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시선의 방식을 담은 안광(眼光)
시선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부서부터 외부로 향한다는 점에서 그 일은 폐쇄적이다. 빛은 외부에 존재하여 내부로 흘러드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시선의 반대말이 된다. 위험한 안광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작은 찻집이었고, 그 두 사람은 중년이었다. 다소 말씨가 거칠고 일상적으로 들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곧 날카로운 앞니를 가진 사나운 쥐들을 담은 포대기가 풀어지고, 사람들 사이서 기색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음험한 눈길에 띄는 노르스름한 빛과 살기의 푸른빛 사이에 대해서 말했다. 사형수들이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파란 안광 그것만큼은 위험하다며. 나는 그 번뜩이는 빛을 거리의 광인에게서 느낀 적이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서 그는 광분에 잠겨 허공을 향해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손바닥으로 잡채고 꿇어앉힐 것 같았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깨끗한 아이의 시선에 대해 떠올렸다. 무구한 아이의 눈은 투명하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담아내고야 만다. 아이는 의미를 가늠하는 일 없이 눈앞의 대상을 살핀다. 고로 투명한 눈 안에 그대로 담기게 된다. 투명한 시야는 곧 희뿌옇게 변색되고 다양한 빛을 갖추고 하나의 익숙한 각도를 찾아낸다. 그것을 잘못이라 말할 순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다. 가령 눈 맞춤을 피하는 이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사람들은 나아가 추측하기도 한다. 이는 억측이긴 하지만, 시선이 가지는 힘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사람은 시선으로부터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통제로서의 시선은 가히 기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시선은 사물적인 취급을 위해서 이뤄진다. 적어도 변수로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판옵티콘 바깥에 존재하는 교도관의 시야나 적을 감시하는 망루 위 보초의 시야가 그러하다. 그들은 지키고 통제하기 위해 시선을 다룬다. 때문에 일방적이고도 차갑다.
시선의 방식에 대해서 말하던 두 중년은 곧 상기된 얼굴로 거친 회담을 나누다 자리를 떴고, 나는 그 자리에 노르스름한 병의 기운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했을지 모른다.