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편지 1; 마지막 편지

by 천하태평

* 이 편지는?


*** 아이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있으십니까? 간단한 메모는 자주 했지만 정식으로 편지글을 썼던 게 이게 처음이었는데, 기분이 묘합니다. 그것도 유언을 하는 절박함으로 썼던 편지니까요.

그러니만큼 꼭 하고 싶은 이야기 순서대로 나왔던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말과 격려의 말... 의외로 마지막에는 아이 엄마에 대한 당부가 들어가 있네요?

저로서는 그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결혼 초기에 ‘만약 나 죽으면 3년쯤 있다가 재혼해라’고 말했었는데, 20년이 지나는 지금 재혼에 대한 얘기가 없군요.


솔직히 지금은 굳이 재혼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게 되면 좋겠지만, 일부러 재혼을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물론 본인이 하고 싶다면, 전 찬성입니다!)


아들은 재혼을 반대하고 딸은 찬성한다는데, 저희는 딸입니다. 딸 생각이 어떤지 궁금하네요. ***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천만번이라도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 나의 딸!


너에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사랑한다는 말 밖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구나. 정말 하루 종일이라도, 밤을 새우면서라도 계속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아빠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네가 아빠의 딸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내가 너의 아빠라는 사실이 항상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왜 그럴까?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면 네가 그렇게 완전 자랑할 만한 그런 사람은 아니지 않니? 그냥 평범한 아이인데, 왜 아빠는 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리가 개운해지고 온몸에 힘이 나는 걸까?

아빠의 착각일까? 아니면, 엄마 말처럼 고슴도치 가족이라서 그런가...? (뭐, 그래도 상관없어! 아무리 고슴도치 사랑이라고 말해도, 너는 아빠의 자랑스러운 고슴도치야!)


하지만 너한테는 분명히, 충분히 자랑할 만한 부분들이 있어. 그중에서도 제일은, 너는 잘 노는 아이라는 거야!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논다는 것은 즐긴다는 것이고, 즐긴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완전연소시킨다는 거야. 과거에 얽매어 머뭇거리지 않고, 미래에 짓눌려 주춤거리지 않고, 오로지 지금 현재에만 집중한다는 말이지.

(노느라 정신 팔린 너를 찾으러, 잡으러 다닌 게 몇 번이었는지! 밤낮 가리지 않고, 때로는 경찰차까지 동원되면서...! 이젠 컸으니 그런 일은 없겠지?)


잘 논다는 것은?

첫째,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거야. 둘째, 순간순간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해야 하지. 셋째,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하고, 넷째, 스스로가 현재 상황의 주인공이 되어야 돼.


아빠가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 바로 이거야!

대부분의 경우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해서 스스로 행동하는,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 아빠는 네가 네 인생의 주인공인 게 너무너무 자랑스럽다!!!


할아버지 장례식 때가 생각난다.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빠는 장례기간 내내 정신이 없었지.

아빠의 걱정과 달리 너는 잘 지내주었어. 짜증을 부리기는커녕 문상객들 신발을 정리하고 실내를 청소하는 등 적극적으로 네가 할 일을 찾아 해냈지. (네가 열심히 놀거리를 찾아내듯이!)


그리고 부의함을 정리하다가 나온 부의봉투 한 개...!

늦은 밤, 부의봉투를 정리하던 외삼촌이 아빠를 불러 갔더니 부의봉투 하나를 내주시는 거야. 장례식장에 비치되어 있는, ‘賻儀’라고 쓴 흔한 봉투... 뒤집어 뒷면을 본 아빠는 거기에 네가 쓴 글을 읽게 되었지.



‘할아버지, 타라 7권 살 수 있어요.

30년 후 할머니 자리 맡아놓으시고,

그동안 읽으며 보내세요.

천국에서는 공짜일지도 모르지만.

손녀딸 올림’


너는 장례식 광경을 유심히 살피던 중, 사람들이 부의함에 봉투를 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게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애도의 표시라는 것을 알고는, 너도 부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네가 가지고 있던 용돈을 넣고(만 육천 몇백 원...! 웬 돈이 그렇게 많았지?), 겉면에 편지까지 써서 부의함에 넣었던 거지!


너는 그때 타라 덩컨에 빠져있었고, 타라 덩컨 최신판인 7권은 네가 제일 읽고 싶은 책이었겠지? (그런 황망 중에도 할머니를 배려해서 ‘30년 후’라고 하는 센스는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너는 그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았고, 그걸 행동에 옮겼어.

세상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표시를 그렇게 훌륭하게 해낸 너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고난의 순간에도 주인공으로 멋지게 처신한 너를 어떻게 아빠가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니?


사랑하는 딸!

아빠가 너를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너도 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길 바래.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뿐인 전존재로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져라! 누가 뭐래도 이 세상은 너의 것이고, 너의 드라마니까.


그동안 아빠가 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했다면 미안해. 자기 자식이 아흔아홉 개를 잘 해도, 한 개를 잘못하면 잔소리를 하고 싶어 지는 게 부모의 마음이거든. 상처받지 않았길 바라고, 상처가 있었다고 해도 이내 회복이 됐을 거라고 믿어. 너는 아주 건강한 마음을 가졌으니까. 엄마 아빠가 제일 안심이 되고 너에게 감사하는 부분이 바로 그거야. 네가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엄마를 부탁한다!

네 얘기로만 끝을 맺으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엄마 얘기를 빼고는 마무리가 안되네? 변명삼아 말하면, 아빠는 아빠 없는 엄마가 잘 상상이 안된다. 아빠 없는 너는 크게 걱정이 안 되는데, 엄마를 생각하면 안쓰럽고 불안해.


왜냐하면, 너는 아빠에게 완전한 존재이고 인격이지만, 엄마는 아빠에게 반쪽인 존재이기 때문이야. 오랜 시간 서로 부딪치고 다듬어지면서 겨우 하나가 됐는데, 아빠가 없으면 엄마는 불완전한 반쪽이 되고 말잖니.

물론 엄마는 씩씩하고 건강하므로 아빠가 없어도 잘 살 거야.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법정스님처럼,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사람이다. 굳이 네가 돌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그저 혼자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그냥 주위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사람이 약해지면 혼자라는 느낌만으로도 엄청난 불안에 휩싸일 수 있거든.

사랑이란 단순히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을 만들어내는 마법이니까...!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 앞으로 될 너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처음엔 청소부가 꿈이었는데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까? 작가가 되고 싶다더니 어떤 작품을 썼을까? 정원이 있는 2층 집에 살고 싶어 했는데 어디에서 살까?


...아, 궁금하다. 아빠는 너의 미래, 너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부탁하건대 재미있고 신나는, 때론 감동이 있는 인생을 살아다오. 그래야 구경하는 아빠가 지루하지 않을 테니까.


밤이 깊었다.

너는 자다가 몸을 뒤척이는지 쿵! 하고 옷장을 차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날이 밝을 것이고,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

마지막 편지를 쓴다고 했지만, 제발 마지막 편지가 아니기를! 새로 하루를 지내고, 또 한 장의 편지를 쓸 수 있기를! 한 순간이라도 더 너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내일 또 만나자. 나의 사랑하는 딸!


항상 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