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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pr 18.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37; 너의 전성기는 언제?

 

사랑하는 딸!

어젯밤 TV를 보는데 <라디오 스타>를 하더라고. 사실 <라디오 스타>는 내가 좋아하던 몇 안 되는 프로그램의 하나였지. 처음 <라디오 스타>를 봤을 때의 놀라움은 잊을 수가 없어. 당시 <라디오 스타>는 강호동이 나오는 <무르팍 도사>의 뒷방 살이 프로였지. <무르팍 도사>를 편집하고 시간이 남는 만큼만 방송되는, 말하자면 땜질용 프로그램이었어.



그런데 아빠가 놀란 것은 그 <라디오 스타>의 새로운 형식 때문이야. 지금이야 떼로 나와서 수다를 떨고 정해진 대본에 따르지 않는 프로그램들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라디오 스타>가 보여주는 토크의 생생함은 혁신적인 것이었지. 이후 <라디오 스타>가 인기를 얻으면서 <무르팍 도사>를 몰아내고 메인이 됐는데, 중간에 들어온 김국진이 처음에 거의 한마디도 못하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해. 정해진 대본대로 진행하는 것에 익숙한 김국진은, 대본은 있지만 어느 정도의 즉흥성을 필요로 하는 <라디오 스타>의 진행방식에 적응을 못한 거지.     


세상 모든 것은 변해가게 마련이야. 흥망성쇠가 있어. 영원할 것 같은 기세로 욱일승천하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체되고 결국은 하락의 길을 걸어. 요즘 <라디오 스타>도 마찬가지. 초반의 생기는 사라지고, 활기 없이 무감각한 수다만 이어져. 그래서 요즘은 잘 안 보는데, 어제는 마땅히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고, 다른 할 일도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보고 있었어. 그런데 출연자 중 하나인 임요환이 재미있는 말을 하더라고. TV를 안 보니 너는 잘 모르겠지만 임요환은 ‘테란의 황제’로 불리는 유명한 전직 프로게이머야.     


“전성기 때의 임요환과 지금 전성기인 ‘페이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MC로 나온 양세창이 한 질문이야. ‘엄마하고 아빠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만큼이나 멍청하고 틀에 박힌 질문이었는데, 이에 대한 임요환의 대답이 인상적이었어. 당연히 ‘아마 제가 이기지 않을까요?’ 라던가 ‘페이커 씨가 워낙 잘해서 막상막하일 거예요.’ 혹은 ‘서로 장르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합니다.’ 정도의 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     


“그 사람의 전성기 때에는 아무도 못 이깁니다.”     


그 날 프로그램 내내 멍청할 정도로 어리숙한 캐릭터를 고수하던 임요환이 그 질문에 깜짝 놀랄 만큼 순도 높은 발언을 하더라고. 우문에 현답인 거지. 이건 단순히 나의 전성기에 대한 자부심과 현재 전성기에 있는 후배에 대한 존중 정도의 차원이 아니야. 그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우리 인생의 어떤 진리를 겪고 깨달은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핵심을 말하고 있지. 찌질 캐릭터를 연기하던 임요환을 안쓰럽게 보던 아빠는 임요환의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임요환이 부러워졌어. 그 당당한 시간을 살았던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지. 그 전성기를 항상 가슴 속에 선명한 불꽃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넉넉함... 아무리 바닥으로 떨어져도 그 불꽃은 꺼지지 않기 때문에 전성기를 경험한 사람은 결코 초라해지지 않아.   


전성기... 국어사전에는 ‘형세나 세력 따위가 한창 왕성한 시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해. 임요환이 말한 핵심, ‘아무도 못 이긴다’는 말의 느낌이 빠져 있으니까. 왕성하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도 못 이길 만큼 기세가 강력하다는 게 전성기의 핵심이니까. 불세출의 바둑기사 이창호가 한 말 중에 ‘승부는 당일의 기세다.’라는 말이 있어. 어차피 고수의 세계에서 기술은 큰 차이가 없지. 얼마나 기세가 강하냐가 승패를 결정한다는 말이야. 압도적인 자신감과 자기 확신, 그리고 내가 최고이고 중심이라는 자체발광의 에너지가 기세의 핵심이고 전성기의 원동력이지.  

   

사랑하는 딸!

너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대학생이니까 ‘네 전성기가 언제냐’고 묻지는 않을게. 오히려 그 질문을 아빠 자신에 돌려야겠지.

언젠가 ‘딸에게 쓰는 편지 4’에서 ‘화양연화’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기억나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의 화양연화... 아빠는 그 편지에서 대학 1학년 때가 아빠 인생의 화양연화인 것 같다고 말했지.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그렇다고 그때가 전성기는 아니지. 앞에 말한 ‘압도적인 자신감과 자기 확신, 그리고 내가 최고이고 중심이라는 자체발광의 에너지’는 있었는데, 그건 아빠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야. 주관적으로는 맞지만 객관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거지. 그게 ‘화양연화’와 ‘전성기’의 중요한 차이점이야. 전성기는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해. 아무도 그 기세를 당할 수 없다는 증거,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려고 해도 그 햇살이 너무 강력해서 눈을 감거나 피할 수밖에 없는 그 명확한 상황이 있어야 전성기라는 얘기지.     


그러면 아빠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안타깝게도, 아무리 생각을 곱씹고 곱씹어 되돌아봐도, 그런 시기는 없었던 것 같아. 누가 봐도 기세가 등등하다고 생각할 만큼 욱일승천하던 시기는 분명 없었어. 그런 기분으로 열심히 살기는 했지만 그건 아빠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고, ‘저 나무 쑥쑥 잘 큰다’ 거나 ‘저 꽃 참 이쁘게 활짝 폈네!’라고 할 만큼 잘 나가던 시기는 없었으니까. 가슴 아프지만, 나의 인생이 미처 못다 피고 시들어버린 꽃송이 같은 것이라고 인정할게.     


우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굳이 너에게 전성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리고 아빠에게 전성기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빠나 임요환에게 전성기는 과거의 것이지만 너에게는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야. 네가 너만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꼭 화려하고 큰 꽃일 필요는 없어. 작고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빛나게 하는 거니까. 세상 속에서,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너의 전성기를 만들어내기를 바랄게. 임요환이 말한 ‘아무도 이길 수 없는’ 그런 찬란한 발광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랄게.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아빠는 몰라.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도 안 할게. 아빠는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전성기를 갖지 못했어.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야. 사람들과 부딪치고 싸우는 것을 회피하지 말라는 거야. 그렇게 세상 속에서 단련되는 과정을 통해 너는 서서히 빛나는 광원이 되어갈 테니까. 너만의 울타리를 치고 세상과 격리된 삶으로는 전성기를 가질 수 없어. 전성기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에게 내려주는 훈장이니까.    


싸울 준비... 됐나?     


- 딸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삶을 살기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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