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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ul 03.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41; 집안일의 정석


아침에 할머니와 통화를 하다가 네 얘기가 나왔어. 대학생이 되어 처음 맞은 방학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신 거지.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묻는 대로 대답을 하는 단순한 사람이니까, 당연히 있는 그대로 말을 했겠지? 잔다고.


“밥은 먹냐?”

“먹죠.”

“지가 차려서 먹어?”

“제가 차리죠. 저 점심 먹을 때 깨워서 같이 먹어요.”

“설거지는? 설거지는 해?”

“안 하던데요? 제가 하고 나가요.”

“그것 참... 에미 애비가 너무 잔소리를 너무 안 해. 할 거는 해야지.”


가르칠 것은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 당연한 말이고,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아빠가 누군가? 너에 대한 잔소리를 모아 <너는 될 애>라는 책으로 낸 적이 있는, 거의 잔소리 대마왕이다. 그런 내가 더 이상 말을 안 하는 것은 이미 잔소리의 시효가 지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말하면 잔소리고 운명은 네 번 노크를 하지만, 아빠는 세 번 잔소리를 한다. 거기까지다.


아빠는 분명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세 번 말했지만 너는 듣지 않았다. 그러면 끝인 거다. 너는 할 생각이 없는 것이고, 하기 싫은 집안일을 억지로 하라고 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중요한 것은 집안일이 아니라 같이 사는 것이다. 함께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잘 살기 위해서는 규칙을 알면 편하다. 공식을 알면 문제풀이가 쉬워지듯이, 공동체 생활의 공식을 알고 있으면 훨씬 갈등의 요소가 줄어든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복습 차원에서 집안일을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리해 보자.


공식혼자 산다고 가정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면 그건 내 일이다. 다시 말해서 먹고 자고 치우고 돈 벌고 하는 모든 일들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혼자 그걸 어떻게 다 하느냐고?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해야 한다. 미성년이라면 유예가 되지만 너는 이제 성인이다. 그러기 싫으면 누군가와 같이 살며 서로 도와야 한다. 나누고 함께 하며 살아야 한다. 그게 가족이다. 


공식내 뜻대로 안 되면 상대 뜻대로. 아빠는 너에게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너는 하지 않는다. 네가 설거지를 했으면 하는 게 아빠의 뜻이지만 네가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네 뜻대로 따라야 한다. 네가 아빠 말을 듣지 않으니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지만, 다행히도 아빠는 공식을 알고 있다. 집안일 첫째 공식에 의하면 당연히 설거지는 아빠가 할 일이다. 네가 안 한다고 해서 기분 나쁘거나 억울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공식대화의 법칙을 따르라. 그러나 함께 살다 보면 때로 기분 나빠지고 억울하게 느껴지는 때가 생긴다. 내가 일을 더 많이 하는 것 같고 불공평하다고 생각된다. 교육 차원에서 말을 했는데 듣지 않으면 분노하기도 한다. ‘내 뜻대로 안 되면 상대 뜻대로’라는 두 번째 공식을 열심히 되새겨도 화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갈등과 싸움이 시작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대화다. 명분이나 감정을 앞세워 싸울 일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제1공식과 제2공식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제3공식을 써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제3공식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를 벗어나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간혹 정석을 쓰지 않고 풀리는 문제도 있긴 하지만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1,2 공식으로 되지 않으면 절박한 심정으로 제3공식 대화의 법칙에 매달려야 한다.


대화의 법칙. ‘그런 것은 그렇다아닌 것은 아니다잘못은 인정하고모르는 것은 묻는다.’

간단하지만 실제로 행하기에 쉽지는 않아.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해결책이므로 피해 가면 안된다. 서로 피를 튀기는 싸움을 하더라도 끝을 봐야 한다. 대화의 법칙을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


아빠가 그냥 설거지를 하는 이유는 제2공식 ‘내 뜻대로 안 되면 상대 뜻대로’를 따랐기 때문이다. 공식대로 문제를 풀어 해답을 낸 것이다. 할머니가 걱정하시듯 적당히 넘어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아! 우선순위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아빠는 공식의 중요도를 1,2,3 공식 순서대로라고 생각하는데, 할머니는 제2공식보다 제3공식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먼저고, 그래도 안되면 그때 ‘상대 뜻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 


사랑하는 딸!

네가 설거지를 하느냐 마느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마찬가지로 집안일의 공식 1,2.3 역시 중요하지 않지. 하지만 알고 있으면 편한 건 분명해. 지도가 있으면 길을 가기 쉬운 것처럼, 공식을 알고 있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져. 공식을 쓰고 말고는 네가 정할 문제인 거지.


네 인생이니까. 네가 인생의 주인공이고 유일한 주체이니까. 네가 그렇게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와 남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때가 올 거야. 세상과 소통을 하게 되는 거지. 부디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 오랜 시간 불통의 세월을 지내온 것을 반성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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