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편지5; 결혼은 미친 짓이다?

by 천하태평

* 이 편지는?


***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고 하지요. 시대적 추세는 점점 하지않는 후회를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더 행복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덜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가정을 이뤄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분명 미친 짓입니다.

부부는 오랫동안 서로에게 길들여진 가족이거나 분명한 위계질서 속에 살아야하는 군대가 아닙니다. 평등한 인격체로 동반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남성이 전적인 우위에 있던 옛날과 달라서, 요즘의 결혼생활은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갈등과 싸움이 불가피한 거지요.


불행히도 우리는 싸움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싸우면 안된다’고 배우며 컸지요.

싸우는 법을 배워야 갈등을 수습하는 길을 찾을텐데, 싸움을 피하며 살았기 때문에 갈등은 깊이 숨어들고 쌓여서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결혼은 싸울줄 모르는 두사람이 종합격투기의 옥타곤 안에 서는 것입니다. 이제 피범벅이 되게 싸우면서 싸움의 기술의 배워가겠지요.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지요. 미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결혼이라는 미친 싸움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게 바로 결혼은 미친 짓이지만 해도 괜찮은 이유입니다.


미친 여러분, 모두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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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

오늘이 우리집 2대 명절 중의 하루구나! 세뇌시키듯이 몇 년째 계속 물어보는데, 너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유가 뭐지? 아빠도 고집이 있는 사람이니까, 네가 알 때까지 계속 물어볼거야.


우리집 2대 명절... 하나는 결혼 기념일이고 또 하나가 바로 오늘, 엄마 아빠가 처음 만난 날이야.

지금부터 14년 전 오늘 엄마 아빠는 처음 만났고, 그게 우리집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어. 국경일로 치면 결혼 기념일은 광복절이고, 오늘은 개천절인 셈이지.


엄마를 처음 볼 때의 느낌은 아빠가 여러번 얘기했지? 한 마리 노란 나비가 사뿐히 날아와 앉는 것 같았다고...

엄마가 가까이 다가올 때의 그 경쾌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해서 잊혀지지가 않아.


사실 아빠는 결혼에 별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감독데뷔가 늦어지고, 감독과 결혼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면서 잠깐 결혼하고싶은 생각이 들었어.

바로 그때! 단 한번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그 순간, 엄마를 만난거야. 그리고 첫눈에 반해버린 거지.


(만약 그때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럼 지금 너는 없는 거지! 아빠하고 같이 본 영화 ‘백투더퓨처’ 생각나? 엄마 아빠의 사이가 멀어질수록 사진 속의 주인공 모습이 점점 없어지잖아?)


엄마가 왜 결혼을 결심하게 됐는지 아빠는 몰라. 아빠처럼 구체적인 이유를 얘기한 적은 없고, 꿈 얘기는 몇 번 들었지. 초록색 뱀 꿈을 꿨는데 그게 엄청난 길몽이라나?

그 뱀꿈이 아빠와 결혼을 뜻하는지 아닌지는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잖아. 꿈 때문에 아빠하고 결혼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 않니?


어쨌든 엄마의 선택도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야. 객관적인 아빠의 조건이 좋지 않았으니까.

나이도 많았고(40살!), 돈도 없었고, 직업도 장래가 불투명했고, 외모나 성격도 좋은 편이 아니고... (그러고 보니 뭐 하나 좋은 점이 없네? 정말 꿈때문인가...?)


짧은 연애기간을 거쳐 시작한 결혼생활...

연애와 결혼은 전혀 달라. 연애는 서로 좋은 것만 보고 보여줄 수 있지만, 결혼은 같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거든. 연애가 간식이라면 결혼은 주식이라고 할까?


당연히 엄마 아빠도 갈등을 겪었지. 서로 생활습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르니까. 그리고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도 다르니까.

결혼생활이란 그렇게 다른 점들을 맞추어가고 조정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 아빠가 너한테 문제 해결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수습을 잘하라’고 항상 말하는 이유도 그런 거야. 문제와 갈등은 항상 있기 마련이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하느냐 하는 점이니까.


엄마와 아빠의 사소한 갈등 하나 얘기해줄까? 바로 치약이야! 이건 일반 결혼생활에서 대표적인 갈등사례의 하나지. 치약을 어떻게 짜느냐 하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게 된다는 거야.

치약을 끝에서부터 짜건 가운데부터 짜건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싶지? 그게 바로 부부사이의 어려움이야. 그 작은 갈등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경우가 많거든.


엄마하고 아빠는 치약을 놓는 방법이 반대야. 엄마는 치약을 뚜껑이 아래로 가게 놓고, 아빠는 위로 가게 놓지.

처음에는 아빠가 열심히 똑바로 해놨어. 엄마가 잘못된 습관을 바꿀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아빠가 엄마식으로 바꿔보기로 했어. 그러면 똑같아지니까 아무 문제가 없을 거잖아?

근데 그렇지가 않더라고. 엄마식으로 따라했지만 아빠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치약을 뚜껑이 아래로 놓는건 거꾸로’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빠 마음이 불편한거야.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냥 되는대로 하자’ 야. 어떤 때는 이렇게 놓고,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놓고. 문제가 드러나지 않은 한 문제가 없는 거니까. 그정도 서로 믿는 사이는 된 거지.


엄마 아빠도 심각한 갈등을 겪은 적이 있어.

너를 낳고 2,3년 즈음 인가, 아빠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해. 당시 아빠는 감독 데뷔에만 정신이 팔려서 다른 생각을 못하고 있을 때거든. 결혼 후에도 그런 생각이었지만, 네가 태어난 후에는 더욱더 빨리 감독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아빠는 밤낮없이 고생하는데 엄마는 전혀 아빠한테 호의적이지 않은거야. 그래서 어느 날 같이 얘기를 나눴지. 그러면서 아빠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정말 충격을 받았어. 깜짝 놀라서 멍-한 그런 순간을 맞이했지.


“당신이 감독되는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처음에 아빠는 경악을 금치 못했어. 아빠는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돈을 벌어서 엄마와 너를 잘살게 하려고 밤낮없이 노력하는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니...!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아빤 이내 엄마의 말뜻을 알아들었어. 아빠는 아빠 욕심으로 감독이 되려고 한 거지 엄마를 위해 (그런다고 말하지만!) 한 게 아니었지.

엄마와 너를 위한다고 하면서 두사람을 멀리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도 안쓰고, 내 괴로움에 시달려 다정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엄마는 아빠한테 아무것도 받는게 없었던 거야. 아빠는 사랑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한다고 한 것이, 사실은 전혀 사랑하지 않은게 되어버린 거지...


아빠 설명이 충분하니?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하지만, 실제로 사랑은 단순하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거야.

사랑이 뭐냐고? 사랑은 주는 거야.막연하고 추상적인 거 말고 실제적인 걸 주는 거야.

아빠는 엄마를 사랑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엄마는 받은 게 없었지.

나중에 받게 될텐데... 하지만 그 나중이 언제 올까? 지금 오는 사랑이 없는데 그걸 믿을 수 있을까?

그때 아빠가 깨달은 것은 ‘아, 사랑도 증거가 있어야 하는구나. 지금 내가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점이야.

얼마나 사랑하니? 하는 말은 얼마나 주고 있니? 하는 뜻인거지.

사랑하긴 하는데 실제로 주는게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거지.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감정에 빠져있는 거지. 부디 너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주며 살기를.


가슴아프게 들은 얘기로는 할머니 말씀도 생각이 난다.

당시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같이 살고 있었는데, 문득 두분께 식사대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일찍 들어가 저녁을 사드리겠다고 했더니 할머니가 ‘무슨 날이냐’고 물으셔.


‘아니, 아들이 부모님께 식사대접 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고 웃으며 말했는데, 그때 할머니 말씀이 아빠 가슴을 아프게 했지.

‘아들이 부모님께 식사대접하는건 별일 아닌데, 네가 저녁을 사는건 대단한 일’이라는 거야. 왜냐하면, 이제껏 아빠가 아빠의 부모님에게 식사를 사드린 일이 없었다는 거지.

세상에! 삼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빠는 부모님에게 받기만 하고 살았던 거야. 다시 말해서 사랑을 한 적이 없었던 거지...!


사랑하는 딸!

이 편지가, 아빠가 널 사랑하는 조그만 증거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 장미꽃... 고마워. 아침에 오늘이 우리집 명절이라고 얘기할 때는 시큰둥하더니, 저녁에 빨강 노랑 장미꽃 두 송이를 준비했네? 아빠가 노란색 좋아하는 거 알고 있으니 노란 장미는 분명 아빠 것. 어리석은 아빠와 달리, 너는 벌써 사랑은 주는 거라는 걸 알고 있구나! 이러니 어찌 아빠가 널 자랑스러워 하지 않을 수 있겠어?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


사랑은 지금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하는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사랑하고 싶으면 지금, 몸으로, 행동으로 해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지금, 몸으로, 행동으로 해라.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는건 사랑이 아니라 공상이다. 지금 주지 않는건 사랑이 아니라 외상이다.

사랑... 외상으로 하지 말기를!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사랑을 주는 연습을 하려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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