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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ug 14.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42; 한라산의 심판


모든 것은 엄마의 계획이었지. 일주일 동안 제주도 여행을 가겠다고, 아빠한테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아빠가 말한 것은 단 두 가지였어. 첫째는 한라산 등정이고, 또 하나는 ‘빛의 벙커; 클림트전’이라는 전시회.


클림트전의 색채의 향연이 기대되기는 했으나 간절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일주일 여행에서 아빠가 목적한 바는 단 하나 한라산 등정이었던 셈이야. 나머지는 그냥 그 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고.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단순하고 게으른 사람이라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아. 좋게 말하면 큰 그림만 그리고 세부적인 것은 되는 대로 하는 거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하면 그럴듯한 말이고, 냉정한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말할 가능성이 많겠지?


물론 나 홀로 여행이 아니니까 계획은 필요해. 아빠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엄마가 있기 때문이지. “거의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라고 한 아빠의 말은 빈 말이 아니야. 지난겨울의 스페인 여행도 그랬지만, 엄마와 여행하면서 아빠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어. 엄마를 챙기는 일. 엄마는 여행을 챙기고, 아빠는 그저 엄마만 살피면 돼.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하지 않았니? 대모산 관악산도 올라보고, 스틱을 비롯한 등산장비도 사고, 물 부족에 대비해서 마시는 물의 양을 조절하는 연습도 했지. 고3 재수 시절을 거치며 약해진 너의 체력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준비 완료! 이제 오르는 일만 남았어.


그런데, 왜 그때 그 시점에 태풍이 오는 걸까? 일정을 앞당겼지만 날씨 상황은 좋지 않았지. 그러나 한라산 등정은 아빠의 유일한 목표였기에 포기할 수 없었어.


“뭐 하러 가요? 올라가 봐야 아무것도 안 보여요.”


전날, 아빠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어보았을 때 해변 카페의 주인은 그렇게 말했지. 너는 들었는지 몰라도, 우리 올라가는 중에도 그런 말을 들었어. 내려오는 사람이 그러더라고. 올라갈 필요 없다고, 안개 때문에 하나도 안 보인다고.


그러나 우리는 성판악에서 출발해 계속 올라갔고, 결국 정상 아래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멈춰야 했어. 강풍으로 입산이 통제된 거지. 아침 9시 이전까지만 정상 등반이 허락되었다고 했어. 아빠는 좌절하고 너는 환희의 만세를 부르고!


자, 여기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올라가 봐야 별 볼 일 없으니 아예 처음부터 올라가지 않는 사람. 그리고 열심히 일찍 준비해서 입산통제가 되기 전에 정상에 오르는 사람. 그리고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정상 문턱에서 멈춰야 했던 우리 가족...


너는 어느 쪽에 속하고 싶니? 어차피 정상에 올라가 봐야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힘들게 올라갈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이왕 목표를 세웠으면 정상에 도달해야 하므로 새벽 일찍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네 반응을 보면, 적당히 힘들기 전에 멈춰야 했던 우리의 산행이 나름 만족스러웠던 것 같기도 한데...?


일단 아예 올라가지 않은 부류는 제외하기로 하자. 무슨 일이든, 행동하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어. 아무리 이론적으로 지식이 많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 들어서 아는 것은 가짜지. 내가 직접 몸으로 체험할 때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거야. 한라산에 거세게 불던 바람과, 그 바람에 오묘한 물무늬를 만들어내던 산정호수의 풍경과, 무엇보다 내려오는 내내 신비한 나무와 숲을 보여주던 안갯속 한라산의 모습은 오직 경험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재산이야.


정상에 오른 것과 오르지 못한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솔직히 아빠는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전혀 아쉬움이 없어. 나 스스로 이상할 정도로 미련이 남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사실 아빠가 아빠의 일을 포 기했을 때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었는데,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약간 아쉬움이 남아있는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그게 뭘까?


“한라산을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합니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적어도 아빠는 3대가 덕을 쌓지 못한 거지. 한라산의 심판... 아빠는 이 심판을 받아들이려고 해. 인정하려고 해. 아니, 아빠의 마음 상태를 보면 이 심판을 받아들이는 게 분명해. 그렇게 한라산 정상을 오르고 싶어 했는데도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


일주일 내내 아빠는 한라산을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어. 맑은 날에도 정상은 항상 구름에 싸여 있었지. 고만큼,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정상까지 정도만큼 덕이 부족했어. 어떻게 해야 그 덕을 쌓을 수 있을까? 그 부족한 2%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그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


그러자면 3대가 뭘 말하는지 알아야겠지. 우리에게 3 대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그리고 너, 이렇게 해서 3대야. 범인은 이 중에 있는 거지. 그럼 누가 범인인지, 누가 덕이 부족한지 한번 찾아보자고.


흔히 30까지는 부모덕으로 산다고 해. 60까지는 내 덕으로 보고, 그 이후 죽을 때까지는 자식 덕으로 사는 거지.


일단 아빠 입장에서 살펴보자.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막 60을 넘었으므로 이제부터는 자식 덕으로 사는 거야. 대충 아빠는 80까지 살기 바라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사느냐는 전적으로 네 덕에 달린 거지. 다시 말해서 아빠가 한라산을 보지 못한 것은 네가 덕을 많이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 엄마는 이제 50대니까 부모 덕은 끝났고, 본인 덕으로 사는 시기지. 한라산을 거의 다 올라갔지만 정상은 못 봤으니 좀 더 덕을 쌓아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아! 아빠가 운전하는 동안 한라산을 잠깐 구름이 걷힌 한라산 정상을 봤다고 하니 덕이 충분하다고 봐줘야 하나? 이건 엄마의 주관적 주장이라 객관적 증명이 필요한 부분이긴 해.


다음은 네 입장. 너는 이제 막 스물을 넘겼으니 아직은 부모덕으로 사는 나이야. 그럼 부모가 덕이 부족한가? 아니지. 너는 애초부터 한라산을 볼 생각이 없었잖아. 네가 원하는 것은 한라산이 아니라 잘 먹고 잘 노는 여행이었잖아. 그런데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 너는 잘 먹고 놀았고, 게다가 한라산의 가장 힘든 코스를 ‘정당하게’ 오르지 않아도 되는 엄청난 행운을 얻었지. 이게 다 누구 덕인가?


사랑하는 딸!

아빠는 한라산의 심판을 믿는다.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게 좋았다”라고 엄마는 이번 여행을 말하는데, 아빠는 그중에서도 한라산의 심판이 가장 좋았다고 생각한다. 네가 덕을 잘 쌓아야 한다는 심판, 엄마 아빠에게 잘하라는 심판, 너의 삶을 충실하게 잘 살라는 심판, 네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라는 심판...


네가 자신이 생기면, 덕을 어느 정도 쌓았다고 생각이 들면, 그때 다시 제주도에 가자. 가서 너의 복이 어느 정도 쌓였는지 확인해 보자. 이번 여행이 변화무쌍한 날씨로 재미를 주었는데, 그때는 또 어떤 재미를 누리게 될지? 한라산은 어떤 심판을 내리게 될지?


       ---딸이 덕을 많이 쌓아서 빨리 한라산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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