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2025/12/18

by 나무느을보

4.


선뜩한 빛으로 빛난다. 분종에는 푸른 이끼가 담겨져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는다. 사람들은 먹먹한 가슴을 부둥키곤 서로의 말을 토한다. 토한 것들은 하나같이 흙탕의 빛을 발한다. 무엇을 원했던 간에 당신의 상처에 대해서 모른다. 우린 서로의 상처에 대해서 무심했으니 별 수 없다. 우린 서로 간에 떨어진 왜성으로 자리한다. 다만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그 자리에 내가 있고자 했다. 아주 치밀하고 견고한 곳에 당신이 자리한다. 나는 그곳을 비추지만 다가설 수 없다.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얕게 뛰고 겁이 많다. 얼룩덜룩한 무늬를 지녔고 귀 끝이 잘린 것을 보니 중성화를 마쳤다. 녀석은 겁쟁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아기들은 무척이나 겁이 없는데 비해 어떤 아기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 떠나가면 버리고 갈 새라 촛불처럼 운다. 온몸이 바스러지도록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다신 오지 않는 줄 알고, 차갑고 진동하는 것들이 겹쳐서 나는 주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죽음은 오히려 그보다는 단출하고 소문 없이 사람을 얼싸 안는다. 잠을 이기려 도리질을 치는 것처럼 우리는 그에 빨려드는 것이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이슬이 맺히고 얼고 녹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나쁘게 볼 수 없었다. 체머리를 떨곤 주변을 살핀다. 누가 남았다. 그 누구도 남지 않았다. 누가 남았건 돌아볼 생각조차 못했다. 다만 겁에 질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뭔가를 곰씹다가 뱉어놓는다. 얇은 모가지의 가마우지 한마리가 날개를 말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르는 법 없이 꿀떡 삼킨다. 나는 그 속의 물고기가 된 것 같다.


고양이는 한동안 떨었다. 근처에 비둘기 무리가 있었다. 비둘기는 무리를 지어 행동한다. 그리고 그런 놈들치곤 영특치 못한 놈을 못 보았다. 사람들도 무리 짓는다. 원숭이 무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5.


스물여덟이야. 귀가 선다. 나의 귀는 뭐든 연관 짓고야 만다. 나의 나이와 나의 생각 심지어 나의 기억과 감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거미줄처럼 얽어놓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가타부타 의심부터 해야 마땅하다.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내뿜는 따듯한 것들이 내겐 주홍빛으로 가닿는다. 너무나도 따스하고 노르스름한 등광처럼 나를 안는다. 그래, 마치 잠기운을 닮은 죽음처럼, 전날 꾼 악몽처럼 내게 기척 없이 다가서 나를 진동시켜놓는다. 고로 나는 당신을 사랑함과 동시에 두렵게 여긴다. 가끔 악연이 빗겨가면 나는 당신은 왜곡시켜 기억에 남길 것이다. 그게 나이다.


그 나이에 죽었어. 내 둘째 아들은. 뜨문뜨문 잘려 들어오는 말에 나는 안심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말이다. 정말 상관없는 말은 아닐지라도 당장은 연관되지 않는 말이다. 그게 나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고로 나는 머리를 차분하게 만들고 다시 주변을 관측하게 만든다. 이제 내 안광은 녹색이다. 축축한 이끼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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