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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ug 21. 2019

딸에게쓰는편지43;다음생애에 또그러면 너또 죽는다


사랑하는 딸, 오늘은 세상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해. 너는 TV나 뉴스를 잘 보지 않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잖아. 아빠도 TV를 즐겨보지는 않지만 그나마 보게 되는 것이 대부분 뉴스나 스포츠, 그중에서도 격투기지. 아빠가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결국 그곳에 멈추게 되는 것은 그게 그나마 생생하기 때문이야. 살아있다는 말이지. 나머지는 그저 그런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거고.


아빠가 뉴스를 보며 투덜거리면 엄마는 꼭 잔소리를 하지. ‘세상일에 관심 갖지 말고, 당신 일이나 신경 쓰라’고.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건 아주 유명한 영화 대사하고 같은 뜻이야.


“너나 잘하세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 씨>에서 금자 씨 역을 연기한 이영애의 대사야. 엄마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만, 아주 순화해서 표현을 한 거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모른 체하려고 해도, 아빠는 그럴 수고 없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벌어지는 불합리 불공평 부정과 비리에 대해 화가 나. 내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워. 그나마 우리는 복이 있어서 크게 문제 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아주 힘들고 거친 환경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


물론 어제오늘의 일들은 아니지. 어쩌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되는 문제일지도 몰라. 어떤 면에서는 조금씩 좋아지고 또 어떤 면으로는 오히려 더 나빠지기도 해. 그게 세상이고, 인생이고, 무한반복의 굴레일지도 모르지.


그럼 아무 새로울 게 없는데 아빠는 왜 오늘 갑자기 너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을까? 운동을 하다가 TV 화면에 어느 범죄 용의자의 말이 자막으로 나오는 걸 봤어. 처음에 제목으로 언급한 바로 그 말...


“다음 생애에 또 그러면 너 나한테 또 죽는다.”


그 사람은 피해자를 죽이고 사체를 절단해서 버린 흉악범이라고 해. 그런 사람이 반성은커녕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거지. 언론은 그 사람의 흉악함에 더 호들갑을 떨고.


이해를 돕기 위해 짧게 사건을 정리해 볼게. 그 사람은 모텔 종업원이었어. 죽은 피해자는 모텔의 손님이었는데, 돈 문제로 시비가 있었나 봐. 죽인 이유는 상대가 반말하고 무시했기 때문이래. 숙박비 4만 원 때문에 티격태격했고, 기분이 나빠진 살인 용의자가 피살자가 잠든 사이 방에 들어가 죽인 거지. 당사자는 “흉악범이 양아치를 죽인 사건”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렸다고 해.


어떻게 보면 요즘 흔히 보는 사건이지. 사체를 토막 내서 유기하는 행위도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고. 그런데 ‘또 그러면 또 죽는다’는 말이 아빠의 마음을 건드렸어. 이건 확신범의 말투야. 옛날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제기했던 질문, ‘죽어야 할 사람을 내가 죽인다’는 심판관의 태도.


나는 여기서 어떤 변화의 흐름을 느껴. 거대 담론, 도덕의 틀이 무너지고 각 개인의 주체적 판단이 행위의 기준이 되고 있어.(어쩌면 게임 같은 것이 보편적 일상이 된 때문인지도 몰라. 게임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지. 내가 이겨내지 못하면 탈락 되고 마는 거니까, 나는 무슨 수를 쓰던지 살아남아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 게임을 완수해야 해. 옛날에는 내가 세상의 작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세상이 나의 부분이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니까.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 판단에 의지해야만 하는 거지.)


객관적 옮고 그름보다 주관적 판단이 중요해졌어. 흔히 말하는 ‘삼강오륜’? 그런 거 없어. ‘나’가 중요하고, ‘나’의 세계가 가치판단의 전부야. 앞의 살인 용의자가 ‘남들한테는 사소할지 몰라도 당사자한테는 사람을 죽일 만큼 큰 원한일 수 있다’는 뜻의 말을 한 것은 바로 그 맥락이지.


얼마 전 이혼한 남편을 죽인 고 아무개 씨가 화제가 되었는데, 그것도 유사한 사례야. 역시 주관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지. 일부 매스컴에서 그 사람이 평소 웃고 즐기는 화면을 보여주면서 마치 크게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나는 그런 매스컴의 태도가 오히려 문제라고 봐.


그런 보도태도는, 엽기적 범죄와 평범한 일상을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오히려 인간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불신을 야기할 뿐이야. 쓸데없이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저 사람이 어쩌면 살인마일 수도 있다’는 불결한 상상력을 유발할 수도 있어. 그것이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징후임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 되어야 해.


“너나 잘하세요.”


언론 탓을 하려니 자동적으로 엄마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서 얼른 본론으로 돌아갈게.

내가 굳이 험악한 사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사람을(상대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야. 옛날에는 도덕이나 굳건한 사회체계가 나름의 질서를 세웠기 때문에 각 개인은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 그런데 이제 그게 무너지고, 각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질서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시대가 되고 있어. 사회적 불평등이나 빈부 격차는 전보다 더 굳건해져 가지만, 개인적 지위는 (남녀, 빈부, 인종, 능력을 불문하고)급격히 평등을 향해 변하고 있지.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의 도래! 그러나  내 앞의 상대가 어떤 질서에 의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고 존중해 줘야 해. 그 사람의 인격과 세계관과 삶의 체계를 인정하고 대하지 않으면 어떤 반격이 올지 예측할 수 없어. 종교적으로 말하면 만물이 부처이고 하나님이므로, 상대를 부처님 대하듯, 하나님 대하듯 하라는 말이지.


사랑하는 딸!

항상 아빠가 하는 말의 결론은 이거야. ‘내 세상은 내가 만든다!’

내가 상대를 존중하는 만큼 상대가 나를 존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존중하는 세상을 원한다면 나는 그 길을 가야 해. ‘나는 살벌한 싸움판을 원한다’ 면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수도 있겠 으나 착각일 가능성이 크지. 싸움의 원인은 대개 사랑과 존중이 깨진 것에서 출발하니까. 다시 말해 싸움의 목적은 사랑과 존중이니까.


너는 이제 스무 살, 막 너의 세상을 만들기 시작한 나이지. 부디 멋진 너만의 세계를 완성해내길 바랄게. 그 세계가 꼭 엄청 대단할 것일 필요는 없어.

그저께 엄마하고 온천 갔다 오면서 노래를 들었지. 우리 집 DJ는 엄마잖니? 엄마가 선택한 노래들이 다 좋더라고. 그래서 그런 얘기를 나눴지. 마리아 칼라스 건 이름 없는 가수건, 어떤 가수가 더 훌륭하고 아니고 그런 건 없는 것 같다고. 중요한 건 얼마나 자기 노래를 부르느냐 하는 거라고. 자기 개성으로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면 다 좋고 아름다우니까. 인생도 마찬가지. 돈이나 명예가 많고 적음이 성공의 기준일 필요는 없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신에게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가 하는 거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건 간단해. 아름답다고 느끼면, 좋다고 생각되면, 마음이 가볍고 충만하면 잘 살고 있는 거야. 부디 너도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딸이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기를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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