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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Mar 26. 2019

동생에게4;'안 미워한다'와 '사랑한다'사이의 시간


네 생일인데 어쩌다가 아버지 얘기를 하게 되었는지 몰라? 너는 시간이 갈수록 돌아가신 아버지가 점점 더 존경스럽고 좋아진다고 말했지. 아버지가 좋은, 훌륭한 분이라는 것에 토를 달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어.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다르지. ‘좋다’는 것은 선악(善惡)의 개념이니까 생각의 차원이고, ‘좋아한다’는 것은 호오(好惡)의 차원으로 감정적인 문제야. 대체로는 감정이 쉽게 변하고 사라지니까 ‘좋은 분’이었다는 것은 선명해도 ‘좋아한다’는 감정은 흐려지게 마련인데, 네 경우는 특별히 예외적인 사례라고 봐야지. 점점 좋아진다고 하니 말이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 오랜 세월 세상과 불화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아버지와의 불화 또한 당연한 일이었고,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니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어. 

그 과정에서 세 개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하나는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가족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일과, 나 혼자 겪고 기억하는 일과, 네 생일날 처음 얘기한 그 얘기...


첫 번째 장면. 그 날의 일이 왜 나에게는 롱쇼트로 기억되는지 모르겠어. 달빛이 가득한 하늘 아래로 어두운 저수지가 전면에 있어. 우리 집은 그 저수지 가에 있지. 저수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집 안에는 물론 흐느껴 우는 내가 있을 테지만, 정작 보이는 그림에는 내가 없어. 그냥 풍경만, 나의 서러운 흐느낌만 들릴 뿐이지.


왜 그 날을 떠올리면 그 장면이 떠오를까? 초등학교 1학년쯤인지 그 이전 인지도 기억나지 않고, 국수를 널던 대나무가 몇 개가 부러졌으며 그래도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는 것 등 여러 얘기를 들어 알고 있지만 내가 실제로 기억하는 것은 좀 전에 말한 그 장면이야.


어쩌면 나로서는 구체적인 그 날의 장면을 기억하기 싫어서일지도 몰라. 나로서 그날은, 세상과의 적대적 관계를 공식화하는 날, 아버지와의 심리적 단절을 결심한 날이니까. 그 날 이후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 세상에 대한 불신은 내 마음 중심에 기본 장착이 되었고, 아주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면서 나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었어.


친구 집에 놀러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나는 놀러 갔다 왔지.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이 났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나는 말 그대로 ‘죽도록’ 맞았던 거야. 왜 아버지는 사소한 잘못에 대해 그렇게 엄청난 화로 다스렸을까?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내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세상에 대한 미움이, 내 마음의 단절이 약해졌거나 없었을까?


왜 아버지가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였는지 내가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야. 어릴 적 나에게 있었던 어떤 일... 아직도 구체적으로는 생각나지 않는 그 일을 알게 되니 모든 것이 이해되었어. 내 인생이 통째로.(아주 나중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혹시 얘기할 기회가 생길지...?)


두 번째 장면. 아무에게도 얘기 안 한, 아버지가 내게 마음을 닫았던 그 날은 이래.

고등학교 때쯤이 아닐까 싶은데, 밤에 마당으로 나갔어. 담배를 피우러 나갔는지 화장실을 가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가다가 마당 벽 쪽에 아버지가 허리를 굽히고 엎드려있는 걸 봤어. 과음을 하신 듯 괴롭게 토하고 계셨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냥 방으로 돌아왔어. 왜 등이라도 두드려주지 않고 그냥 돌아섰냐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느냐고?

변명하지 않을게. 사춘기 아니었느냐고,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증오했다고 얘기해봐야 소용없는 얘기지. 그 순간 나는 속물인 아버지를 경멸했고, 조롱했어. 아버지의 그 모습이 세상 살기의 어려움인걸 알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중요한 것은 그때 아버지도 내가 나온 걸 알고 있었고, 그냥 들어간 걸 아셨고, 그 순간 ‘저 놈은 내 아들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셨을 거라는 거야. 표현이 과했나? 어쨌든 나와 연결된 마음의 끈을 잘라버리셨다는 거지. 툭-! 그 날 이후, 우리는 모양으로는 부자지간이었지만 실제로는 남남이었던 셈이야.


그렇게 남남으로 살다가 언제부터 다시 회복되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어. 내가 변하면서부터니까, 내가 영화를 준비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되새김이랄까 그런 시간을 갖게 되었고, 내 동력의 원천인 적개심과 증오를 알고 나니 조금씩 변화가 생겼어. 봄이 오면서 언 땅이 녹듯이, 작은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지.


 ... 가슴 아프게 들은 얘기로는 할머니 말씀도 생각이 난다.

당시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같이 살고 있었는데, 문득 두 분께 식사대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일찍 들어가 저녁을 사드리겠다고 했더니 할머니가 ‘무슨 날이냐’고 물으셔.

‘아니, 아들이 부모님께 식사대접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고 웃으며 말했는데, 그때 할머니 말씀이 아빠 가슴을 아프게 했지.

‘아들이 부모님께 식사 대접하는 건 별일 아닌데, 네가 저녁을 사는 건 대단한 일’이라는 거야. 왜냐하면, 이제껏 아빠가 아빠의 부모님에게 식사를 사드린 일이 없었다는 거지.

세상에!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빠는 부모님에게 받기만 하고 살았던 거야. 다시 말해서 사랑을 한 적이 없었던 거지...!

            (<딸에게 쓰는 편지 5; 결혼은 미친 짓이다?> 중에서)


예를 든 것은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야.

내가 변한다고 아버지도 당장 따라서 변하는 건 아니지. 아버지가 나에게 마음을 연 순간도 나는 기억나. 아버지가 전립선 수술받느라고 입원하셨던 적 있지? 그때 각자 적당히 당번을 맡아서 간호를 했는데, 내가 간호하던 중에 있던 일이야.

뭐가 문제였는지 아버지가 음식을 토하셨어. 침대에 누워 토하시고 당황하며 내 눈치를 보시는 거야. 나는 얼른 토한 것들을 치웠는데,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꼈어. 아마 아버지는 토한 것에 대해서 수치심 비슷한 것을 느끼셨던 듯해. 그만큼 나와 마음의 거리가 있다는 뜻이지. (어쩌면 위에 얘기한 그날 밤이 생각나셨는지도 모르지. 그날처럼, 내가 또 경멸의 태도로 모른 체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런데 나는 토한 것에 대해서 전혀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뒤처리를 했고, 그게 아버지에게는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던 가봐.

그냥 느낌으로 그렇다는 게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가 되느냐고? 증거가 있어. 그 시간 이후, 아버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으니까. 어떻게? 내게 스스럼없이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셨어. 대단한 변화지.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잘 시키지 않으셨잖아? 더군다나 네 말대로, 아버지는 나를 어려워하셨어. 그런 분이 이래라저래라 편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마음이 열렸다는 확실한 증거인 거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날이야.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갔을 때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심폐 소생술을 받고 계셨지. 다급해진 나는 뭐든지 응원의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

그런데, 그 절박한 순간에, 심폐소생술로 겨우 심장이 움직이는 그때 필요한 그 말이 나오지를 않는 거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내 입에서 겨우 나오는 말은 ‘아버지. 나, 아버지 안 미워해요.’였어.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지. 나는 나오는 대로 열심히, 기도하듯이, 주문처럼 소리 질렀어. “아버지. 나 아버지 안 미워해요.”

아마 남들이 보면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을지도 몰라. 생각하면 그 상황에 적절한 말은 아니지 않니? 하지만 나는 절박했어.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 ‘사랑한다’는 말 대신 나오는 말이니까. 나로서는 그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 의사는 결국 심폐소생술을 중지했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지. 그리고 나는, 돌아가시기 전에, 드디어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었어. 나는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했고, 분명히 아버지가 그 말을 들으셨을 거라고 믿어.

의식이 있어서, 말을 할 수 있어서 내게 ‘난 괜찮다. 그만해도 된다.’라고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빙그레 웃으시며 ‘알고 있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시면 더 좋았을 텐데. 주무시고 난 듯이 몸을 일으키며 ‘이제 됐다. 집에 가자.’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어차피 우리는 모두 헤어지게 마련이다. 헤어짐이 슬프고 가슴 아픈 건 사실이지만, 밤이 오고 아침이 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헤어짐이 아니라, 어떻게 헤어지느냐 하는 거지. 갑작스러운 이별이었지만, 그런 점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감사한다.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기회를 주셨으니까.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나오지 않던 ‘사랑한다’는 그 말. ‘안 미워한다’는 말의 뒤에 숨어서, 차마 부끄러워서 나오지 못하던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그 말...


어머니가 들으시면 서운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미련이 없어. 내 마음 깊이 있던 말을 하고 헤어졌으니까. 아쉽고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내 진심을 아버지께 전했고, 아버지가 그 진심을 받아주셨다고 믿어. 잘 헤어졌다고 생각해.


다시 생각해보면, 그토록 오랜 시간 아버지의 심장이 견뎌낸 이유가 내가 그 말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신 게 아닌가 싶어. 심폐소생술을 하면 그렇게 아프다는데, 그 고통을 견디며 내가 차마 못한 말, ‘안 미워해요’ 뒤에 머뭇거리며 나오지 못하는 ‘사랑해요’라는 말을 기다려주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 깊은 사랑... ‘안 미워해요’와 ‘사랑해요’의 사이에 있던 그 시간은 내게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증명해주는 시간이야.


사랑하는 동생아.

옛날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나이가 들어 주책이라고 비난하지는 말아줘. 생일날 먼저 얘기를 꺼낸 건 너니까. 그 날 외삼촌 얘기하면서 넝쿨처럼 따라 나왔던 것 같은데, 나도 그 얘기로 마무리를 할게.


네 말을 들으면서, ‘아! 외삼촌도 나처럼 절박한 마음에 그런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기 속의 앙금을 풀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걸 풀 시간을 갖지 못했던 거지. 만약 외삼촌이 나의 입장이었다면, ‘서운하다’에서 시작해서 ‘잘못했다’ ‘죄송하다’ ‘감사하다’로 변해가지 않았을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시인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구나 실감하게 돼. 그 상황, 죽으냐 사느냐 하는 처절한 순간에도 ‘사랑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게 어이없지 않니?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있는 말을 내뱉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오랜 시간 발버둥 치며 소리 질러서 겨우 나왔다는 게 참 이상해. 나라는 사람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어떤 생각도 진짜가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 


갑자기 노래가 듣고 싶어 지네? 아버지 노래... 싸이의 <아버지>나 김진호의 <가족사진>이나 되는대로 찾아서 들어봐야겠다. 아버지 술 취해 들어오시면 부르시던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도 생각나고.


그만 하자. 지나친 감상주의는 건강에도 해로워. 잘 지내고 또 보자고.

  --- 점점 바르게 살아가는 동생을 보며 감사하는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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