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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an 18.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32-스페인 여행③

사랑의 시작은 말하고 싶어 지는 것!

사랑하는 딸!

어제는 시간에 쫓겨서 결국 소피아 미술관에 가지 못했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지 못했다는 얘기지. 하지만 아쉬워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오늘은 프라도 미술관을 보는 날이니까. 유럽의 3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하는 프라도 미술관은 컬렉션의 규모가 엄청나서 하루에 다 보기는 무리라고 하지. 그러나 우리는 내일 아침 바르셀로나로 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프라도 미술관에서 관람을 끝내야 해. 간단히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인 거지.


수많은 작품을 보았고 또 보고 싶은 작품도 많았지만 간단히 두 작품만 말하도록 하자. 말하자면 아빠가 꼽는 프라도 미술관의 베스트. 하나는 널리 알려진,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이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야.


먼저 <쾌락의 정원>. 고백하자면, 아빠는 이 작품이 유명한지도 몰랐고 더더군다나 화가의 이름은 그야말로 듣보잡 아니니? 1500년대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 유명한 작품이니(그 작품 앞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든 단체관람객들이 집합하는 장소야) 여기저기서 본 적은 있었겠으나 그냥 스쳐 지나갔지. 별다른 감흥을 못 받았으니까.


'만화경'이라는 게 있지? 만화경이 뭔지도 알고 그걸 보면 뭐가 있는지도 알지만, 실제로 만화경 구멍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게 돼. 실제로 겪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경험을 맛보게 하지.

<쾌락의 정원>이 그랬어. 막상 그 그림 앞에 서면 만화경을 보듯 그림에 빠져들 수밖에 없어. 조금만 떨어지면, 5미터 앞에서 보면 그저 그런 그림인데, 2미터 앞으로 다가서면 대단한 그림이 되는 이상한 작품. 세상의 모든 인간사와 20세기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까지, 그야말로 인간계의 모든 것을 망라해 보여주는 대단한 작품이야.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그렇지만 꼭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은 그런 작품이야. 책으로 보지 말고, 설명을 듣지 말고, 직접 보고 경험하도록! 모름지기 인생은 가까이서, 5미터 말고 2미터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경험해야 진짜배기를 맛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아빠가 꼽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옛날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의 방'에서 느꼈던 그 감흥을 다시 느끼게 해 준, 정말 하루 종일이라도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이었어. 



<시녀들>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이 그림을 보자. 이건 고야(<옷 입은 마야> <옷 벗은 마야> 등으로 유명한)의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이야. 스페인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 군대에 대항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을 그린 작품이라고 해. 군대의 총에 맨손으로 저항하다 죽임을 당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광주 민주화 항쟁 같은 그런 상황인 거지.


그림을 보면 그 광경이 바로 이해가 되지. 그 당시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니까. 그런데 막상 그림을 보는 순간, 아빠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어. 총을 쏘는 군인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야. 총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하는데, 정작 표적을 봐야 할 군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고 있어.(사진에서는 그 이상함이 잘 느껴지지 않지? 직접 봐야 돼.) 기이한 분위기. 역할이 전도된, 겁에 질려 시선을 외면해야 할 피해자는 당당하고, 총을 쏘아야 하는 가해자는 차마 대상을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지.


예술작품을 설명할 때 보통 소재, 주제 등의 단어를 쓴다. 이 그림의 소재는 그림에서 보이는 바 그 상황을 말하는 것일 테고, 주제는 그 소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어. 소재에 대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작가의 가치관이 바로 주제인 거지. 좋은 작가 훌륭한 작품일수록 작가의 시선이 확실하고, 주제가 뚜렷해. 작품의 우열은 작가의 그 시선, 주제가 얼마나 일관성 있게 관철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는 거야.


이 작품 <1808년 5월 3일>에서 프랑스 군사들의 시선이 중요한 이유는 그게 주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야. 작가인 고야의 시선을 거기서 알 수 있다는 거지.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총'이야. '학살'이 작품의 소재이고, 그 학살의 핵심이 바로 총이니까. 총은 쏘는 자와 그 대상이 있게 마련이지. 총을 쏜다는 것은 대상을 죽인다는 말이고, 대상을 죽이려면 정확한 조준이 필요해. 그러기 위해서는 똑바로 봐야 돼. 그게 상황의 핵심이야.


그런데 고야는 그걸 비틀어버려. 가장 중요한 프랑스 군인들의 시선을 아래로 떨궈버림으로써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지. 프랑스 군인들의 시선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영토가 스페인을 침범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그러나 스페인 국민들의 시선은 살아있지. 그들의 영토가 유지되고 있는 거야.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다시 말해 거짓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게 그림 속 상황이지만, 고야에게는 그게 말하고자 하는 진실인 거지. 프랑스 군인에 의해 몸은 죽임을 당했을지라도 정신은 한순간도 침범당한 적 없다는 마음을 표현한 거야.

어떻게 설명을 해도 아빠가 느꼈던 그 단절감을 표현할 방법이 없네? 생생한 긴장감이 감돌아야 할 그림 속 상황이, 프랑스 군인들의 시건이 떨구어짐으로 해서 사라져 버렸지. 겉으로 보기에는 팽팽한 싸움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일방적인 상황이야. 프랑스 군인들은 형체만 있지 마음(즉, 시선)이 없으니까.


어쨌든! 굳이 고야의 그림을 언급한 이유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도 시선이 중요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막상 사진을 다운로드해 올려놓고 보니 말문이 막힌다. 계속 말하게 되는 사진의 한계. 백문이 불여일견! 결국 직접 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이 안타까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아빠는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은 계속해서 말을 하도록 만드는 마법이니까!


이 작품에서 시선이 중요하다는 건 앞에서 말했지? 일단 그림을 보면 가운데 소녀가 시선을 끈다. 주인공인 셈이지. 소녀가 정면을 보고 있고, 우리는 그림 속의 그 소녀를 보고 있어.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시선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생각도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림을 보는 우리의 자리가 사실은 그림 속 거울에 비친 스페인 국왕 부부의 자리임을 깨닫게 되고, 왼쪽 어둠 속에 서있는 화가가 국왕 부부를 그리는 중이라는 걸 알게 돼. 비로소 그림 속의 상황이 파악된 거지.


이걸 알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번 시선의 들락거림을 경험해야 해.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관람자의 시선으로 보기도 하는 등 복잡한 변화를 겪어야 하지. 그러면서 춤추듯 리듬이 생겨. 숲 속을 산책하듯이, 시선의 움직임을 따라 그림 속을 산책하는 거야.(이러한 시선의 변화, 그 움직임에 대해서는 논문을 쓰라고 해도 쓸 수 있어. 정말 절묘하고 멋져!)


그리고 결정적으로 화면 중앙 하얀 문 앞에 서 있는 남자 보이지? (그 사람의 높이에 대해서도 유념해야 돼. 국왕 부부의 거울과 같은 높이이고, 왼쪽 화가는 그들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어) 그 남자는 밝은 밖과 통한 문 앞에 서 있는데, 나가려는 것인지 들어오는 중인지 모르겠지만 닫힌 실내를 열린 바깥 공간과 연결시키고 있어. 실내에서 좁게 움직이던 시선을 무한한 공간 속으로 확장시키는 거지.

미스터리...! 이 남자가 없었다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적어도 아빠에게는) '좋은 작품' 정도로만 남았을지 몰라. 그러나 왼쪽의 화가와, 거울 속의 국왕 부부와, 문 앞의 남자가 있음으로 해서 이 작품은 어떤 영원성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인간사, 우주의 신비까지도 언급할 수 있는 그런 영원성을...


사랑하는 딸!

아빠가 너무 흥분해서 너로서는 영문모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떠든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까짓 그림 하나 가지고 웬 호들갑이람?'이라고 흉볼 수도 있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런 경험은 쉽게 할 수 없는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아빠는 나오는 대로 얘기를 하는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줘. 미술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아빠가 주관적으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돼. 술 취한 사람이 주정 부리듯, 아빠는 지금 <시녀들>에 취해있는 중이니까.


  --- 여행의 즐거움에 한껏 기분이 좋은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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