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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pr 12.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36; 우리 삶 속의 블랙홀


사랑하는 딸!

아침에 밥 먹으면서 드디어 블랙홀 촬영에 성공했다는 얘기와, 필리핀 루손 섬 동굴에서 새로운 현생인류의 화석이 발견됐다는 얘기를 했어. 그 새로 발견된 현생인류는 발견 장소의 이름을 따서 ‘호모 루소넨시스’라고 부른다고 하네? 우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아직도 밝혀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증거지.


우주의 블랙홀이 이제 겨우 밝혀지기 시작하는 단계인 반면, 우리 삶 속의 블랙홀은 너무나 명확히 드러나 있어. 엄청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여 압축시켜 버린다는 블랙홀... 현실 속의 블랙홀은 바로 ‘돈’이지. 돈은 지구 상 모든 인류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고 유일무이한 척도야.


자본주의가 현대사회의 단독체제가 된 이상 돈이 중심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태양계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겠다는 얘기니까. 저항할 수도 없고, 저항해도 안 되는 절대적 진리인 거지.

문제는 블랙홀의 중력에 휩쓸리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거야. 지구라는 행성이 태양의 중력을 받고 있으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행운으로 아름다운 환경과 인류의 번성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처럼.


가까우면 뜨겁고 멀면 차가워지지. 너무 멀면 떨어져 나가고 너무 가까우면 태양의 중력에 빨려 들어가 불타버려. 지구는 45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적절한 자리를 찾아냈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백 년도 못 살아. 한 번의 빙하기만 와도 그걸로 끝이야. 정신 바짝 차리고 나의 자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망하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돈을 멀리하라는 얘기가 아니야. 현대사회는 돈이 곧 힘이니까 돈이 필요해. 중요해. 아빠가 좋아하는 도끼는 랩의 내용이 맨날 자기 자랑, 그중에서도 돈 자랑이야. 아빠는 2014년에 나온 일리네어의 <11:11> 앨범을 좋아하는데, 아빠가 자존감을 잃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 많은 격려가 됐어. 1990년대 초 신해철의 2집 앨범 <Myself>를 들으며 힘을 냈던 것과 비슷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해철은 노래의 내용이나 형식이 다 내 취향과 맞는데 도끼의 랩은 그 내용이 전혀 나의 생각과 다르다는 거야. 아빠는 잘난 체를 싫어하고, 더군다나 돈만 밝히는 태도를 거의 경멸하다시피 했으니까. 그런데도 도끼의 노래에서 위안을 받는 아빠의 심리가 아빠 스스로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았지. 

그래서 다른 힙합 음악을 찾아들어봤어. ‘아,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전혀 감흥이 없는 거야. 외국 힙합은 그래도 들을만한데, 한국 힙합은 아무리 유명한 노래를 들어도 감동이 안 와. 그리하여 아빠가 겨우 얻은 결론은 ‘도끼의 노래는 비트가 좋다’는 추상적인 것뿐이었어.


도끼의 비트가 인상적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 뭐랄까, 도끼의 비트에는 어떤 정서가 깊이 스며들어 있어. 감정을 자극한다는 말이지. 그런 정서를 바탕으로 훌륭한 랩을 보여주니 감동스러운 건 당연지사. 좋은 작품의 기본이지.

하지만 ‘좋다’는 것과 ‘매혹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당시 아빠는 도끼의 노래에 매혹되어 있었던 거잖아? 그 매혹의 이유가 뭘까?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아. ‘비트가 좋다’는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태양을 보듯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 도끼는 스스로 빛나기 때문이야. 확고한 자기의식을 가지고 자기 내부의 에너지를 발광시키는 태양이기 때문이야. 도끼 이후 수많은 래퍼들이 숨 쉬듯이 돈 자랑을 늘어놓지만, 거기에는 도끼가 보여주는 당당함과 품위가 없어. 나의 중력으로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중력에 이끌리기 때문에 에너지가 나오지 못하지. 아빠가 돈 얘기나 자기 자랑을 싫어하는데도 도끼의 랩에 감동했던 것은 그 겉모습이 아니라 그 내면의 자존심, 세상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주인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던 거야.


사랑하는 딸!

아빠는 네가 부자로 살기를 바라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의 블랙홀에 빠지지 않는 거야. 축구선수 메시는 연봉이 1300억이 넘고, 대기업의 CEO는 일반직원보다 연봉이 30배 이상 많다고 해. 메시는, 대기업의 CEO는 그 돈의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메시가 1300억의 가치가 있다고 정말로 믿는 순간, CEO가 일반직원보다 30배 이상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급속도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거야. 돈이 많건 적건, 자본주의를 산다는 것은 항상 줄타기하는 것처럼 위험해. ‘내가 세상의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놓치는 순간 나는 자본주의의 질서에 휩쓸리게 되고, 돈의 중력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야 해.


얘기하다 보니 분위기가 약간 황량해졌는데, 너는 잘하고 있어. 얼마 전 엄마가 네 얘기를 하면서 좋아하더라고. 네가 학교에 꽃 핀 얘기도 하고 또 날씨 좋다는 얘기도 한다고, ‘이제야 밖엣 것들이 보이는가 보다’고. 다시 말하면, 이제 너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지.


정말 꽃들이 만발한 봄날이야. 어제 저녁 엄마하고 양재천을 걸었는데 이미 성질 급한 벚꽃들은 지고 있더라. 파릇파릇 새순이 솟아오르는 나뭇가지를 보면 막 몸이 간지러워져. 온 우주만물이 모두 각자의 중력으로 자신을 뽐내는 이 화려한 날에 너는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하네? 담주부터 중간고사 시험이라더니, 마음에 부담이 좀 되나? 대학 들어가서 처음 시험이라 어떻게 볼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어쨌든 파이팅!


  -- 딸이 도끼처럼 세상의 주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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