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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ul 22. 2019

내가 우울증의 바다를 건너는 방법



잊을만하면 나오는 ‘우울증 자살’ 뉴스를 보면서, 우울증을 앓았고 아직도 가끔 시달리는 사람으로서 뭔가 얘기할 필요를 느낍니다. 심한 우울증을 견디고 살아난 내 이야기가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요.


저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제 경험을 말하는 것이므로 의학적으로, 혹은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나 방법과 다를 수 있겠습니다. 심하게 잘못된 언급이 있다면 댓글 주세요.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울감과 우울증을 구별하고 시작할까 합니다. 비슷한 말이지만 전혀 다른 놈들입니다. 흔히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우울감 얘깁니다. 우울감은 감기처럼 어쩌다 왔다가 시간이 지나면 낫는 게 보통이지만, 우울증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차라리 ‘우울증은 마음의 암’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우울감은 누구에게나 있고 언제든 느낄 수 있습니다. 희로애락 흔한 감정 중의 하나니까요. 때에 따라 그게 깊어지고 길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변합니다. 감정은 그때그때 달라지게 마련이지요. 물론 우울감도 심하면 견디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심해지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합니다. 감정이란 야생동물 길들이기와 비슷합니다. 그것과 친해져야 하고, 적당히 밀당을 하며 컨트롤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반면 우울증은 생각의 병입니다. 현재 기분이 우울한 것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우울합니다. 우울한 삶이므로, 살고 싶지가 않고 살 기력도 없습니다. 법의 판결을 받은 것처럼 인생의 판결을 받아버렸으므로 살 이유가 없습니다. 단심제여서 항소도 안됩니다. 흔히 일어나는 자살은 그 판결을 진짜라고 믿어버려서 일어납니다. 스스로 판결을 내리고 스스로 형을 집행하는 거지요.


매를 맞으면 아프지만 그 통증은 금방 사라집니다. 희로애락이나 우울의 감정도 통증보다는 길게 가더라도 곧 사라집니다. 그러나 증오심이나 우울증 같은 생각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암세포는 없애지 않으면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우울증도 없애지 않으면 자라납니다. 결코 감정처럼 저절로, 시간이 가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항상 우울의 바다 가까이 살아갑니다. 가끔 일렁이는 파도를 구경도 하고, 적당히 바닷물에 몸을 적시기도 하면서 우울을 견딥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점점 바다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발이 닿지 않는 깊이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된 상태, 그게 우울증입니다. 발버둥 치고 헤엄치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 되는 거지요. 저도 그렇게 우울의 바다에 빠졌다가 살아 나왔습니다.


우울감이 심해지면 우울증이 되는가? 제 경우를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가 암의 유발인자인 건 분명하지만 그 자체로 암의 원인은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저도 우울감이 심해지는 과정을 겪은 건 사실입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담감이 많아졌습니다. 빨리, 일을 잘 해내고 싶었습니다. 그게 잘 안되니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마음이 날카로워졌습니다. 괴로웠지요.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가다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은 기억이 납니다. 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척, 잘 지내고 있는 척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내 마음의 괴로움을 감추는 게 너무 괴로웠습니다.

순댓국을 시키고 소주를 한 병 시켰습니다. 보통 술을 즐기지 않고, 더군다나 혼술은 거의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술로라도 마음의 괴로움을 달래고 싶었습니다. 희귀한 경우지요. 그렇게 마시게 된 소주 한잔!


아! 그 순간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주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내 온몸과 온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괴로움이 사르르 없어졌습니다.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처럼, 괴로움이 녹아내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샐러리맨들이 왜 일과 후 소주 한 잔에 마음을 달래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미안한 순간도 기억납니다. 집에서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 딸아이(아마 5,6살 무렵 아니었을까 합니다)가 놀아달라고 자꾸 귀찮게 굽니다. 갑자기 마음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더니 폭력성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납니다. 아이에게 행패를 부리게 될 상황을 겨우 추스르고, 사정하듯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요즘 많이 힘드니까, 아빠가 그만 가라고 하면 가야 한다. 알았지?’


아이는 더 이상 대꾸 없이 조용히 방을 나갔습니다. 그때 아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빠를 이해했는지, 겁을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발광하는 나를 생생하게 느꼈으니까요.


그런 발광의 상태, 거대한 감정의 파도가 몰아치는 경우가 심한 우울감의 상태입니다. 아직 우울증은 아닌 거지요. 저에게 우울증은 일을 포기한 직후 찾아왔습니다. 평생 하던 일을 포기하고 나니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내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었는데, 그 발전기가 꺼진 거지요.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데, 당신은 그것도 무거워, 힘에 겨워 헐떡거렸지요.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힘들어했잖아요? 

무얼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것 자체에 기진맥진했었지요.

그 순간, ‘아, 이젠 도저히 힘겨워 못 견디겠다’는 그 한순간을 넘기고 이제 당신은 우울의 시대와 이별한 거예요 

      -<유갓메일> ‘58년 개띠의 남자에게’ 중에서


그땐 정말 힘들었습니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것도 힘들었어요. 아무런 삶의 동력도 느낄 수가 없었지요. ‘살 필요가 없다’는 확신만 커져가니 죽음이 바로 눈 앞에 있습니다. 괴롭지는 않습니다.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요. ‘그래, 죽자.’고 결정을 하면 끝입니다. 사는 게 힘들지, 죽은 것은 전혀 힘든 게 아닙니다. 


어떻게 이겨냈느냐고요? 분명한 건, 내 상태를 이야기함으로써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우연한 기회로 여편에게 내 상황을 털어놓고 말했고, 그 이후 조금씩 동력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혼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꺼진 발전기를 다시 가동했고, 그로 인해 재활이 가능해졌다는 얘기지요.


사실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털어놓고 얘기를 하라’고 말하지만, 막상 그 상황에 있으면 전혀 그럴 생각이 나지 않거든요.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이겨낼 기운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삶의 의지가 있다는 증거니까요.


하지만 해야 합니다. 쉽지 않아도, 어려워도, 무조건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털어놓으면, 상처에 고여있던 고름이 빠지듯이 우울증이 약해집니다. 썩어가던 고인 물이 흘러내려가고 새로운 물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고, 전문가에게 나를 상담하고, 나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해나가야 합니다.


삶의 발전기가 꺼진 이유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게 나를 죽음으로 내모는 길을 막아줍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충분한 핑계가 됩니다.


이미 내가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 경우는 내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를 찾아본 편입니다. 간단하더군요. 사회적으로는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까운 가족밖에 살필 것이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딸... 안되었지만, 내가 없더라도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혹시 운이 좋으면 훨씬 훌륭한 새아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여편의 경우는 딸보다 감정적으로 복잡했습니다. 더 미안했지요. 잘 살고 싶었으나 미처 그러지 못했잖아요? 그러나 워낙 건강한 사람이라 잘 견뎌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딸을 만들어줬느니,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지는 않겠지요.(그때보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여편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커갑니다. 요즘은, 나 없으면 혼자 살기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가끔 합니다. 물론 착각이겠지요?)


결정적으로 내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를 찾은 건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신데, 어머니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건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어머니가 살아계신 한은, 나도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 생각을 이깁니다. 우울증은 부정의 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긍정의 생각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어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서라도,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이유라도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면 그게 불쏘시개 역할을 합니다. 

‘만화 <원피스>가 끝나는 건 봐야지!’는 어떤가요? 그렇게 하나 둘 힘을 얻어가면 됩니다.


우울증은 완치가 안된다고 합니다. 나의 경우도 가끔 되살아납니다. 아무런 문맥도 없이 불쑥 ‘그만 살고 싶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나의 상황이 나쁠수록 그 생각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요.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나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주변 상황도 나빠지지 않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비책, 죽으면 안 되는 나만의 이유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심하게 시달리지는 않습니다. '죽고싶다'는 생각이 올라오면 놀라거나 억누르지 않고 그냥 지켜봅니다. '너 왔구나!' 하고 맞아줍니다. 그렇게 인정해주면 그 생각은 곧 숨이 죽습니다. 순해집니다. '죽어야지'라는 생각도 나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면 얌전해집니다. 그저 1,000,000,000가지 생각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곧 사라집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두서없이 적어보았는데, 만약 우울증이 있는 분이 보신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주인공이고 나를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소용없지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은 내가, 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환상입니다. 분명히 나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부디 그 이유를 찾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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