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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May 27. 2019

딸에게쓰는편지40;자르느냐마느냐 그것이문제로다


사랑하는 딸!

주말에 할머니 댁에 갔다가 살짝 논쟁이 붙었어. 문제는 네가 머리를 커트하는 게 좋으냐 아니냐의 문제. 고모와 아빠는 찬성이었고, 할머니와 엄마는 반대였지. 팽팽한 2:2 상황. 아빠가 ‘비겼으니 어떡하냐?’고 너에게 난감한 척 묻자 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저 자신을 가리켰어. 너의 한 표가 열띤 논란의 결정을 짓게 된 거지.


그 자리에서 네가 확실한 의사 표명을 안 했지만, 네 뜻이야 뻔한 거 아냐? 네가 엄마한테 ‘커트를 하면 어떨까?’ 하고 물은 게 상황의 시작이었으니까. 네가 머리 깎는 걸 좋아하지 않는 엄마는 ‘할머니가 싫어하셔’라고 할머니 핑계를 대며 안된다고 했고, 아빠는 널 돕기 위해 슬쩍 그 문제를 공론화시킨 거였어.


“너는 긴 머리 묶은 게 제일 예뻐. 얼굴도 예쁘지만, 머리 알(머리통 모양)이 예쁘잖아.”


처음에 강력히 반대하시던 할머니가 차츰 강도를 낮추더니, 나중에는 ‘커트만 하고 염색은 하지 마. 머리야 금방 자라니까.’라고 입장을 바꾸셨지. 4:1이 된 거야.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숫적으로는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으니 그냥 커트하고 염색을 하려나? 아니면 엄마가 허락을 할 때까지 눈치 살피며 기다리려나? 선택은 너의 몫이고, 아마 다들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할 거야.


별것 아닌 일 같지만, 사실 이건 매우 중요한 입장을 대변하는 문제야.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빠는 성인이 된 이후 아빠 개인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 의논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그런 생활의 태도를 갖고 있었지. 상대를 무시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다만 그게 주체적인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뜻대로 행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 책임지고 대처해 나가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온 거야.


반면 네가 지금 취하는 입장은 나의 뜻보다는 주변의 의사를 중시하는 형태를 취하는 거잖아?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왜 물어봐? 그냥 맘대로 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거야. 복잡하거나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그저 네 머리 스타일을 네가 결정하는 단순한 일이니까. 사소한 것도 스스로 결정을 못하는 결정장애 혹은 소심한 겁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의 태도가 훨씬 정답에 가까운 거라는 걸 이제는 알아. 아빠가 수십 년 세상과 부딪치면서 겨우 깨달은 삶의 태도를 너는 지금, 벌써 실천하고 있더라고.


...이제 겨우 스무 살, 막 대학 합격 통지를 받은 새내기 대학생에게 '이 세상은 네 세상이다'라고 말하는 게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아빠도 용기를 낼게. 용기를 내어 더 강조해서 말할게, 이 세상은 네 세상이고, 이 세상의 주인은 너라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에 너만이 유일한 존재이고(부처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의 모든 것은 너의 뜻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물론 믿어지지 않을 거야. 아빠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될 거야. '나는 지구 상 80억 가까운 호모 사피엔스 중 하나에 불과하고,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아빠는 그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너는 80억 인류의 중심에 있고, 네가 없으면 인류는 물론 이 우주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너라는 개체가 눈을 뜨면서 이 세상도 생겨났고, 네가 죽으면 이 세상도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러므로 너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주관자이자 책임자이며, 네 생각 네 행동이 세상의 운동에 결정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 세상의 모든 것은 각자의 계획에 따라 배치되어 있어. 엄마 아빠가 너와 가까이 있는 것은 네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야. 아빠가 뉴욕을 좋아하고 이과수 폭포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멀리 두는 것은 (구체적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야. 세상 모든 일은 각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 일어나는 거야.

  --<딸에게 쓰는 편지 33-축 합격. 이젠 네 세상이다!> 중에서


그동안 아빠가 해왔던 말의 요지야. ‘네가 세상의 주인이고, 네 뜻대로 살아라’라고 말해온 아빠가 왜 지금은 상대의 뜻을 살피는 태도가 정답이라고 말하는 걸까?


길지 않게 정리해 볼게. 그동안 아빠가 얘기한 것은 ‘나는 나다’라는 얘기야. 그런데 ‘나’로 살다 보면 ‘너’ 혹은 ‘세상’과 만나게 돼. 그러면서 충돌이 생기지. 그 충돌과 갈등을 통해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결국에는 ‘따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돼. 상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거지. 정리하면 '나는 나다'에서  ‘네가 나다’를 거쳐 '우리는 하나'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결론에 도달하는 거야. 내 앞의 상대가 좋아야 내가 좋아지는 거고, 내 이웃 내 사회가 잘 살아야 내가 잘 산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지.


‘겸손’ ‘참회’ ‘감사’ 같은 마음들은 이 과정, ‘나’라는 자의식이 무너지고 ‘남’이라는 대상을 인정하게 되면서 생겨나. ‘저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은 ‘저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할까?’라는 쪽으로 발전하고, 그렇게 해서 ‘사랑’이라는 행위가 시작되는 거야.


흔히 ‘자신을 사랑하라’라고 말하지. 아빠도 너에게 그렇게 말해 왔고. 사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자신을 사랑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굴레가 깨질 때, 나라는 껍질을 벗고 타인에게로 그 사랑이 퍼져나갈 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는 거지.


사랑하는 딸!

네가 엄마한테 ‘머리 커트할까?’라고 물어볼 때 아빠가 의아해했던 것도 사실이야. ‘다 큰 애가 왜 저런 걸 허락 맡으려고 할까?’ 생각한 거지. 지금은 아니야. 엄마를 최대한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해.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원칙에서 나온 거라고 봐.


다만 한 가지, 그게 너 자신을 억압하는 결과로 연결되지는 않았으면 해.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이고, 내면은 쉽게 상처를 받거든. ‘내 뜻대로 안 되면 상대 뜻대로’는 훌륭한 삶의 태도지만, 기꺼이 상대 뜻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과 연습이 필요해. 그리고 아직은 뻔뻔하게 너 자신을 주장해도 돼. 이제 대학 새내기이고, 사회 초년생이잖아. 부딪치고 실패하고 갈등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거니까. 


그런데, 엄마가 왜 반대하는지 아니? 엄마가 네 선택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슬쩍 물어봤어. ‘할머니가 싫어하신다’고 한 것은 분명 핑계니까 뭔가 나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엄마는 너의 미용 문제는 나중이야. 엄마가 걱정하는 건 너의 안전이지. 작년쯤부터 엄마의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거 알고 있지? 여자대학을 싫어하던 것이 남녀공학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바뀌었지. 다시 말해서 엄마는 세상 속의 불특정 남자들이 무서운 거고, 긴 생머리를 묶고 다니는 것이 그나마 그들의 시선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엄마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래.


“(여혐 남성들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짧은 머리의 여자는 무조건 페미(페미니스트)라고 본다.”


네가 커트를 하면 소위 ‘여혐’ 남성들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주류 남성으로 자라온 아빠로서는 공감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엄마가 결정적으로 공포를 느끼게 된 건 2016년 강남역 화장실에서 발생한 묻지 마 살인사건 때문이야. 노래방 화장실 앞에서 여성만을 골라 살해한 이 사건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 ‘나도 언제 어디서든지 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준 거지. 엄마에겐 네가 태권도 4단인 것도 전혀 안심이 안되나 봐. 엄마가 그런 걱정 없이 네 예쁨만으로 스타일을 고민할 그런 날이 언제나 올런지...


너는 변화를 원하고 엄마는 네 안전을 위해 현재가 유지되기를 바래. 흔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하는데, 너도 네 뜻과 엄마의 바람을 잘 살펴서 신나게 날아오르기를 바랄게. 엄마를 잘 설득해서, 이왕이면 5:0 만장일치로 커트를 하면 더 좋잖아? 할머니는 ‘커트만 하고 염색은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너는 어떻게 할지 그것도 궁금하고. 뭐, 어떤 선택을 하던지 아빠는 네 편이야. 오늘도 내일도 우리 딸 파이팅!

   ---어느 날 짧은 머리에 염색을 하고 들어오는 딸을 기대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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