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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May 03.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38; 기념일에 대한 변명


사랑하는 딸!

어제는 우리 집 2대 기념일 중 하나였지. 수업 늦게 끝나고 힘들었을 텐데 꽃다발까지 사들고 오느라 고생했어. 하지만 좋은 저녁 먹고, 네가 원하는 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었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지?


우리 집 2대 기념일... 사람들에게 맞춰보라고 하면, 아마 맞추는 사람 거의 없을 거야? 결혼기념일이야 대부분 챙기는 것이니까 쉽게 맞추겠지만 다른 하나는 일반적이지 않지. 사실 연애할 때는 ‘오늘부터 1일’이라느니 ‘100일’ ‘1000일’하면서 열심히 챙기지만, 결혼한 다음에도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는 건 상식은 아니야. 결혼기념일로 대체가 된 거니까.


기념일은 왜 필요할까? 사실 기념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아. 특히 남자들일수록 그렇다고 하지. 심지어 아빠 친구는 자기 생일도 그냥 잊어버리고 지낸다고 해. 어찌 보면 그게 세상을 편하게 잘 사는 방법일 수도 있지. 아니면 무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야 되나?


나라에서도 기념일을 지정해 관리하고, 중요한 기념일은 공휴일로 정해서 모두 쉬도록 하고 있어. 개인적 기념일은 잊고 살아도, 국가지정 공휴일은 잊을 수가 없지.

그러면 국가에서는 왜 그렇게 공휴일로 하면서까지 그 날을 기억하도록 하는 걸까?


... 지난번에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 가면서 왜 성묘를 해야 하는지 얘기한 적 있지? 너는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고, 아빠는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고쳐 말했어. 할아버지는 우리 집의 역사고, 아빠의 역사고, 너의 역사니까.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뭐겠어? 옛날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것은 옛날이 아니라 지금 현재야.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나를 살피고 돌아보라는 거야. 기념은 기념하는 대상이 중심이고(과거), 기억은 기억하는 내가 중심이지(현재). 온고지신(溫故知新)... 과거를 배워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역사가 필요한 거야.


할아버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야.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역사를 거울삼아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야. 할아버지가 잘 살고 못 산 점을 살펴서 내가 보다 나은 삶을 사는 토대로 삼으려는 거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살아계신 할머니를 잘 모시는 것이, 사실은 나 자신의 인생을 존중하는 표시인 거야. ‘공부는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효도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지.

-- 딸에게 쓰는 편지 21;지금이라도 말할게요 ‘어머니 고맙습니다' 중에서


지난번에 쓴 편지를 고쳐서 다시 말해볼게. 국가가, 그리고 우리가 기념일을 챙기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잊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의 일로 기억하고 되살리자는 뜻이야. 결혼기념일이 단순히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었다는 물리적인 숫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결혼할 당시의 그 마음 그 뜻을 잊지 말고 잘 살아가자는 뜻이라는 거지. 우리 인간은 잊어버리는 게 기본 장착된 기능이니까.


사랑하는 딸!

아무리 그래도 엄마 아빠가 처음 만난 날까지 기념일로 챙기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니? 아빠가 굳이 편지까지 해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것도 그것에 대한 변명이 필요하다 싶어서야. 모르는 사람들이 비웃는 거야 넘겨버리면 그만이지만, 네가 동의하지 않는 건 매우 심각한 문제 아니야? 기념일 하는데 너의 사전 동의를 받지는 않았지만 사후동의 절차라도 밟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진 거지.


너도 알다시피, 아빠도 인정하다시피, 아빠는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야.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 다만 나쁜 아빠 나쁜 남편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자상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줄도 모르는 밋밋한 아빠가 그나마 나쁜 아빠 나쁜 남편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찾아낸 것, 그게 기념일 챙기기야. 연예인 아무개처럼 한 번도 열정적인 이벤트를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정해진 기념일은 잊지 않고 챙기잖아?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게 먹고 꽃다발 주고받으며 지내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일 년에 몇 번 기념일을 정해서라도 잘 먹고 잘 놀아보자 그게 아빠가 기념일을 챙기는 진짜 이유야. 경건한 의식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축제 같은 거지.


그러니 딸아. 

만약 누가 ‘뭐야? 그런 것도 기념일로 챙겨? 너무 심하잖아?’라고 말하면 시크하게,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해 주면 돼. 

“그냥 놀자는 거지 뭐. 너는 노는 거 싫어?”


  -- 딸이 매일매일을 기념일처럼 잘 지내기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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