함은 꼭 정해진 길로 오지는 않는 것 같아. 마음은 살아있는 것이어서,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죽어버리게 되거든. '여기서 감동을 주어야지' 라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니까 감동받아야겠다'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라라 랜드>라는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위플래쉬>를 만든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뮤지컬로, 잘 짜인 스토리와 훌륭한 음악 연출 등이 어우러진 웰메이드 영화야.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지만 아빠는 별 감흥이 없었어. 그저 잘 만든 상업영화라는 정도? 그런데 단 하나 아빠의 마음을 움직인 장면이 있어. 주인공 라이언 고슬링이 해변가에서 휘파람을 부는 장면... 그 장면은 사실 스토리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의 진행과 동떨어진, 없어도 되는 그런 장면이야. 당연히 감동받을 이유도 없는 거지.

그런데 아빠는 그 장면에서 마음이 흔들려. 휘파람을 부는 라이언 고슬링의 마음이 휘파람을 타고 아빠의 마음에 흘러들어와. 그리고 아빠의 마음을 춤추게 만들어 버려. 왜 그럴까? 몰라. 이유는 모르지만 그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서 아빠와 연결되는 건 분명해. 아빠가 휘파람을 좋아해서?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빠가 좋아하는 게 휘파람뿐인가? 그 많은 좋아하는 것 중에서 왜 유독 그 장면의 휘파람이 이빠의 마음에 와 닿을까?


티센 미술관 3층 입구의 그 이름 모를 작품이 아빠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마찬가지였어. 그 작품들은 성화에 무관심했던 아빠의 시선을 단번에 빨아들이고, 무성의하게 보던 아빠의 마음을 흔들어 정신 차리게 했지. 자신의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리는 마음이, 자신의 전 존재를 절대자에게 바치는 경건한 복종심이, 무한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아빠에게 전해졌어.

성화가 아빠에게 감동을 주다니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험이야. 이런 게 여행의 재미라고 해야 할까?


사랑하는 딸!

꼭 티센 미술관에 가서 3층의 성화를 보라고, 아빠의 감동을 확인하라고 말하지 않을게. 너도 휘파람을 좋아하니 혹시 <라라 랜드>의 휘파람 장면에서 감동받을지는 모르겠지만, 티센 미술관의 성화에 감동받을 확률은 0.000001%도 안될 테니까.

그건 좋고 나쁨이나 우열의 문제가 아니야. 단순히 전류가 통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지. 덤덤하건 마음이 뜨거워지건, 그 어떤 체험이라도 그때 그 순간 나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거야. 오늘 잘 통했다가도 내일은 또 불통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다만 아빠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가능하면 많은 체험을 하라는 것! 지난 편지에서 말했듯이, 이 세상은 너의 것이야. 네 세상을 네가 넓게 즐기건 조금만 누리건 그건 네 자유지만, 네 세상과 불통하고 불화하며 지내는 건 불행한 일이지. 여행은, 체험은, 다양한 교류는 네가 네 세상과 얼마나 화목하고 소통하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기회야. 너도 곧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하지?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랄게.


   -- 여행의 예기치 않은 체험에 약간 당황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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