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

2026/01/01

by 나무느을보

30.


어느 오래된 물건인들 정신이 깃들지 않을 일이 있을까 만은,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에는 예로부터 귀신이 들기 쉽다고 했다. 사람들처럼 눈을 가진 것들에 우리는 맘을 쓰고 그 마음을 타고 누군가 깃든다면 그것은 하나의 서글픈 연이다. 깃들었다면 본인의 마음일 테고, 두려워하는 것도 본인의 마음이다.


시야로 작게 깎은 목각인형이 보인다. 관절부에 헐거운 핀을 박아서 다리가 덜걱거린다. 녀석은 높은 곳에서 찻집에 모여드는 이들을 관조하고 있다. 하주 휑한 눈으로. 하지만 그 조망이 그렇게 나쁜 기분을 자아내진 않는다. 그의 뒤로는 작은 인공의 화초가 담겨있고 가끔 거미는 그곳에 집을 튼다. 마음을 쓰는 것은 목각인형이 넘어지는 행세를 취할 때이다. 그 높은 선반에 있는 것이 무엇에 밀려나는지 가끔 단단한 배를 내밀고선 위태롭게 있을 때가 있다. 까치발을 들어 몰래 그것이 넘어지지 않게 해놓으면 누군가 괴상한 눈으로 볼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사소한 주변머리에 신경을 놓지 않는다. 그것을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것이 릴케가 말하는 ‘보는 법’이겠지만 모두가 시인인 사회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눈으로 말하자면, 저 위에서 관조하고 있는 목각인형의 텅 빈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것을 하나의 우주로 엮을 그물눈―말하자면 화소―가 필요하다. 그것을 언어라 칭한다. 이것과 저것을 엮는 일. 저것으로부터 그것을 유추해내는 일이 시라면, 시인은 매듭짓는 사람이라 일컬을 만하다.


목각 인형처럼 눈을 텅 비우고 관조하는 법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언어의 이중성이란 늘 어긋난다는 것이다. 언어는 발음과 심상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이 본질이 되진 못한다. 그것은 하나의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표상으로 다른 표상을 자아내는 것이 시인의 책무라면 시인의 일은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일에 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과 흙을 이겨 만든 것엔 사람의 손이 깃든다. 그래서 빚은 도기인형과 목각인형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적나라한 아우라를 뿜는다. 두려움. 적시. 그리고 갖은 감정들. 살짝 구푸리면 오히려 사랑스러운 것들이 엿보일 수 있는 시야각이 벌어질지 모른다. 오래 쓴 물건에 손때가 붙듯 사람의 마음이 쓰인 물건들은 모두 정신이 깃들 수 있다 믿는다. 그러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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